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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 백성을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설교자 : 마경훈목사

본문 - 이사야 40장(개역개정)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12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13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16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17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18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19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 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21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22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 같이 치셨고
23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24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
25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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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위로가 필요한 이유는 그들의 역사가 고난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늘 외세의 침입을 받았고 강대국들에게 눌려서 압제를 당했고,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서 36년간 고통을 당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역사도 아픔이 많은 역사라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나라의 역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30년간 지냈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지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특히 요셉이 죽은 후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역을 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들을 낳으면 죽이는 법까지 만들 정도였으니 그들의 고난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사사시대 400년 동안 주변의 족속들에게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고 압제를 당했습니다. 후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고 백성들은 앗수르에 잡혀가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고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주후 70년에는 로마에 멸망을 당했고 약 1900년 동안 나라 없이 방황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박해 받는 민족이었습니다. 중세 이후 유럽에서는 ‘게토’라고해서 유럽 각 지역에서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한 유대인 거주 지역을 만들었습니다. 1280년 모로코에서 회교도들이 유대인을 분리된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게토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게토는 보통 벽이 둘러지고 그 바깥 지역으로는 통행이 금지되었습니다. 외출할 때는 특정한 모자 또는 두건을 쓰고 윗저고리에는 황색의 표지를 하였습니다.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로 60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학살되는 비극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나 미움을 받았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런 아픔을 가진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이번에 이스라엘에서 저녁에 강의를 해주셨던 메튜 윌슨 목사님의 사모님이 유대인입니다. 그 사모님이 예수님을 믿게 된 이유는 우리가 생각할 때는 너무나 이상하게 들립니다. 미장원에 갔는데 멕시코인인 미용사가 이분이 유대인인 것을 알고는 “나는 유대인인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유대인은 어디를 가든지 미움을 받는데 사랑한다고 하니 이상해서 “당신이 왜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데 내가 믿는 예수님이 유대인이셨기 때문에 나는 유대인을 사랑합니다”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이 사모님이 사랑한다는 그 말에 마음이 열려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상처 많은 유대인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많은 아픔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1절입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이 당시에는 북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고 남유다도 꺼져가는 심지처럼 국운이 점점 쇠해지고 있던 시기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서 기록된 이사야서는 1-39장까지는 기울어져가는 국운에 대해서 다룹니다. 특히 뒷부분에서는 결국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할 것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유대의 역사가 이렇게 어둡게 된 이유는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사 1:2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식을 양육한 것처럼 양육하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3절에 보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짐승보다 못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은 범죄 하였고, 허물 가득하였고, 행위가 부패했고,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을 등한히 하고 소홀히 여겼습니다. 5,6절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께 매를 맞아서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질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게 되고 포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39장에서 유다의 멸망에 대해서 예언을 마치고 40-66장까지는 그들의 회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40:1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설교는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이 무엇으로 위로를 받아야 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날 회복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주시는 말씀이며, 동시에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고통 많은 이 세상에서 무엇으로 위로를 받아야 하는가를 배우고 그리고 위로를 받기를 바랍니다.
1. 미래를 현재처럼 보는 눈을 가져야 위로가 됩니다(2절).
   과거로 위로 받으면 안 됩니다. 현재로도 위로를 받으면 안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미래를 현재처럼 바라보며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역사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내용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가는 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100, 150, 700년 후에 일어날 일을 보게 하시고 그 본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언을 할 때는 유다가 주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망할 것인데 그 일이 일어나기 전입니다. 주전 538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서 유대인들이 해방되고 고토로 돌아오게 될 것인데 그 일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바벨론에서의 포로 귀환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 보니 노역이 끝났고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노역이란 말은 ‘노예나 전쟁 포로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을 말합니다. 온갖 힘든 일을 강제로 해야 하는 것이 노역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난다는 말입니다.
   남의 나라에 끌려가서 노역을 한다면 얼마나 몸과 마음이 힘이 들겠습니까? 그런 상황이 되면 얼마나 자유의 날을 기다리겠습니까?
   군대에서 말년 고참은 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짓을 합니다. 그 중에 하나는 후임 중에 한 명을 정해 자신의 전역 날짜를 항상 계산하게 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물으면 제대가 며칠 남았는지 말하게 합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며칠 남았냐?’물으면, 그 후임은 ‘네 앞으로 30일 남으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대답합니다. 얼마나 제대 날짜가 기다려지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군대에서 전역을 기다리는 것도 그런데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서 노역을 하고 있다면 해방을 얼마나 기다리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워도 앞으로 있을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현재처럼 볼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미래를 현재처럼 바라보고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시간을 모두 현재로 설명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세 가지 현재만 있을 따름이다. 과거의 현재와 현재의 현재와 미래의 현재이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라는 형태로 존재하며, 현재의 현재는 통찰하는 것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감으로 존재한다.”
