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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난과 남은 고난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난과 남은 고난
설교자 : 마경훈목사

본문 - 골로새서 1장 24 - 27절(개역개정)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오늘은 기독교 절기상 종려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가서 주님을 맞이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에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치며 맞이했습니다. 종려주일은 바로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키는 주일입니다.
이번 한 주간은 고난 주간이라고 합니다. 고난 주간은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으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절제된 생활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 설교는 주님이 당하신 고난과 주님의 남은 고난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본문 24절에서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이 있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난(24절)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은 대속을 위한 고난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잘못하여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원할 사람들을 위하여 대신 고난을 당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이 대속의 고난이라는 것을 가장 잘 말씀하고 있는 성경구절이 사 53:4-6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말씀을 보면 주님은 우리의 질고, 우리의 슬픔,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 우리의 나음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 당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인류의 죄악을 해결하시기 위하여 완전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33년간 사시면서 온갖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주님의 고난을 4종류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왜 주님이 그런 고난을 당하셨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 환경의 고난
고후 8:9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부요하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계시던 곳은 하늘 보좌였습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 주인이시 때문에 하늘도 땅도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은 무엇이든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금도 은도 모두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부요하신 그분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주님은 태어나실 때 방을 얻을 수 없어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주님이 자라셨던 나사렛은 아주 가난한 동내였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토굴에서 살았습니다. 나사렛에 가면 마리아 기념교회가 있는데 기념교회 안에 보면 굴로 된 집이 남아있습니다. 주님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는 그 동내 사람들처럼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주님은 사역을 하시면서도 가난하게 지내셨습니다. 마 8:20에 보면 한 서기관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니 주님이 서기관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가난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부요하신 분이지만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능력이 없어서 가난하게 사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충분히 부요하게 사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한 번은 큰 무리가 주님을 따라 빈들에 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날이 저물게 되니 그들이 배가 고픈 것을 아시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 떼어주니 장정만 5천명이 먹고 12 광주리가 남게 하셨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친다면 아마 2만 명은 될 텐데 5병2어를 가지고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이것만 봐도 주님은 얼마든지 이 땅에서도 부요하게 사실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요하신 주님이 가난하게 되셔서 환경적인 고난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고후 8:9에서는 밝히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신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가난하게 되시므로 우리를 부요하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고후 8:9에서는 부요하신 주님이 가난하게 되신 것이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이 사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드리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의 부요함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나에게도 이 은혜가 적용된다고 고백하십시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가난으로부터 해방되시를 축원합니다.

2) 육체의 고난
주님은 육체적인 고난을 많이 당하셨습니다. 사 53:3에 보면 주님을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표준 새번역에서는 이 말씀을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연구하면서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니 놀라웠습니다. 질고라는 말의 히브리 단어는 ‘홀리’인데 ‘병’을 말합니다. 그리고 병을 알았다고 했는데 이 ‘알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야다’인데 이 ‘야다’라는 말은 경험으로 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질병을 머리로만 아셨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질병에 걸려서 질병을 체험해서 아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질병에 걸리셨다는 말이 저에게는 좀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질고를 아셨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건강의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 53:4에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라고 말씀을 하는데 이 말씀을 공동번역개정판에서는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질고를 지셨습니다. ‘지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사’라는 단어인데 뜻은 ‘들어올리다. 나르다. 가지고 가다. 취하여 가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가 앓아야 할 병을 가지고 가셔서 주님이 대신 앓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을 합시다. 내가 80kg가 되는 쌀 한 가마니를 등에 지고 고통스럽게 길을 가는데 우리 장로님이 그 쌀을 대신 짊어지시면 제가 당했던 고통은 누구에게로 갑니까? 장로님에게로 갑니다. 그 고통이 장로님에게로 가는 순간 저는 어떻게 됩니까? 저는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질병도 같은 이치입니다. 제가 질병으로 고통을 당해야 하는데 주님이 저를 대신해서 앓아주셨습니다. 주님은 질병 따위에게 고통당할 분이 아닌데 저를 대신해서 앓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질병에서 해방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사 53:5에 보면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재판을 받으시는 과정에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로시면서 군인들이 휘두르는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주님이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채찍질 당하셨습니까? 우리를 병에서 치료하시려고 채찍에 맞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나음을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시기 위해서 우리 대신 당신의 몸으로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건강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질병에서 해방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은혜를 받아드리십시오. 건강의 은혜도 받아드리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외치십시오. “내가 건강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3) 마음의 고난
주님은 마음의 아픔도 당하셨습니다. 사 53:3에 보면 주님은 간고를 많이 겪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간고는 히브리어로 ‘마크오브’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슬픔, 비통, 근심’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육체적인 고통을 말할 때도 사용되었지만 정신적인 고통을 말할 때 더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사 53:4에 보면 주님이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슬픔을 당해야 하는데 주님이 우리 대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물질적으로 풍성해졌지만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그지글러의 책에 보니 현대인들의 95%는 약간의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하더군요. 과거에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은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안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숨기기에 바빴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정신적인 병이 아주 흔한 병이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는 그런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주님은 마 11:28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슬픔이 있는 분들, 마음이 우울한 분들, 마음에 근심과 염려가 있는 분들,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민이 있는 분들은 주님에게 나오십시오. 그리고 마음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주님에게 맡기십시오. 맡기면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의 고통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슬픔도 대신 당하셨고, 우리의 고민도 대신 하셨으며, 우리의 염려도 대신 하셨습니다.

