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
설교자 : 마경훈목사
본문 - 사도행전 12장 25절 - 13장 3절(개역개정)
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13: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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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안디옥 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시라아에 위치해 있는 교회로서 이곳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안수하여 파송한 교회로서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로 공식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여러 면에서 모델이 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도 ‘안디옥 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교회들이 좀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모델로 삼고 있는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입니다. 제가 만들고 싶어 하는 교회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 5만개가 넘는 교회가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5만개가 넘는 교회들 중에 단 하나도 같은 교회가 없습니다.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고 모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는 교회이지만 이상하리만큼 같은 교회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마다 색깔이 각각 다른 이유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가 되느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느냐로 결정되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교회 구성원들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모델이 되는 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가 모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교회 구성원들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이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입니다. 우리는 안디옥 교회를 보면서 우리 비전교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을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방향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어떠함은 교회 구성원들이 어떠하느냐로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 비전교회의 구성원인 저와 여러분이 안디옥교회 구성원과 같은 신앙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교회 역시 안디옥교회와 같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럼 안디옥 교회는 어떤 교회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나누는 교회(12:25)
12:25에 보면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왔다고 말씀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행 11장에 보면 선지자 아가보가 성령으로 “천하가 흉년 들리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천하가 흉년들었습니다. 그 흉년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힘대로 헌금을 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보냈습니다. 이 때 헌금을 전달한 사람이 바나바와 사울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이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전달하고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은혜를 아는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안디옥교회의 모태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없었다면 안디옥교회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 없이 자식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모태인 예루살렘교회가 없이 안디옥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자신들을 있게 한 예루살렘교회의 은혜를 잊지 않고 예루살렘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헌금을 해서 도왔던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보다 물질적인 면에서 풍부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한 예루살렘교회에 물질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물질을 나누는데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자립교회들은 개척교회들과 물질적인 나눔에 힘을 써야 하고 특히 대형교회들이 과감하게 물질을 나눠야 합니다. 교회가 몇 십억, 몇 백억씩 쌓아놓고 있는 것은 죄입니다.
제가 10여 년 전에 알고 지냈던 분 중에 정 집사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건축업을 하시는 분인데 큰 사업가입니다. 이분이 송파구에 있는 대형교회를 섬겼습니다. 이 분이 건축업을 크게 하니 교회에서 기도원 건축을 맡겼습니다. 기존에 있던 기도원의 시설을 늘리는 일이었습니다. 정 집사님이 기도원을 건축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저에게 토로 했습니다. 그 교회의 기도원은 그 당시에도 시설이 아주 좋았습니다. 정 집사님은 지금 있는 기도원도 좋은데 굳이 또 건축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 교회는 한 해에 남는 돈만 20~30억입니다. 그런데 정 집사님이 볼 때 그 돈을 시설에만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집사님은 자신의 돈 몇 억을 써가면서 헌신했습니다.
교회가 개교회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내 교회가 중요하지만 다른 교회도 주님 안에서 하나 된 교회입니다.
꼭 물질만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이 있다면 물질을 나누고 또 남다른 재능이 있다면 그 재능을 나누면 됩니다.
이번 화요일부터 우리는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 회복을 위한 기도여행을 떠납니다. 저는 이 기도여행을 두 가지 차원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순종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교회에 주신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나눔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을 구별된 선민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이 회복은 주님의 재림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은 종말의 시간표에서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중보기도의 영성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번 기도여행은 33명이 함께 갑니다. 우리 교인이 18명이고 외부에서 가시는 분들이 15명입니다. 목사와 사모 그리고 선교사가 13명이고 평신도가 20명입니다. 우리는 10박 11일 동안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곳에 남아 있는 여러분들도 기도로 동참해주십시오. 평상시 새벽기도를 하셨던 분들은 그대로 기도해주시고, 평상시 새벽기도를 하지 않으셨던 분들 중에서 노력하면 가능하신 분들은 새벽에 기도로 동참해주시길 바랍니다. 낮에나 밤에나 언제든지 교회에 오셔서 기도해주십시오. 기도도 나눔입니다.
2. 조화로운 교회(13:1)
안디옥교회는 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였습니다. 1절에 보면 5명의 지도자의 이름이 나오는데 지도자들만 보아도 다양한 공동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디옥교회의 5명의 지도자를 살펴봅시다.
먼저 바나바가 나옵니다. 바나바는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이었고 부자였습니다. 그는 교회에 땅을 헌금할 정도로 헌신된 사람이었습니다.
다음,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 나옵니다. 여기서 니게르라는 말은 니그로를 말합니다. 그는 흑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시므온은 북아프리카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낮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다음, 구레네 사람 루기오가 나옵니다. 그는 바울의 친척으로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 헤롯의 젖동생 마나임이 있었습니다. 그는 귀족으로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사울입니다. 알다시피 사울은 탁월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엘리트 출신이었습니다.