   사람을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과거의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의 현재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과거에 상처를 현재의 아픔으로 그대로 품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에 매여 현재를 망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재의 현재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인내하는 것을 모릅니다. 장차 어떻게 되는 것보다 현재가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그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합니다.
   미래의 현재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미래의 현재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 어려워도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삽니다. 지금 십자가를 지고 있어도 장차 부활할 것을 바라보며 삽니다. 지금 사는 세상이 힘들고 어려워도 장차 도래할 천국을 바라보며 삽니다. 미래의 현재로 사는 사람은 지금 힘들어도 소망이 넘칩니다.
   히 11:8-10을 보면 아브라함은 미래의 현재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과거에 자신이 머물었던 고향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재 머물고 있는 가나안 땅에도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래에 자신이 들어갈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 살았습니다. 히 11:10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그는 가나안에 있었지만 가나안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영원한 도성인 천국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위로는 과거에 있었던 영광이 아닙니다. 현재에 누리는 영광도 아닙니다. 장차 들어갈 영광, 영원한 천국이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2. 주님의 오심을 확신해야 위로가 됩니다(3-5절).
   3-5절은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 예언입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이 오시기 전에 미리 주님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약 700년 전에 세례요한의 사역과 주님의 오심에 대해서 예언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며 위로를 받아야 했습니다.
   주님의 오심은 3가지 차원에서 믿어야 합니다. 초림과 임재와 재림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유대인들은 초림의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초림의 주님을 기다려 위로를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주님의 임재, 나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합니다. 임재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위로가 되고 재림을 기다릴 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려도 주님의 임재를 모른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가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만할지 몰라도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어느 시골 교회에 수줍음 많기로 소문이 난 김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구역 식구들과 함께 양로원봉사활동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수줍음이 많은 김집사님이 대표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떨리는 가슴으로 앞으로 나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사랑의 주님, 감사...” 기도는 너무나도 간절했고 은혜가 넘쳤습니다. 그런데 너무 긴장해서였을까요.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을 때 김집사님은 그만 예수님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김집사님은 얼굴이 빨개져 서 있고, 모두들 “주여, 주여”만 하고 있을 때 김집사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때 물 위를 걸으신 그 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가 기도의 말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을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할 때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을 집어넣는 이유는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하기 때문에 관행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가치 있는 것은 주님의 공로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가 가치 없는 것처럼 우리 개개인도 주님이 계시지 않다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의 저자 윈형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중국에서 사도바울과 같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단지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서른 번 이상 감옥에 들어가서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한번은 감옥에서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74일을 금식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지속적으로 전기고문을 당하고 뼈가 부스러질 정도로 매를 맞았습니다. 사람이 74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피부가 뼈에 들러붙어 미라같이 되는데 그렇게 금식을 해도 안 죽었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니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윈 형제는 출옥하면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잡히면 감옥에 갇혔다가 다시 나가면 복음을 전하는 삶을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적적으로 중국 공안의 감시를 벗어나 독일로 탈출해서 독일 시민권을 얻어 가지고서 지금은 전 세계로 다니면서 ‘백투 예루살렘’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당했던 고난을 알게 되면 “감옥에 계시면서 끔찍한 세월을 보내셨군요.”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윈 형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의 친밀한 임재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누렸습니다.”라고 답한다고 합니다. 주님이 윈형제에게 임재 하셔서 함께 하시니 윈형제는 극한 고난 중에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임재가 그에게는 위로였습니다.
   초림의 주님을 믿는 우리는 임재하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믿고 위로를 받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구약에 주님의 초림의 예언이 450여 절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구약에 주님의 재림은 2,163절이나 예언되어 있습니다.
