마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미국의 어느 세미나 강사가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청중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지갑 속에 있는 100달러 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었습니다. 마치 은행에서 갓 찍어낸 듯이 빳빳한 신권이었습니다. 그는 그 돈을 손에 쥐고 흔들면서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100달러 짜리 지폐입니다. 저는 이것을 원하시는 분에게 드리겠습니다. 이것을 원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미국 사람들은 자기 감정을 솔직하고도 적극적으로 잘 표현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세미나 강사는 갑자기 그 새 돈을 양손에 쥐고서는 마구잡이로 구겨버렸습니다. 그러더니 그 구겨진 돈을 손가락으로 집어들고서 또다시 청중들에게 물었습니다. "자, 이렇게 구겨진 돈이라도 갖기를 원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모두가 또다시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세미나 강사는 그 구겨진 돈을 바닥에 던지더니, 자기의 구둣발로 몇 번 지근지근 밟았습니다. 이제 그 지폐는 먼지가 잔뜩 묻어서 아주 지저분해졌습니다. 세미나 강사는 또 물었습니다. "여러분! 이 지폐가 이렇게 더러워졌는데도, 그래도 갖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어디 한 번 손들어보십시오." 청중들은 역시 모두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때 그 세미나 강사는 이렇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여러분! 이 100달러 지폐가 아무리 구겨지고 짓밟혀졌어도 여러분이 이 돈을 그래도 원하시는 이유는 이 돈의 가치가 상실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때로는 실패로 인해서 구겨지기도 했고, 때로는 당하는 환난으로 인해서 짓밟히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서 우리의 가치 자체가 상실되는 것은 아님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삶의 가치에 대해서 교육을 했습니다. 금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금년 한 해 우리의 삶을 돌이켜볼 때 우리는 때때로 쓰러질 때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입니다. 또 때때로 죄로 인해서 우리의 모습이 얼룩질 때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소홀히 생각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그 옛날 바리새인들처럼 우리의 겉모습이 깨끗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복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매 순간 마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8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들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깨달아왔습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를 읽어보면 행복의 여신이 등장합니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남긴 아름다운 자취들을 보면서 그가 그곳을 지나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불로 타죽은 나무들도 행복의 여신이 그 곁을 지나가면 모두가 살아납니다. 죽었던 나뭇가지에서는 싱싱한 새 잎이 돋아납니다. 가뭄에 바짝 말라버린 들판도 행복의 여신이 그 위를 지나갈 때, 풀들이 자라며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납니다. 웅덩이에 고여서 썩어가던 물도 행복의 여신의 옷자락이 닫기만 하면 맑은 시냇물처럼 생수로 바뀌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기롭게 만들며, 우리 주변의 불행한 사람들을 행복의 길로 인도해줍니다. 그러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소중한 인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쓰러지기도 하지만 결코 우리 자신들을 소홀히 여기거나 과소평가하지 맙시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고, 긍지와 자부심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리켜서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그만큼 소중한 존재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등불을 켰으면 등경 위에 두어야지, 말 아래 덮어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리도록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렇게 세 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선언하신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3절과 14절 첫 부분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금처럼 빛처럼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소금으로서 빛으로서 그 기능을 제대로 잘 감당하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세상의 소금처럼, 세상의 빛처럼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기정화된 사실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소금입니다. 빛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아직도 세상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 세상은 소금인 우리를 필요로 할 만큼 부패되어 있습니다. 빛인 우리를 필요로 할 만큼 어두워져 있습니다. 창세기 3장 기록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서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들은 범죄함으로 타락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불과 3장 뒤인 창세기 6장을 읽어보면 무슨 내용이 나옵니까? 하나님이 보시니까 온 땅에 사람의 죄악이 관영했다고 하셨습니다. 오죽 하셨으면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노아와 그의 가족, 모두 합쳐서 8명을 제외하고서는 모든 타락한 인류를 홍수로 지면에서 쓸어버리셨습니다. 그로부터 또 몇 세대가 흘러가지 않았을 때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지극히 타락했습니다. 