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5:17∼19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남북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남군의 리장군은 수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워싱턴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펜실베니아주의 게티스버그를 향해서 밀어닥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서 백악관에서는 링컨 대통령을 위시한 각료회의가 열렸습니다. 모두들 긴장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링컨 대통령만큼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각료 가운데 한 사람이 놀랍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각하, 지금 리장군의 군대가 게티스버그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잠시 후면 미국 전역이 전쟁의 도가니로 변해버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통령께서는 어떻게 그처럼 침착하실 수 있습니까?" 그 물음에 링컨은 미소를 띠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소. 나는 어젯밤 늦게까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소. 아무리 생각해도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오. 어제도 역시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소. 의를 위해 싸우는 우리에게 승리가 있을 것임을 나는 확신할 수 있었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는데 우리가 두려워할 까닭이 무엇이겠소?" 링컨 대통령의 그 말에 모든 각료는 마음의 평안해졌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워싱턴에 있는 박물관에 가면 링컨 대통령이 쓰던 성경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 속에는 너무나도 자주 보아서 눈에 드러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주변에는 눈물 자국도 있습니다. 단어마다 손가락으로 눌러서 생긴 손때 묻은 자국도 있습니다. 시34:4의 말씀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링컨은 살아오면서 많은 실패를 겪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남북 전쟁을 비롯해서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았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그는 시34:4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9살이 되던 해 그의 어머니 낸시는 세상을 떴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낸시는 사랑하는 아들 에이브라함 링컨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네가 부자가 되는 것보다도, 위인이 되는 것보다도 성경 읽기를 즐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아들아, 부디 매일 성경을 읽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가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삶의 위기가 닥칠 때는 더욱 열심히 성경을 읽도록 하여라. 이것이 내가 너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말이다." 링컨은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서 어릴 때부터 성경을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삶 속에 살아 역사하면서 그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그리해서 그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앞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떡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따라서 말씀이 우리 발의 등이요, 우리 길의 빛이 되어서 우리의 걸음 걸음을 지키시며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살아 역사하면서 우리의 삶을 승리롭게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얼마나 축복받은 자들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 날마다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더욱 사랑하며, 더욱 가까이 하며, 더욱 깊이 묵상하고,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함으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세 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17절에서 예수님은 성경 말씀의 절대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18절에서 예수님은 성경 말씀의 영원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로, 19절에서 예수님은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받을 축복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한 절씩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경의 절대성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우리는 성경을 신약과 구약으로 크게 나눕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구약만 있었고 신약은 없었습니다. 신약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신약과 구약으로 나누듯이 유대인들은 구약을 율법과 선지자로 크게 나누었습니다. 구약의 첫머리에 나오는 다섯 권의 책, 곧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가리켜서 율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모든 책을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은 요즘의 구약 성경, 그 당시로서는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성경을 폐하는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반면에 자기들은 성경에 충성된 자들이라고 자처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해봅니다. 예컨대 성경에는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계명을 철저하게 지킨답시고, 안식일에는 짐도 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짐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가? 어느 정도 범위를 짐으로 보느냐? 그들은 이 문제를 놓고 오랜 기간 토론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합의된 사항을 유전으로 만들어서 지키게 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무화과나무의 열매 한 개 이상의 무게는 짐으로 간주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안식일에는 지팡이를 못 집게 했습니다. 절뚝발이는 목발을 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심지어 의족을 달고 있는 사람도 안식일에는 그것을 벗어놓아야만 했습니다. 그것을 들고 있으면 짐을 지고 있는 것이니까,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그러뜨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여기에 환자가 있습니다. 그러면 안식일에는 치료를 하되 그 병이 더 심해지지 않을 정도로만 치료할 수가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병을 낫게 한다면 그것은 일하는 행위로 간주되어서 계명을 어긴 셈이 되었습니다. 하여간 그들은 온갖 유전을 다 만들어서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느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동안이나 병들어 누워있던 사람의 병을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 이 한 가지만 하더라도 그들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일을 하신 셈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안식일에 예수님이 병을 낫게 하신 것만 해도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눈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거기에다가 그 병자에게 자기 자리를 들고서 걸어가라고까지 말씀하셨으니까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성경을 폐하는 자라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성경 말씀을 폐한 사람이 예수님이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폐한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의 참뜻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근본적인 취지를 그들은 망각해버린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저 자기들의 인간적인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저런 잡다한 유전들을 만들어서 계명을 피상적으로만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명의 참뜻과 근본적인 취지를 아시기에, 안식일이었을지라도 병든 자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그의 병을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에 있는 그 어느 한 말씀이라도 결코 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리하심으로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완전케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성경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인 창3:15의 말씀대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한 성경 말씀대로 처녀의 몸에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또 미가 선지자가 기록한 성경 말씀대로 예수님은 유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성경 말씀대로 죽으셨습니다. 성경대로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은 성경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시고, 그의 순종적인 삶을 통해서 성경 말씀을 완전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예수님 자신의 말씀으로, 새로운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 번 다 신명기에 있는 성경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예수님은 그만큼 성경 말씀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우리 자신의 의를 내세우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약화시키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성경 말씀의 권위 앞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들이 그대로 이루어지며 완전케 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는 정말 너무나도 축복 된 자들입니다. 둘째로, 성경의 영원성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성경이 절대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경 말씀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경이 권위 있는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 말씀이 영원하지 못하고 시대에 따라서 바뀔 수밖에 없다면, 성경은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결코 변할 수 없는 영원성을 가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실 때, 종종 이러한 표현을 쓰셨습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마지막 날,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옛 하늘과 옛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세상 끝날까지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구약 성경은 본시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일점은 히브리어 알파벳 가운데서 가장 작은 문자인 요드를 가리킵니다. 