   살전 4:18을 보면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말씀합니다. 거기서 말하는 ‘이러한 말’이 무슨 말입니까? 살전 4:18 앞부분을 보면 주님의 재림과 믿는 자의 휴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위로는 주님의 재림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우리의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이 기다려집니다. 믿음으로 살지 못한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을 믿어도 아직은 아닙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미국의 패턴 목사님이 어느 날 환상을 보았습니다. 주님이 나타나시더니 물으셨습니다. “네 교회에서 목회를 몇 년 했느냐?”, “20년입니다”, “성경에 재림한다는 예언이 2,163절이나 되는 데 너는 몇 번이나 재림설교를 하였느냐?” 패턴 목사님이 생각해 보니 단 한 번도 재림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끄러워하며 “한 번도 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주님이 슬픈 빛을 하고 사라지셨습니다. 그 후부터 패턴 목사님은 재림설교에 치중했습니다. 그랬더니 교인들이 지겹다고 그만 하라고 불평이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우리는 올라가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주일 저녁 패턴 목사님은 집사 한 분에게 나팔을 들고 천정에 숨어 있다가 “지금 주님이 오십니다”라고 외치면 나팔을 불어 대라고 말했습니다. 저녁 설교를 하던 목사님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님이 내년에 오실까요? 이번 달에 오실까요? 지금오실까요? 주님이 지금 오십니다!” 이 때 천정 속에 숨어 있던 집사님이 나팔을 불어 댔습니다. 성도들은 놀라서 모두 의자 밑으로 숨었습니다. 이 때 목사님은 나팔 불던 집사님을 내려오게 한 후에 성도들을 자리정돈을 시키고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왜 숨었습니까?” 성도들은 모두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초림의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재림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임재와 재림이 저와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위로가 됩니다(6-8절).
   6-8절을 보면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아름다움은 꽃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처럼 인간의 육체도 마르고 영광도 시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섭니다.
   이사야가 사역한 시기가 주전 740년경이었고, 세례요한의 사역 시기는 주후 26년으로 볼 때, 약 766년이라는 긴 시간 차이가 납니다. 그 오랜 기간이 흘렀지만 세례요한에 대한 말씀은 결국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충만한 사람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어도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즐거운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시 119:143을 보니 시인은 환난과 우환이 미쳤지만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즐겁다고 고백합니다. 환난과 우환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 중에 정말 감사한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우리의 중심을 잡아주고 우리를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저는 오뚝이 생각이 났습니다. 오뚝이 내부에 보면 아랫부분이 무겁게 만들어졌습니다. 그 무게 때문에 오뚝이를 넘어뜨려도 오뚝이는 다시 일어납니다. 좌우로 흔들어 봐도 다시 중심을 잡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여러분의 내면에 말씀을 채우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을 견고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체험은 잠간입니다. 말씀은 영원합니다. 보고 듣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거짓된 것도 많고 일시적인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채우십시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님 한 분이 원주민들과 함께 물살이 강력한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원주민이 큰 돌을 선교사 가슴에 안겨주었습니다. 자신들도 큰 돌을 머리에 이거나 가슴에 안고 강을 건넜습니다. 선교사님은 그 이유를 강 중간쯤 갔을 때 알았습니다. 중간쯤에 급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만약 무거운 돌이 없었다면 급류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돌의 무게 때문에 선교사님은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성경 말씀을 여러분의 가슴에 안으십시오. 말씀이 여러분을 살릴 것입니다. 말씀이 여러분을 세울 것입니다. 말씀이 여러분을 성장 시키고 여러분을 위로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을 보아야 위로가 됩니다(9절).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고전 1:3에서 하나님을 자비의 아버지시요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9절에 보면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시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위로자이십니다.
   좋은 글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오다가 우리 가족은 큰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 사고로 나는 두 개의 보조다리(목발) 없이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나보다는 덜했지만 아빠도 보조다리 없이는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사춘기를 보내며 죽고 싶을 정도의 열등감에 시달렸다. 내가 밥도 먹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을 때, 위안이 되어준 사람은 아빠였다. 아빠는 나와 똑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아픔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아빠의 사랑으로 나는 무사히 사춘기를 넘기고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 입학식 날, 아빠는 내가 자랑스럽다고 하시며 눈물을 글썽였다. 입학식을 끝내고 나올 때였다. 눈앞에 아주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도로 한 아이가 뛰어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 눈 앞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빠가 보조 다리도 없이 아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아빠가 그 아이를 안고 인도로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빠?” 나는 너무 놀라 소리쳤지만 아빠는 못 들은 척 보조다리를 양팔에 끼고는 서둘러 가버렸다. “엄마 ! 엄마도 봤지? 아빠 걷는 거!” 하지만 엄마의 얼굴은 담담해 보였다. “놀라지 말고 엄마 말 잘 들어.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되리라 생각했어. 아빠는 사실 보조다리가 필요 없는 정상인이야. 그때(그 사고 때) 아빠는 팔만 다치셨어. 그런데 사년동안 보조다리를 짚고 다니신 거야. 같은 아픔을 가져야만 아픈 너를 위로할 수 있다고 말야.” “왜 그랬어? 왜 아빠까지.”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울지마. 아빠는 너를 위로할 수 있는 자! 신의 모습을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셨는데 … 오늘은 그 어린것이 교통사고로 너처럼 될까봐서 … ”
   앞서 걸어가는 아빠를 보고 있는 나의 분홍색 파카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마음이 아픈 날이면 나는 늘 아빠 품에 안겨서 울었다. 그때 마다 소리 내어 운 것은 나였지만 눈물은 아빠 가슴 속으로 더 많이 흘러 내렸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시고 주신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봐야 할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목자와 같으신 하나님(10,11절)
   10,11절을 보십시오. 목자이신 하나님은 강한 자이십니다. 강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양떼인 우리를 먹이십니다.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십니다. 그리고 온순히 인도하십니다. 이리에게는 강하지만 양에게는 따뜻한 목자이십니다.
