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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남준목사

[스크랩] 9. 웃기는 심포지움

9. 웃기는 심포지움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요2:16)


  주일은 거룩한 날이니

  서울에 있는 아주 보수적인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주일을 엄격하게 지키기를 원하는 교회의 성수주일파 중직자들과 이러한 생각에 쉽게 수긍하지 않고 주일을 자유롭게 보내려는 청년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당회에서 정식으로 청년들이 주일 예배 후 외식을 하거나 교회 가까운 찻집에서 차와 음료를 사 마시는 일이 성경적으로 올바른가에 대한 교회의 판단을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다급해진 교회는 여러 모로 의논한 끝에 심포지움을 열기로 하고 교회의 중직자들과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들과 청년 대표들이 함께 모여 토론을 벌였습니다. 열띤 공방과 토론 끝에 이렇게 결론이 났습니다.

 

“주일은 거룩한 날이니 뭘 사먹는 것이 옳지 않지만 굳이 외식을 해야 할 경우에는 교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라.” 교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비슷한 갈등을 흔히 경험합니다. 나이 드신 장로님들과 경건한 교회의 중직자들은 요즘 교인들이 주일을 보내는 것이 예전에 자신들과 같지 않다고 볼멘소리로 원망 어린 푸념하는 것을 봅니다. 또 한편 젊은이들은 이제 주일성수의 개념은 케케묵은 구시대 율법주의의 유물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이어야 한다는 견지에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본 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할 의무는 구약의 율법을 통해 수없이 강조되었습니다. 분명히 구약의 안식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백성들이 누리게 될 구속이 주는 신약의 안식을 바라보는 것이었고, 나아가서는 고통이 없는 하나님나라에서 누리게 될 완전한 안식을 바라본 예표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좀더 나아가야 합니다. 즉 두 날이 구속사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일과 안식일은 질적으로 같지 않습니다. 마치 옛 언약과 새 언약이 통일성은 있으나 새 언약이 옛 언약에 대하여 시기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다른 언약인 것처럼 안식일에 대한 주일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주일의 중심은 율법이나 제도나 인간의 편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신약의 성도들이 주일을 거룩한 날로 구별하여 지키는 것이 안식일 성수를 거역하는 자들에게 내리실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조상의 유전을 답습하며 지키기 위한 열성 때문일 수 없습니다. 주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일어난 가장 중요하고 커다란 사건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속 사건이 아닙니까? 주일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성도들이 그 은혜에 감격하여 기쁨으로 예배하는 날입니다.

  

  의무에 매이지 않는 사람들

  오늘날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성도의 의무는 하나님의 자녀 그들에 의해 배교에 가까울 정도로 무시되고 있습니다. 성경이 자신들의 의무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편의대로 살겠다는 식입니다. 이러한 현실 상황에서 누가 그들에게 주일에 생업에 종사하거나 일신상의 즐거움을 위하여 마음 빼앗기지 말고 교회에 나오도록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현실적으로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하여 목청을 돋우며 심포지움을 열고 떠들어도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대부분의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이야기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바로 교인들에게 주일을 지킬 의무만을 강조함으로써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의무감이 아니라 영적 유익을 실제로 경험하며 예배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주일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정하신 날에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너무 즐겁고 보람 있어서 그날에 다른 일, 더 가치 있는 일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거룩해지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 회복과 주일