바로 노아와 그 가족들의 후손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죄악이 너무 큰지라 하나님은 그들을 불로서 멸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님을 거스려 비판하고 정죄하더니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만큼 악했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점점 악해져가고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복제인간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할 만큼 사람들은 악해졌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장차 마지막 날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를 불로서 심판하실 두려운 광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벧후3:10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타락한 채, 어둠 속을 방황하며 멸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그들의 타락을 막고, 그들을 빛 가운데서 생명의 길을 걸어가도록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일은 정치인들이 할 수도 없고, 과학자들이 할 수도 없고, 지식인들이 할 수도 없습니다. 감옥에서 죄수들을 돌보는 어느 교도관의 이야기입니다. 옛날에는 우리나라에도 글을 깨우치지 못한 문맹인들이 많았습니다. 당연히 죄수들 가운데도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교도관은 인간의 범죄가 무식과 무지에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죄수들을 상대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한 수인이 그의 뜻을 잘 받들어서, 부지런히 글을 깨우쳤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출소하는 날, 자기에게 글을 가르쳐 준 교도관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에게 글을 가르쳐준 것에 대해서 감사를 하면서,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교도관님, 이제는 글도 깨우쳤으니 새사람이 되어서 교도관님의 은혜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교도관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그에게 열심히 살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다가 그 사람이 또 죄를 지어서 다시금 감옥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 교도관이 살펴보았더니, 그 사람의 죄목이 "문서위조죄"였다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글을 배워서 그것을 써서 사기를 치다가 다시금 쇠고랑을 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의 문제는 인간의 지식, 과학, 도덕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타락하고 어두운 이 세상을 바로 잡아나갈 사람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인 우리들 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경고의 말씀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예수님 당시는 지금처럼 소금을 정제하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해 근처에서 생산된 소금에는 때때로 석고와 같은 이물질이 섞여 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석고의 색깔은 희니까, 육안으로는 소금과 잘 분간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석고는 짠맛을 내지 않고, 오히려 비위를 거스리는 역겨운 맛을 냅니다. 따라서 소금에 석고가 많이 섞여 있으면, 소금은 소금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내다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내다버린 소금이 밭이나 정원에 떨어져 식물들에게 지장을 주면 안되니까,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바닥에 내다버립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오가며 밟고 다니는 가운데, 소금과 석고는 잘게 부수어져서 먼지처럼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소금은 참으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짠맛을 내면서 자신의 기능을 십분 발휘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고 길바닥에 버리워 오가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며, 먼지처럼 덧없이 사라져 버린다면 그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물론 소금이 짓밟힌다고 해서, 먼지처럼 잘게 부수어진다고 해서 소금이 다른 물질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소금은 소금으로서 그대로 남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100달러 짜리 지폐가 구겨진다고 해서, 짓밟힌다고 해서 그 가치 자체가 상실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구원 자체가 상실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세상의 소금으로서 해야할 사명이 많은데, 그것을 못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빛에 대해서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빛의 속성 가운데 으뜸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두움은 모든 것을 감추고 숨기지만, 빛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환하게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성지 이스라엘에는 산들이 많습니다. 그 옛날 유대인들은 산꼭대기에 집을 짓고 동네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주야로 사람들의 눈에 환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낮에는 햇빛에 반사되어 환하게 뵐 테고, 밤에는 집집마다 켜놓은 등불로 인해서 환하게 보일 것입니다. 이처럼 빛은 자신도 드러내고, 자기 주변에 물체들도 환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집안에 있는 어둠을 물리치고, 집안을 환하게 비추려면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등불을 켜서 말로 덮어버리면 주변을 비출 수가 없습니다. 말은 곡식을 될 때 사용하는 그릇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열 되를 한 말이라고 부릅니다. 아무튼 등불을 켜서 말 아래 감추어놓으면 등불을 켠 사람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안타까운 일입니까? 물론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었다고 해서, 등불의 성질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등불은 등불입니다. 단지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여러 해전 미국의 캔자스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농사일을 하는 두 부부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그들의 네 살난 아들이 밀밭 사이로 들어갔습니다. 워낙 대규모의 밀밭입니다. 