   양떼는 약합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을 지킵니다. 이리가 나타나면 목자는 이리와 싸웁니다. 심지어 사자가 나타나도 목자는 물러서지 않고 사자와 싸웁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강하신 목자이십니다. 그래서 목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2) 위대하신 하나님(12-26절)
   12절을 보면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리고, 뼘으로 하늘을 재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으며, 산과 언덕들을 저울로 달아볼 사람이 없으나 하나님은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13,14절을 보면 하나님은 지혜로워서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지도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15절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지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습니다. 26절에 보면 하늘의 별들을 군대처럼 세우시고 그것들의 이름을 다 아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계의 별이 1천억 개라고 합니다. 1천억 개가 얼마나 되는지 상상이 됩니까? 우리가 하나, 둘, 셋 이런 식으로 세면 3,170년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계와 비슷한 은하계가 또 1천억 개 정도 더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우주의 별들을 다 세시고 이름도 다 아시고 한마디로 헤쳐모여 하면 군대가 사열하는 것처럼 질서정연하게 설수 있게 하시는 분이랍니다. 이런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형편을 다 아시는 하나님(27절)
   27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자신들의 사정을 모르시고 자신들의 원통함을 풀어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못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출 6:5에 보니 하나님은 우리의 신음 소리를 듣고 언약을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시 139:2을 보니 하나님은 내가 앉고 일어섬도 아시고 심지어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힘든 것도 아시고, 내가 억울한 것도 아시고, 내가 참는 것도 아시고, 내 형편을 모르시는 것이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4) 앙망하는 자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28-31절)
   28절을 보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힘이 넘치시는 분이시며 피곤을 모르시는 분이시며 명철이 한이 없는 분이십니다. 29절을 보니 하나님은 피곤한 자와 무능한 자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 31절에 보니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어서 독수리가 날개 치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힘찬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앙망이라는 말은 믿고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로마에 가면 카타콤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이 420km라고 하는데 카타콤은 그 굴의 길이가 10배도 더 넘습니다. 수많은 굴이 있습니다. 그 곳에 박해 받던 크리스천들이 숨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의 핍박을 피해서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어떤 때는 거기서 아기를 낳았는데 햇빛을 못 보니까 그냥 죽었습니다. 죽으면 그 옆을 파고 묻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스럽게 햇빛을 보지 못하고 굴속에서 숨어살던 크리스천들이 벽에다 새긴 글씨 가운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육신적으로는 고통스러운 지하동굴 생활을 하면서도 그들이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앙망하여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몇 년 전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북한 응원단이 예천 양궁장 응원을 나갔다가 숙소로 돌아오다가 벌린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버스가 서더니 응원단이 일제히 뛰어내려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멈춘 곳은 김정일의 사진이 걸린 현수막 앞이었습니다. 마치 소중한 보화를 다루듯 그들은 현수막을 떼어내며 울었습니다. “김정일 장군님을 우리는 마음에 모시고 사는데 어떻게 허깨비(장승) 곁에 걸어둘 수 있느냐, 어떻게 비를 맞게 둘 수 있겠느냐”는 얘기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실소를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혔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종북 세력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 체제가 좋다고 떠들면서 우리 대통령을 보고 독재를 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여러분! 제가 그 이야기를 한 것은 그들을 비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북한 응원단이 김정일을 대하던 모습과 주님을 대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오버랩 시켜보자는 것입니다. 그들의 진짜 속내는 모르지만 김정일의 사진이 비 맞는다고 차에서 뛰어 내려 울먹이는 그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앙망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비교해 보자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주를 바라봅시다. 주를 앙망합시다. 주님을 믿고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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