4) 죽음의 고난
주님이 당하신 고난 중에 가장 큰 고난은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운명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결국은 죽으시면서 다 이루신 것이 무엇입니까? 죄를 범한 인간이 받아야 할 죽음의 형벌을 대신 받으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소원을 이루어드린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막 10:45에서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분명한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인데 우리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에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실 때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10번째 재앙은 장자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 천사를 보내셔서 애굽 전역의 장자를 죽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이시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살길도 마련해 주셨습니다.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면 천사가 그 피를 보고 그 집을 넘어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정별로 양을 잡아서 피는 바르고 고기는 먹었습니다. 그 밤에 천사가 애굽 전역에서 장자를 죽였습니다. 천사는 양의 피가 묻어있는 집은 넘어갔고 양의 피가 묻어 있지 않은 집에는 들어가서 장자를 죽였습니다. 양이 죽지 않은 집은 장자가 죽었고 양이 대신 죽은 집은 양의 죽음 때문에 죽어야할 장자들이 죽지 않았습니다.
고전 5:7에 보면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난 주간의 금요일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유월절 양으로 희생 되신 것입니다. 죽어야 할 사람들을 대신해서 주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사 53:7,8에 보면 희생양이 되시는 주님의 죽음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의 허물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복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복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얼린 것입니다.
마 27:37,38를 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구약 시대의 성전을 보면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있었습니다. 휘장 안에는 법궤가 있고 법궤 뚜껑에는 두 천사가 날개를 펴고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그 법궤의 뚜껑을 속죄소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실 때는 그 속죄소 위에서 만나주셨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막혀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죽으시면서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 말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성경 히 4:16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때문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보좌는 우리에게 심판의 보좌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므로 하나님의 보좌는 우리들에게 은혜의 보좌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께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죽어지신 주님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환경의 고난, 육체의 고난, 마음의 고난, 죽음의 고난을 우리 대신 당하셨습니다.

2.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24절)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고난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겠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목적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적을 온전히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자신의 육체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겠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의 마땅한 삶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채울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몇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고난은 바울에게만 채울 고난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에도 채워야 할 고난입니다.
그럼 우리의 육체에 채워야 할 고난은 무엇입니까?

1) 교회를 위한 고난(24절)
2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되면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교회를 세우는데 헌신하십시오.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며,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십시오.

2) 직분으로 인한 고난(25절)
25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교회의 일군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교회를 세우는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직분에 충실하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운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직분은 폼이 아닙니다. 교회의 직분은 계급이 아닙니다. 직분은 명예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기 위하여 주어진 직분입니다. 집사, 권사, 안수집사, 장로, 목사 이런 직분은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주어진 직분입니다. 직분에 충실하십시오. 직분에 헌신하십시오. 직분에 걸맞게 수고 하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고난(25절)
25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육체에는 고난일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려면 버려야 할 것이 많습니다. 말씀대로 살려면 포기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말씀대로 살려면 내 육체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면 욕을 먹을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려면 내 주장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려면 희생이 필요합니다. 손해를 봐야 합니다.

4) 전도를 위한 고난(28절)
26-28을 보면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이 비밀을 성도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를 원하십니다. 28절에 보면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질문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계시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함을 믿으십니까? 아멘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셨습니까?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라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주신 것입니다.
전도하십시오. 복음을 전파하십시오. 하나님의 비밀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십시오. 이 전도와 선교의 수고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는 것입니다.

5) 사람을 세우기 위한 고난(28절)
28절에 보면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권면을 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목적이 나옵니다.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사람을 세우기 위한 사역이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사시며 그들을 세우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고,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성령님을 보내주셨고,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과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관심도 하나님의 뜻과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목숨이라도 걸고 살아야 합니다. 또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한 생명을 세우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전도를 해서 그 사람이 주님의 귀한 일군이 되기까지 사람을 세워본 사람은 사람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실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세우는 사람은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실족할까봐 언행심사를 조심합니다.
주님은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사람은 자기 목에 짐승이 돌리는 큰 연자맷돌을 매고 깊은 바다에 잠기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그 정도로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일은 큰 죄입니다.
여러분! 언행심사를 조심하셔서 사람을 실족시키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범사에 모범을 보이셔서 사람을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이 일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것입니다.

6)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는 고난(29절)
2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사람을 세우는 일을 위하여 자기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을 역사를 따라서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고백합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우리에게는 고난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아를 죽어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님께 순종하면 성령님은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며, 우리를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주님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환경의 고난, 육체의 고난, 마음의 고난, 죽음의 고난입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우리를 위한 고난입니다. 주님의 고난 때문에 우리는 부요의 복을 받았습니다. 건강의 복을 받았습니다. 마음에 평안의 복을 받았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회복 그리고 영혼을 세우는 일에 헌신하시길 바랍니다. 주를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비전교회] 경기도 하남시 감이동 3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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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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