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문제들 중에 하나가
바로 공평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다르게 표현을 하자면 차별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똑같은 세상에서 살면서
똑같은 기준과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사람을 대해야만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세상살이뿐만 아니라
하다못해 신앙생활에서조차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교회 앞에 뭔가 한 것이 있는 성도이면 무시당하지 않는 것 같고,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으면 왠지 무시당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
요즘의 교회생활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반면에
남들에게는 엄격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저렇게 별 핑계를
다 대면서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정말 엄격하게 적용을 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논의되는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한 성도들은
유대교에 있었을 때 이미 다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를 비롯한 유대 지역이 아닌
이방 지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할례를 받은 적도 없고, 할례에 대해서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유대 기독교인들이 이방 기독교인들도
자기들과 같이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을 한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진리입니다.
진리가 여러 가지이면 절대로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 진리 앞에서 다른 어떤 것도 고개를 들이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할례 이야기가 나옵니까?
그건 진리가 아닌 겁니다.
진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굳이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진리 아닌 것을 붙들고 살려는 사람들의 연약함과 죄인 됨이 있습니다.
바로 죄악 된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끝없는 비교의식입니다.
남들보다 좀 더 인정받고, 좀 더 잘난 척하고, 좀 더 나은 지위를 누리려고 하는
우리 사람들의 연약하기만 한 도토리 키 재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가진 것이 많고, 누리는 것도 많은데,
나보다 훨씬 못한 사람들과 같은 대우, 같은 조건으로
천국을 가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못 참아하는 것입니다.
왜 내가 저런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만 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밥을 먹어도 남보다 더 나은 밥을 먹고,
똥을 싸도 남보다 더 질 좋은 똥을 싼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것들은 뭔데 나랑 똑같은 대우를 받느냐는 겁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믿음의 문제가 절대적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아무 소용없는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할례를 주장하는 것은 믿음 이외에 행위를 더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건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 사이의 서열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렇죠?
같은 코스로 다니거나 나오면
우리 사람들은 순서를 따져서 서열을 결정하는 못된 버릇들이 있습니다.
같은 학교, 같은 교육, 같은 기관, 같은 시험, 같은 과정을 나오면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람 만나면 하는 게 늘 그런 겁니다.
나이 따지고, 고향 따지고, 몇 년차를 따지고 그럽니다.
그래서 뭘 하자는 겁니까?
대우 받자는 겁니다.
남보다 먼저 한 거,
남보다 앞서서 나온 거에 대한 보상을 받자는 겁니다.
누구한테요?
늦게 나오고 나중에 나온 사람한테...
때문에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불만이 터져 나오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하는 겁니다.
그런 게 다 뭡니까?
우리가 예수 믿어서 천국을 가는 데에 있어서는 조금의 영양가도 없는 것들입니다.
오히려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할례 같은 걸로 물고 늘어집니다.
자기가 받은 것이 손해인 것 같고,
반대로 남들보다 더 나은 것 같으니까
자기를 내세우는 겁니다.
한 쪽에서는 대우를 안 해준다고 난리이고,
또 다른 쪽에서는 그런 걸로 대우받을 생각하지 말라고 난리입니다.
교회가 언제나 이렇게 구원과는 전혀 관계없는
소모전을 벌이고 있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어떤 면에서는 볼 때,
구원에 관한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필연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구원 받았음에 확신이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 해결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노력은 하나도 들어간 것 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됐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가 투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전 1:22-31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만 구원받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은
사람의 기준에서 볼 때 물질과 배움이 있고 없고를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것이 사람의 편에 있어서의 어떤 조건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게 말씀을 합니다.
8절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는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
전혀 차별 없이 동일하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차별을 하지 않으시는데 왜 우리가 차별을 하는 겁니까?
자기 자신은 남들보다 뭔가 다른 대접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실 남들보다 다른 대접을 받다보면 그거 은근히 중독성이 있습니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묘한 쾌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이 치료를 받기 위해서 동서가 하는 치과를 갑니다만
거의 대부분 경우에 저는 그냥 순서대로 합니다.
그런데 월요일에 갔더니 접수하는 간호사가 저를 알아보고는
남들보다 먼저 치료받게 해주더라구요.
그냥 거절할 수 없어서 먼저 치료받고 나오는데
저보다 먼저 와 있던 환자들이 아직도 대기실에 앉아 있는 겁니다.
그 사람들을 보니까 뭔가 미안하면서도
괜히 제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런 건 사실 인간적인 모자람입니다.
건너편 농협에 가도 나무목교회 오겠다고 하고, 잘 안 오는 집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가끔 제가 줄 서있는 걸 보고 달려와서
제 통장하고 해야 할 것을 정리해서 알아서 남들보다 먼저 해줍니다.
그 기분도 쏠쏠하기도 하지만 뭔가 묘합니다.
그래서 은행에 가면 그 집사님 안보이게 일부러 숨습니다.
남들과 다른 대우를 받는 것이 우리는 굉장히 기분 좋은 겁니다.
왜죠?
우리가 죄인이거든요.
문제는 신앙 안에서도 차별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합니까?
전혀 차별하지 말라는 겁니다.
더더군다나 믿음과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 어떤 차별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가 왜 비판당하는 단체가 되어 버렸습니까?
물론 기독교는 세상으로부터 당연하게 비판받아야만 정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의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비판은 뭔가 다릅니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비판합니다.
기독교가 누리고 있는 특혜를 비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성도들의 삶을 비판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의 삶을 비판하는 이유도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너무 잘 믿어서 다른 종교의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의 세상에서의 성공을 비난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의 모인 교회들의 권력을 비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그 예수를 믿는 성도와 교회는 이 세상에서 누리려고 하는 이익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 한 번도 이 세상의 권력이 되길 원하지 않으셨는데,
오히려 권력이 되는 것을 거부하신 이유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우리는 그 예수를 앞장세우고 권력을 누리려고 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온갖 비난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겁니다.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분명히 섬기러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온 인류의 죄를 기꺼이 차별 없이 다 감당하셨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예수를 믿으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차별 당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차별할 수 없습니다.
차별 당하지도 마세요.
누가 나를 차별한다고 슬퍼할 것도 없습니다.
차별 하는 사람이 문제인 거지, 하나님은 결코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나보다 더 부족하고 힘든 사람들을 찾아서
섬겨주고, 베풀어주고, 나눠주고, 이끌어주는 것이
훨씬 더 큰 아름다움이요. 귀한 믿음입니다.
오늘 저녁에 나오신 우리 모든 성도들은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동일한 은혜를 받아서 동일한 사랑을 나타내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으니
아무 것도 놀랄 것도, 겁날 것도,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경지가 바로 평안입니다.
그 평안을 다 같이 누리시면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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