이렇게 안디옥교회는 여러 인종과 여러 계층이 모인 그런 교회였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계층이 모이면 반드시 문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사람의 모습을 살펴보면 참 신기합니다. 이목구비의 위치는 다 같습니다. 누구든지 눈은 이마 아래 코 위에 있습니다. 눈이 이마나 볼에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목구비의 개수도 다 같습니다. 눈은 2개고 코는 하나 콧구멍은 2개, 입은 하나, 귀는 2개입니다. 눈이 하나인 사람이 없고 입이 2개인 사람이 없습니다. 입이 2개면 하나로는 밥을 먹으면서 나머지 하나로 말할 텐데요. 모두가 입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똑같이 생긴 사람이 없습니다. 다 다릅니다. 저와 제 아내는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만 솔직히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목구비가 다 다르게 생겼습니다. 사람의 외모가 각기 다른 것처럼 사람은 배경이나 성격 등 모든 부분에서 다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인 것입니다. 같은 것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긴다는 것뿐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지만 조화로운 교회가 되는 비결이 있습니다. 자신을 공동체에 녹이는 것과 타인의 다른 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용광로 모델과 무지개 모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용광로 안에 다양한 모양의 철들이 들어가지만 용광로에 들어간 철들은 자기 모양을 고집하지 않고 다 녹아서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모양으로 재탄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용광로에 들어간 철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도 내려놓고 내 주장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무지개는 일곱 빛깔입니다. 그런데 일곱 빛깔이 각각의 색깔을 가지고 있지만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지저분하지 않습니다. 조화롭게 빛을 발합니다.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의 빛깔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조화롭고 아름답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판단하고 정죄하면 안 됩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자기의 빛을 내도록 해주면 무지개처럼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하나 되려면 모두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울은 성경 갈 3:28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했습니다. 몸의 모든 지체가 머리와 연결이 되고 머리가 생각하는 대로 협조하고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뜻을 받아드리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면 안디옥교회처럼 하나 된 교회, 조화로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 됨을 추구하되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다음 세대 사역을 하시는 목사님 한 분은 교인들과 하나 되기 위해서 남자 교인들과 고스톱을 쳤다고 합니다. 고스톱이 그렇게 재미있다면서요. 저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데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고스톱도 못 치면서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요. 그 목사님이 교인들하고 고스톱을 하니까 서로 친해지는 것 같았는데 결국은 시험이 들어서 사람들이 흩어졌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돈을 잃을 때는 괜찮았는데 목사님이 고스톱에 익숙해지고 실력이 늘어서 돈을 따기 시작하니 교인들의 얼굴색이 변하고 결국은 파토가 나고 말았다고 합니다.
우리 비전교회는 하나 됨을 위하여 인간적인 방법을 추구하지는 맙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용광로에 들어간 철처럼 나를 죽입시다. 그리고 무지개의 빛깔처럼 다른 사람의 은사나 달란트 인격과 의견을 인정해줍시다. 그래서 조화로운 교회 하나 된 고회를 만듭시다.
3. 주를 섬기는 교회(13:2)
2절에 보면 “주를 섬겨 금식 할 때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안디옥 교회는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금식하며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금식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다 보니 남들은 일생에 한 번도 못해보는 40일 금식을 두 번이나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금식을 잘하는 체질이라 40일 금식을 두 번이나 한 것이 아닙니다. 금식을 하기 전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첫 번째 40일 금식을 할 때는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가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주를 섬겼는데 너도 나를 금식하며 섬길 수 없느냐?‘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두 번째 금식 할 때는 ”행 13장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가 주를 섬겨 금식했는데 너도 나를 섬겨 금식할 수 없느나?“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에 순종해서 40일 금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예배입니다. 제가 가진 영어 성경을 보니 섬긴다는 말이 예배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교회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예배생활입니다. 다른 일을 잘해도 예배를 소홀히 한다면 교회생활을 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공식예배가 주일 낮, 오후, 수요일, 금요일에 있습니다. 1주일에 4번입니다. 1주일에 4번은 결코 많은 횟수가 아닙니다. 1주일에 4번 해봤자 시간상으로는 5-6시간입니다. 6시간으로 잡으면 1주일 168시간 중에 28분의 1 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마 TV 시청하는 시간보다 적은 시간일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세상의 것들이 계속해서 들어와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데 일주일에 주님께 예배를 위해서 6시간을 드리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사실 그리스도인이 주님과 동행해야 하지만 솔직히 예배시간 말고 얼마나 주님과 동행을 하고 있습니까? 예배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이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예배자가 많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배자가 되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섬기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눅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오셨으니 마르다는 주님을 잘 대접하려고 했습니다. 마르다가 음식을 준비하느라고 바쁜데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앞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바쁜 마르다가 주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습니다. 이 말씀은 일하는 것은 좋지 않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좋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둘 다 좋은 일인데 예배를 드리는 것이 더 좋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교회의 엔진입니다. 엔진이 힘이 좋은 자동차가 잘 달립니다. 다른 부속이 좋아도 엔진이 멈춰있으면 자동차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예배가 살아있는 성도가 건강한 성도입니다.
