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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4)광야 길에서(출13:17-22)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4)광야 길에서(출13:17-22)

 

해마다 새해가 되면 저는 제가 참 좋아하는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란 시를 떠올리게 됩니다. “노랗게 물든 숲 속 두 갈래 길이 있었네/한 여행자의 몸으로 두 길 다 가지 못하는 서운함으로/한 길이 굽어 꺽어 내려간 데서 나는/바라볼 수 있는 데 까지 오래 머물러 바라보았다네. --그리고 똑 같이 좋아 보이는 다른 길을 선택 했다네/그 길에는 풀이 더 우거지고 사람을 부르는 듯 하여/물론 그 길을 걸음으로 결국 길은 같아지겠지만.” 이 시의 마지막 단원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난 한숨지으며 말하게 되겠지/두 갈래 길이 숲 속에 나 있었다고/ 그때 난 사람들이 적게 여행하는 길을 선택했다고/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것은 달라졌다고.”


이 시는 무엇보다 인생이 여행길임을 보여 주고 있고 그 길은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을 교훈합니다. 그런데 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서 느끼는 특별한 감흥은 마지막 대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난 사람들이 적게 여행하는 길을 선택했고 그것으로 모든 것은 달라졌다”(I took the one less travel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는 대목 말입니다. 인생에서 우리는 때로 가깝고 쉽게 갈수 있는 길과 멀고 험한 길, 그 두 갈래 길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경우 우리에게는 가깝고 쉽게 갈수 있는 길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멀고 험한 길로 가야 하는 선택에 직면할 수가 있습니다. 고센 땅을 떠나 광야 길에 들어 선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그랬습니다. 당시 고센 땅 '라암셋을 떠나 숙곳에 도달'(17km-출12:37/지도 참조)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달하는 두 개의 대표적인 길 중에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한 길은 수에즈 운하 북단을 지나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팔레스타인 서남단의 도시 가사에 이르는 길(Via Maris, the way of the sea)입니다. 이 길은 쉽고 가깝게 갈수 있는 길로 장애물만 없으면 당시에도 한달내에 도달할 수 있는 길(지금은 자동차로 수 시간이면 가능-지도 참조)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유에선지 이 길이 아닌 멀고 험한 길인 홍해를 따라 남방 시나이 광야로 가는 길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 그렇게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그는 지금도 자주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그러면 왜 주께서는 때로 우리로 그 멀고 험한 광야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일까요?


1. 그 길이 인생을 완주할 최선의 길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아무리 가깝고 쉬운 길이라 할지라도 중간에 포기할 길이라면 그 길의 가까움과 쉬움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길은 우리를 목적지에 도달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라톤의 미덕은 완주에 있습니다. 그것이 직업 마라토너들의 대회가 아닌 평범한 생활인의 대회일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많은 마라톤 참가자들은 완주를 목표로 대회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완주가 곧 성공인 것입니다. 1등이냐 2등이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영화계의 새로운 화제가 되고 있는 <우생순-우리 인생 최고의 순간>은 바로 그런 감동이 아니겠습니까? 이 영화의 모델이었던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여성 핸드볼 팀이 1등을 했더라면 아마도 이 영화는 만들어지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 악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한 아쉬운 2등의 아름다움이 오히려 관객을 울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더 큰 감동은 그들이 비인기 종목 한국 여성 핸드볼의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아테네로 갔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이미 한물간 노장 아줌마들의 포기하지 않은 투혼과 열정-그것이 바로 작품성과 상관없이 국민들을 울린 감동의 의미였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 열악한 한국 핸드볼 상황에서의 선전은 사실 평소 생활공간에서 연마한 한국 아줌마들의 실력에 기인한다는 유머 글을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한국 핸드 볼 실력의 원천이 한국 아줌마들의 지하철 자리 잡기에서 훈련된 것이라고 주장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중계 방송식으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마지막 주자 한국 대표 박순자 아줌마입니다. 장소는 사람으로 꽉찬 공포의 개봉역. 과연 탑승 기술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열차 도착하고 있습니다. 문이 열리려고 합니다. 네, 아줌마 돌진하고 있습니다. 네 역시 기본기가 좋습니다. 핸드백을 앞으로 한 채 고개 숙이고 돌진중입니다. 마침내 뚫었습니다. 탑승 성공입니다. 이제 착석 기술이 문제입니다. 너무 경쟁자가 많군요. 아줌마 잠시 생각중입니다. 오, 예,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최고의 난이도를 가진 기술입니다. 7명이 앉아 있었는데 엉덩이부터 밀고 들어가서 착석에 성공! 이제 남은 것은 내리기 기술. 너무 많은 경쟁자가 서로 밀고 있습니다. 박순자 아줌마 드디어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납니다. 그리고 온몸 밀기의 탄력으로 밀어 붙입니다. 네, 다시 성공입니다. 내리지 않을 사람 12명과 함께 내립니다. 밀려 내린 사람 중 세 사람은 호흡 곤란 증세를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아줌마의 저력입니다.]