  저는 지금도 확신합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이 교회의 부흥을 위한 프로그램을 찾아 헤매는 데 쏟는 정성과 노력을 오히려 하나님과 만남이 있는 예배가 되게 해달라고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는데 바친다면 주일이 훨씬 더 거룩해지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받은 바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설교의 갱신에 분투한다면 적어도 주일 낮에 모인 인파를 주일저녁 예배에 거의 다시 못 만나는 교회는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두 죽은 예배가 만들어 낸 죽은 주일입니다. 하나님을 뵈옵는 예배가 어떻게 손수건 없이 드려질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무덤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회칠한 무덤이라고 비난하셨을 때 비난의 표적이 된 것은 회칠한 깨끗한 문이 아니라, 번듯이 회칠을 한 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사람들이 가장 혐오하는 썩은 시체와 부패한 뼈다귀들이 들어 있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심으로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내면의 변화를 촉구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비난의 음성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로 하여금 그 심령 속에 넘치는 시체와 같은 죄악과 뼈다귀 같은 부패들을 자기 의로 말미암아 보지 못하는 영적인 무지를 깨우치고자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형식을 파괴하면 저절로 본질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회칠한 무덤의 문을 더러운 것으로 바꾸면 무덤 속의 뼈들이 살아나리라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이 엉뚱한 사람들입니다.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찾아야 합니다.

 

  어느 꼬마의 회심

  18세기 미 대륙의 영적 대각성과 부흥의 도구로 쓰임 받았던 조나단 에드원즈(Jonathan Edwards)가 목회하던 교회에서 있었던 놀라운 회심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더욱 실감나게 가르쳐줍니다. 그 마을에 다섯 살이 채 안 된 어린아이가 부모와 함께 에드워즈의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거룩한 각성의 기운이 감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교회에서 돌아온 어린이는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나 구원받았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엄마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그를 안심시켰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혼에 대한 이 어린아이의 진지한 염려를 진정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이 아이는 친구들과 같이 놀이하는 일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믿음과 영혼의 문제에 대한 염려 속에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고는 하루에 몇 차례씩 어디론지 사라지곤 했습니다. 어느 날 헛간에서 크게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이 어린아이의 기도소리가 들려왔습다. 그리고 아이는 엄마에게 와서 하나님이 자기를 만나 주신 것과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 것을 간증하였습니다. 이후로 아이에게서 뚜렷하게 달라진 것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골목에서 만나는 친구들에게 열심히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주일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거의 매일 물었습니다. “엄마, 몇 밤 자면 주일이야?” 엄마가 그에게 되물었습니다. “너 왜 그렇게 주일을 기다리니?” 아이는 또렷이 대답했습니다. “그날을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날이기 때문이에요.”

 

  죽은 예배 빛바랜 주일

  결국 하나님과 만남이 없는 형식적이고 차갑고 은혜 없는 메마른 예배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입니다. 예배를 통해 참회를 경험하지 못하니까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을 추구하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일주일을 살다가 오니까 거룩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교회 바깥에 있다기보다는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신약의 성도들과 종교개혁기에 어둠에서 깨어난 성도들이 누렸던 은혜생활로 돌아가고, 청교도들이 드렸던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주일은 다시금 즉시 거룩하게 준수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모든 날 가운데 그날을 가장 사모할 것이며 주일에 맛보는 영광스러운 특권을 누리기 위하여 다시금 교회로 모여들 것입니다. 교회는 다시 사람으로 가득 차고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충만해 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도 한때는

 우리는 이제 이 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소모적인 말싸움을 벌이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교회의 역사를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주일을 거룩하게 했던 역사를 살펴보면서, 우리 시대의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얼마나 가난하며,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형식에 안주하고 있으며, 삶에서 얼마나 배교에 가까운 무법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영적인 위기 가운데 형식화되고 세속적으로 편의주의화 되어 가는 빛바랜 주일과 부러진 십자가 신앙을 보면서 이런 식으로밖에 주일을 지킬 수 없게 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영적 상태를 직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일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맺음말

  마른 땅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슴 속에 거룩하고 참된 부흥을 주셔서 사람들이 더 이상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논쟁할 필요 없이, 그날이 얼마나 거룩한 날인지를 예배를 통해 체험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제 마음은 그러한 날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쁘고 영광스러운 날이 참된 부흥을 통해 오리라고 기대하며 삽니다. 마치 시인의 노래처럼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시 126:1-3)

거룩한 주일은 오직 불꽃처럼 드리는 예배로만 가능합니다.

김남준목사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 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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