우선순위를 예배에 두십시오. 섬김에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시간의 희생, 몸의 희생이 있어야 주님이 기뻐하시는 섬김이 됩니다. 십일조 드리고 주정헌금을 드린다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시간의 헌신, 몸의 헌신을 하십시오.
한 남자가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던 여인에게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말하기를 앞으로 10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자기 집 창 밑에서 꽃을 들고 밤을 새우신다면 사랑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여인은 다음 날부터 매일 밤, 꽃을 들고 자기 집 창을 지키는 남성을 보게 됩니다. 엄청난 비바람과 번개, 폭풍이 치던 99일째 밤 마침내 감동 먹은 이 여인은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문을 열고 창 앞으로 달려가 비에 흠뻑 젖은 남자를 끌어안습니다. “오, 자기” 그런데 이때 남자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저는 알바(이트)생인데요.” 돈 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몸으로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안디옥교회는 주님을 섬겨 금식했습니다. 금식도 하나님을 섬기는 좋은 방법입니다. 금식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사58:6). 이사야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 가지 종류의 금식이 있습니다. ① 부분적인 금식이 있습니다. 아침만 하든지 점심만 하든지 부분적으로 금식하는 방법도 있고, 일정한 어떤 음식만 피하는 금식도 있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진미를 거절하고 채식만 했습니다. 저는 요즘 1주일에 한끼 금식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재직회에서 교회부채문제를 위해서 금식하고 헌금하기로 했기 때문에 매주 지키고 있습니다. ② 단식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금식들은 대부분 음식뿐만 아니라 물도 마시지 않는 금식입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 7일에서 길게는 10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단식은 단기금식은 가능하지만 장기금식은 위험합니다. ③ 물만 마시고 음식을 취하지 않는 금식입니다. 미리 날짜를 정하고 그 기간 동안에 물만 마시는 것입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외국에서는 오렌지 주스만 마시면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장기금식을 하는 사람들은 물과 함께 소량의 소금을 먹습니다.
언제 금식합니까? 국가적인 재난을 당했을 때, 전쟁이나 전쟁의 위협이 있을 때에, 개인적으로 회개할 때, 국가적인 회개를 해야 할 때, 교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또는 선교사를 파송 하는 것처럼 교회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 금식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개인적인 문제가 있을 때,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사순절 등입니다.
금식할 때에는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마6:17). 금식은 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보이는 것이지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금식이 잘 못된 것이 이 부분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금식을 했습니다. 이런 금식은 주님이 받으시지 않습니다.
가족이나 기도 동지에게는 알리는 것이 좋습니다. 금식하는 것을 가족이 모르면 음식으로 인한 유혹이 많습니다. 가족이 금식하는 것을 알게 되면 금식을 잘 할 수 있는 환경으로 협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오해가 없습니다. 가까운 기도 친구들이 알면 중보기도로 도울 수 있습니다.
금식의 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 사 58:6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의 능력이 4가지가 나옵니다. ① 흉악의 결박을 풀어 줍니다. ② 멍에의 줄을 끌러 줍니다. ③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합니다. ④ 모든 멍에를 꺾습니다.
금식기도의 능력이 나오는 성경의 내용을 정리를 하면 이렇습니다. 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하기로 작정하셨으나 그들이 금식하며 회개하니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니느웨에 기회를 주셨습니다. ② 위기에서 구원을 얻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만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에스더와 유대인들의 금식기도에 응답하셔서 오히려 하만을 죽이셨고 유대인들은 구원해 주셨습니다. ③ 질병의 치료가 급속히 나타납니다. 금식하면 두 가지 측면에서 치유가 나타납니다.
첫째, 자연적인 치유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미국의 정치가이자 과학자, 저술가인 벤자민 프랭클린은 “모든 약 중 가장 좋은 것은 휴식과 금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몸이 병든 사람들은 금식이라는 약을 한번 써보시기 바랍니다.
서양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누구나 자신의 내부에 훌륭한 의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의사는 ‘자연 치유력’입니다. 이것은 질병을 이기는 가장 큰 힘입니다. 우리가 아플 때 먹는다는 것은 질병을 키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금식하면 자연치유가 일어납니다. 시골에서 키우는 돼지나 소 같은 짐승들은 아프면 약국이나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짐승들은 아프면 굶습니다. 며칠 굶고 나면 금방 다시 일어납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많이 먹어서 각종 성인병에 시달립니다.