다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행진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왜 주께서 그들을 홍해 광야 길-더 멀고 험한 길로 인도하셨습니까? 가까운 길을 놔두고 말입니다. 17절이 대답합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니라” 그 지중해 연안의 길에는 바로 블레셋 족속들이 진치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그들과 전쟁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먼 길이지만 홍해 쪽 광야 길이 완주할 수 있는 길임을 주께서 아신 때문입니다. 다시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그러므로 인생의 힘든 길을 걸어야 할 때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께서 최선의 길을 준비하셨다고” “이 길이 완주의 길이고, 최선의 길이라”고 말입니다.


2. 그 길이 주님의 언약으로 예정된 길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아무리 어렵고 험해도 그 길이 확실하게 실현될 어떤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면 우리는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습니다. 약혼자들이 고난을 견디는 것은 결혼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군인들이 군대 생활의 고난을 견디는 것은 제대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땅이 아닌 가나안에 정착하리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바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약속을 기억하는 한 광야 길의 어떤 고난도 견디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어떤 약속도 쉽게 망각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한 시청각적 교훈을 그의 백성에게 상기시키는 방편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로 요셉의 해골을 보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마지막 애굽 땅에서 죽기 전 최후의 유언으로 자신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야하고 그때 자신의 유골을 가지고 가라는 말씀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1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가지고 여기서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이제 그 백성들은 광야의 행진을 계속하며 요셉의 유골을 보면서 그들이 존경하는 민족의 어른이 남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곧 우리 민족은 어떤 시련이 있어도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 내었을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이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변함없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요셉의 유골보다 더 확실하고 더 신뢰할만한 성경 말씀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구약과 신약의 말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의 광야 길을 가는 동안 이 언약의 책을 가까이 하는 것은 광야 행진을 성공적으로 지속하기 위한 필수적인 작업입니다. 이 언약의 책을 열 때마다 볼 때마다 주께서는 우리의 궁극적인 여행의 목적지가 하나님의 나라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의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우리가 걷는 인생의 길이 멀고 험하게 느껴져도 이 길은 주님의 언약을 실현하기 위해 예정된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그가 말씀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성도의 모든 길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기억한다면 세상의 광야에서 어떤 일로도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광야에 고난이 있어도 시련이 있어도 앞으로만 나아가면 우리의 걸음은 그때마다 그 나라에 가까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3. 그 길이 주님의 임재가 함께할 길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로 이 멀고 험한 광야 길로 가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명백한 이유의 하나는 이 길에 당신의 임재가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가는 길이 멀고 험한 광야 길이라 해도 정말이지 전능하신 주의 임재가 함께 한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자, 다시 본문 21-22절을 읽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광야는 낮에는 더운 곳입니다. 그러나 구름 기둥은 주의 백성들을 시원케 하는 그의 임재였던 것입니다. 광야는 밤에는 추운 곳입니다. 그러나 불기둥은 주의 백성들을 따뜻하게 하는 그의 임재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의 임재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더운 광야에서 지쳐 쓰러지던 어느 날 갑자기 내 영혼을 소생시키던 은혜가 있지 않았나요? 그것이 바로 당신의 인생의 마당에 임한 그분의 구름 기둥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추운 광야에서 외로움과 추위에 떨며 자신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 나를 붙들고 품에 안아 회복시키던 큰 사랑이 있지 않았나요? 그것이 바로 당신의 인생의 마당에 임한 그분의 불기둥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22절은 이 구름 기둥, 불기둥이 백성들을 떠나지 아니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백성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신 그분의 임재로 그의 백성들은 멀고 험한 광야 길을 갈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일하신 그분의 임재로 여러분과 저도 또한 인생의 광야 길을 완주할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다시 묻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그분의 함께 하시겠다는 임재의 약속을 믿으시겠습니까?


‘데이비드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 1813-73)이란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아프리카에 복음의 여명을 가져왔던 선교 개척자, 탐험가, 의사 말입니다. 그가 16년간 아프리카 선교사로 일하다가 그의 조국인 영국으로 일시 귀국했을 때 글라스고 대학은 그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며 그의 영웅적인 수고와 헌신을 위로하였습니다. 당시의 대학가의 학생들은 명예 학위를 받는 인사들에게 때로는 야유를 보내곤 했습니다만 리빙스톤이 교단에 서는 순간 장내는 깊은 침묵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의 병약한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이미 심한 열병과 풍토병으로 고생하며 그의 육체는 망가질대로 망가져 있었고 팔은 밀림에서 사자의 습격을 받아 찢어졌던 상처로 간신히 어깨에 매달린 형상이었습니다. 무려 30여회에 결쳐 그는 죽음을 모면하는 순간들을 겪어 온 그였습니다. 사회자는 그는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알리며 이제 그의 말씀을 듣겠다고 그를 소개했습니다.

 

그는 조용히 내가 영국을 떠날 때 그리고 저 아프리카의 밀림에서 일할 때 나를 한결같이 지켜 준 성경의 말씀이 있었다는 말로 스피치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마태28:20의 말씀이었습니다.-“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분의 임재가 함께 하는 한 그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다시 아프리카로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아프리카로 돌아간 그는 말년에 다시 내출혈과 말라리아로 큰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1873년 5월 1일 그가 생을 마감했을 때 그는 잠비아, 일랄라 지역, 방웰루호수 근처 텐트의 침대 옆에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는 자세로 발견되었고, 그가 남긴 그의 마지막 일지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습니다. “난 그의 약속을 믿는다. 그는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을 지키실 것이다.”고. 기도하겠습니다.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 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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