영어의 아포스트로피(')와 비슷한 형태입니다. 그리고 일획은 히브리어 알파벳을 서로 구별하기 위해서 쓰던 방식이었습니다. 예컨대 우리 말의 ㅅ자 위에 옆으로 한 획을 더 그으면 ㅈ이 됩니다. 그 위에 비스듬히 한 획을 더 그으면 ㅊ이 됩니다. 히브리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획을 각지게 하느냐, 둥글게 하느냐에 따라서, 또 획을 붙이느냐 띄어 놓느냐에 따라서 글자가 달라집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말씀 중 단어 하나, 문자 하나는 말할 것도 없고, 그 글자를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한 점, 한 획까지라도 변함이 없이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성경 말씀의 영원성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봅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 당시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경 가운데에서도 율법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성경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던 주된 이유는 모세가 율법서에 부활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모세는 말하기를 사람이 만일 아들이 없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한 가지 예를 들면서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중에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 장가들었다가 후사가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생이 형수를 취했습니다. 그런데 그도 후사가 없이 죽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일곱째까지 계속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말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그러한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주저하시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그러면서 예수님은 율법에 속한 출애굽기 3장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모세의 가시떨기나무에 관한 글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이 부활의 근거로 제시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미 오래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다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느니라"고 과거형을 써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고 현재형을 쓰셔서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지금도 살아있다는 사실을 모세도 증거하고 있음을 예수님은 율법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명쾌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세보다도 수백 년 이전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예수님보다도 1400년 앞선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시대를 초월해서 영원불변한 진리의 말씀으로 남아있음을 예수님은 보여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가리켜서 수천 년 전에 기록된 하나의 고전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에게는 성경 말씀이 절대적이고 영원한 불변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지금도 살아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면서 우리 길의 빛이 되고 우리 발의 등이 되어서 우리의 발걸음을 의의 길로,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셋째로,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받을 축복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기독교 안에도 수많은 교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관이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와 성경관이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과 성경관이 다른 셈입니다. 소위 말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특별히 성경 속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기적과 이상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재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성경도 자기들 마음대로 수정합니다. 그들은 말로는 자신들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주장할는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제자처럼 행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의 결과는 어떻겠습니까? 19절 상반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니까 그 사람들도 구원을 받을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는 일컬음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권위에 무릎을 꿇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19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이 엘리 제사장에게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합니다. "나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경멸히 여기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존중히 여기기에,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존중히 여겨주셔서, 천국에서 우리를 큰 자라고 일컬어주실 것입니다. 하루는 세 분의 목사님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각자가 섬기고 있는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교회의 이름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동의했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은 아브람에게는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고, 사래에게는 사라라는 새 이름을 주셨으며, 야곱에게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는 사실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라도 교회의 이름을 꼭 좀 바꾸어주시도록 간곡한 청을 올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청을 들으시고 사도 베드로를 그들에게 보내시며 진상을 알아보라고 명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세 분의 목사님들을 만나서 면담을 한 후에, 우선 목사님들이 주일날 설교한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를 세 개씩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다 듣고 난 후에 교회 이름에 대한 결정을 내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세 목사님들이 제출한 설교테이프를 다 듣고 난 뒤에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들의 설교는 그만하면 이상이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따라서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이유는 설교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에게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교인들이 설교를 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첫 번째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설교를 들을 때 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남자들이 많이 좁니다." 베드로는 그 말을 듣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그 교회의 이름을 조는 교회라고 지읍시다." 두 번째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예배시간에 다른 데 신경을 쓰는 경향이 많습니다. 설교 시간에 괜히 쓸데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도 있고, 주보를 이리저리 뒤적거리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쪽지를 적어서 옆 사람에게 건네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을 듣더니 기가 막힌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설교 시간에 완전히 딴전을 피우고 있구먼요. 그렇다면 그 교회 이름을 딴전 교회라고 부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 번째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님, 우리 교인들은 졸지도 않고, 딴전을 피우지도 않고 다 좋은데, 아멘이 너무 없어서 좀 냉냉한 분위기입니다." 베드로는 그 교회 이름을 아멘이 없다는 뜻으로 노멘 교회라고 지어주었습니다. 세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는 즉시 그 이름들이 바뀌었습니다. 교인들은 부끄럽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사도 베드로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기에 불평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신앙 상태를 회개하면서, 하루 속히 자신들의 오명을 벗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 태도를 바르게 한 결과 얼마가지 않아서 조는 교회는 말씀을 잘 듣는 교회로 주변에 알려지게 되었고, 딴전 교회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교회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또 노멘 교회는 아멘 교회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이름은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는 승동 교회입니다. 승리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승리를 하겠습니까? 우리의 의지로,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힘으로 승리하는 교회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는 교회입니다.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정말 너무나도 좋은 교회입니다. 이 좋은 교회에서 여러분이 사는 날 동안 끝까지 신앙 생활을 잘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죽도록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주님 앞에 서시는 그날 주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다 받으시고 하나님께로부터 큰 자라 일컬음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
'추천 설교 > 박상훈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우리는 화목합니다! (마태복음 5:21~26) (0) | 2015.04.16 |
---|---|
[스크랩] 우리에게 있는 더 나은 의! (마태복음 5:20~20) (0) | 2015.04.16 |
[스크랩] 우리는 소중합니다! (마태복음 5:13~16) (0) | 2015.04.16 |
[스크랩] 우리는 행복합니다(3) (마태복음 5:9~12) (0) | 2015.04.16 |
[스크랩] 우리는 행복합니다(2) (마태복음 5:6~8) (0) | 2015.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