프랭크 맥크라는 의사는 「건강에 대한 금식법」이란 책에서 “나는 오늘날 외과 수술법과 심리적 치료법을 그 누구보다 더 많이 연구한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발견한 치료법 가운데 금식요법보다 더 효과적인 치료법을 본 적이 없다. 나를 찾아온 많은 환자들에게 나는 금식요법을 권함으로 많은 사람이 건강을 회복했다.”라고 말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가 일어납니다. 사 58:8에 보면 “그리하면...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라기의 말씀대로 금식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유하는 광선을 발하여 병든 영과 혼과 몸과 환경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④ 금식의 능력 중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영적 싸움에 승리합니다.
마 17장에 보면 주님께서 간질 하는 아이를 치료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우리 성경에는 21절이 없다고 나오는데 난하주를 보면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귀신이 역사해서 간질 했던 아이를 고친 비결은 기도와 금식이라는 말입니다. 금식기도를 하면 주님께서 급하고 강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에 악한 영들이 도망가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좋은 전통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새벽기도, 부르짖는 기도, 금식기도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 전통을 잘 이어나가서 영적으로 강건해지기를 소망합니다. 감동이 있다면 금식하십시오.
4.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 교회(13:2,3)
2,3절을 보면 금식하던 안디옥 교회가 성령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안디옥 교회는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담임목사와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과 인격이 훌륭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성향으로 볼 때 그는 교인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목회자였을 것입니다. 사울은 타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기 사울이 우리가 아는 바울 사도입니다. 영성과 지성에 탁월했고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던 사람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보배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그 두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 두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은 안디옥교회로서는 보물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그들에게 안수하여 선교사로 내보냅니다.
여러분! 부평초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파도에 흔들리는 분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소신 없는 것보다 소신 있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소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아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소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떤 청년이 목사님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 목사님이 “핵무기?”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에이즈”, “아닙니다.”, “그럼, 뭔데?” 그 청년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소신 있게 사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소신 있게 살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됩니까? 괴롭힘을 당합니다. 푼수 같은 사람이 소신 있게 살면 어떻게 됩니까? 민폐를 끼치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열심만을 앞세운 채 나아가면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습니다.
사울이 주님 만나기 전에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정말 소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열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열심은 잘못된 열심이었습니다.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데, 일등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신자들을 다 잡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아, 다메섹이라는 곳까지 원정을 가서 신자들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결국 사울의 이러한 소신 있는 행동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을 십자가의 원수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성도는 소신껏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소신은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야 합니다. 성도는 소신껏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소신대로 움직이는 교회는 문제 있는 교회입니다. 날마다 소신과 소신이 부딪히기 때문에 바람 잘 날 없습니다. 시끄럽습니다.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기 소신이 분명해도 말씀이 아니라고 하고 성령님께서 아니라고 하면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하기 싫은 일도 성경이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어야 하고 성령님께서 하라고 하면 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내 생각하고 다르다고 내 소리를 높이면 안 됩니다.
안디옥 교회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모두 순복했습니다. 자신의 소신을 내세우지 않고 성령의 음성에 모두 순복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가 세계선교의 전초기지로 귀하게 사용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의 뜻과 눈을 맞추는 것입니다. 작자미상의 글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심으로/ 나를 더욱 더/ 주님의 형상과 닮게 하시기 위해/ 나의 모난 부분을 깎으실 때/ 하나님은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시지만/ 나는 그것을/ 고난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심으로/ 나를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 낮은 마음과/ 넓은 마음을 갖게 하시려고/ 좁은 길로 인도하시는 것/ 하나님은 그것을/ 은혜라 부르시지만/ 나는 그것을/ 연단이라 부릅니다.
사탄이/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질투하여/ 나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기 위하여/ 나에게 물질의 부함과/ 세상의 즐거움을 풍족히/ 불어 넣어줬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시험이라 부르시지만/ 나는 그것을/ 축복이라 부릅니다.
세상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바라보기에/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오해하고/ 잘못 받아들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뜻하심을/ 깨달을 수 있도록/ 나의 아둔하고 어두운 눈을 밝혀주옵소서./ 간혹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마음이 무너질 때도 있겠지만/ 그분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어야할 대상이기에/ 늘 하나님과의/ 시선 맞추기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으로 돌아가야 하고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교회의 모델인 안디옥 교회를 살펴봤습니다. 첫째, 나누는 교회요. 둘째, 조화로운 교회입니다. 셋째, 주를 섬기는 교회요. 넷째,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 교회였습니다. 이런 교회와 이런 교회 구성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비전교회] 경기도 하남시 감이동 361-4
(02) 443-9197
비전교회 : http://www.visionchur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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