게다가 밀이 자랄 데로 자라서 아이의 키를 완전히 덮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없어진 줄 나중에서야 알게 된 두 부부는 미친 듯이 밀밭 사이를 헤매면서 아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몇 시간을 찾아 헤매었지만 아들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그 소식을 전해들은 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들은 한 줄로 늘어서서 손에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밀밭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잃어버린 아이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생명은 이미 끊어진 뒤였습니다. 그때 그 기사를 전한 잡지의 머리말은 이러했습니다. "O God, if only we had joined hands sooner."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손을 잡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하지 못해서 그 귀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라는 장애물과 어두움에 가려서 그들은 아버지의 집인 천국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흑암에 가리워 진 채 방황 속에 죽어가는 심령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을 위해서 우리는 어서 어서 손을 잡아야 합니다. 소금 한 알갱이는 미약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합쳐질 때는 짠맛을 냅니다. 빛 한 줄기는 미미합니다. 그러나 광선이 합쳐지면 어두운 방을 환하게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너는"하면서 단수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너희는"하면서 복수를 사용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인 우리들이 함께 손에 손을 잡을 때, 비로소 우리는 소금과 빛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처럼, 말 아래 둔 등불처럼 숨어있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우리 모두 힘있게 손에 손을 잡을 수 있기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당부하신 말씀을 살펴봅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의 손을 잡고서 집을 나서면서 당부합니다. "얘들아, 가문의 명예를 생각해라. 너희들이 다른 사람 앞에서 착하게 행동하면 우리 가문의 영광이 높아지는 거란다. 그래야 아버지가 너희들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거란다." 이렇듯 예수님은 우리를 당부하신 것입니다. 소금은 자신을 녹임으로서 짠맛을 냅니다. 등불은 자신을 불태움으로서 빛을 발합니다. 소금이 소금으로서, 빛이 빛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이 "세상의 소금"으로서, "세상의 빛"으로서 우리가 해야할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게 마련입니다. 때로는 핍박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고난이 저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의 의미를 압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에게는 고난이 오히려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빙점이라는 소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본의 여류 기독교 소설가인 미우라 아야꼬 여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때 척추에 이상이 생겨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만 지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병상에 누워서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척추를 다쳐서 꼼짝도 못하고 가만히 누워만 있어야 하는데, 이 기간 동안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에게 멋진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밝은 웃음을 선사하기로 하자.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 속에서도 결코 낙심하지 않고 늘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 그리고는 그때부터 자신의 얼굴 표정을 밝게 하면서, 보는 사람마다 웃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의사를 보아도 환하게 웃고, 간호사를 보아도 환하게 웃고, 옆에 있는 환자를 보아도 밝게 웃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허리를 다쳐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 계시는 분이 뭐가 그렇게 기쁘고 즐겁습니까?" 그때마다 미우라 아야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만 생각하면 너무도 행복하답니다." 그는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동안에, 내가 건강할 때보다도 더 많은 사람에게 전도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수 있었다." 우리가 형통할 때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얼마든지 더 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때로는 고난이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형통할 때도 있을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많이 배운 사람, 얼굴이 잘난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는 소금처럼, 빛처럼 이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바로 VIP들입니다. Very important person, 곧 대단히 중요한 인물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소금처럼 기꺼이 우리 자신을 녹임으로서 짠맛을 내어 우리 주변의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어야지,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나쁜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떳떳하게 등경 위에 올려놓은 등불처럼 환하게 빛나야지, 말 아래 둔 등불처럼 숨어 지내거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신분을 나타내기를 두려워하고 꺼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태양 빛을 듬뿍 받은 달이 밤하늘을 환하게 비춥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듬뿍 받은 자들입니다. 이제는 부패한 이 세상에 은혜의 빛을, 진리의 빛을, 사랑의 빛을 환하게 비추는 우리들이 되기 바랍니다. 단12:3의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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