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우리 성도들의 의식 안에는
본 교회라는 생각들이 들어가 있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본 교회,
헌금을 드려도 본 교회,
봉사를 해도 본 교회라는 생각을 은연 중에 하고 있습니다.
본 교회에서 무엇이든지 우선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아주 아쉽게도 성경에는 본 교회라는 개념은 나오질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교회가 다 같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있어서 같습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섬기고 있음에 같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 하는 토대 위에 세워집니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을 못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교회는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다니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불완전함을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불완전한 사람들이 다니는 것입니다.
죄인이 모이는 세상의 모든 교회는 다 같습니다.
죄인들의 모임이라는 겁니다.
문제가 많으냐? 적으냐? 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죄인들의 모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교회는 다 같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는 것에 같고,
죄인들이 다니는 공동체 인 것에 같습니다.
건물이 다르고,
모이는 인원이 다르고,
하고 있는 사역의 크기나 질이 다르지만 근본적인 것은 같습니다.
그러면 개 교회 안으로 들어가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 나무목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 같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에 같습니다.
또 우리들 모두가 다 죄인 인 것에 같습니다.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 같습니다.
내면적으로 이미 같습니다.
전혀 구분되거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우리는 너무 쉽게 외형적인 획일화의 유혹에 빠지고 있습니다.
조건과 형편과 처지에 따른 이런저런 구실과 명분을 내세워서,
남들에게 자신이 믿고 있는 가치에 대해서
같은 방식의 동의를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같은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
눈에 드러나는 동질감을 갖고 싶고, 표현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같은 패거리라고 하는 점을,
눈에 드러나는 것으로 표현하라고 요구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교패를 붙인다든지,
배지를 착용한다든지,
성경찬송가를 획일화된 것으로 구입을 한다든지,
유니폼을 맞춰서 입는다든지 하는 것이 다 그런 의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저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치면 되는데,
문제는 교리적인 부분으로까지 확대 재생산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소속감에 대한 문제가
이제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 의 문제로까지 확대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드러나는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안디옥교회에 유대로부터 손님들이 왔습니다.
이들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대뜸 가르치기를 너희가 지금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렇더라도 모세의 율법에 정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디옥교회 성도들에게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얻는다고
강조했던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고 표현을 합니다만,
이건 단순한 다툼이나 변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받는 구원론에 대한 위협적인 공격이었습니다.
이미 그들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기도 전에,
할례를 받은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니까, 같은 옷을 입자고 하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공동체 밖으로 나가라는 선전포고와도 같은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이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예루살렘 교회로 가서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자기들의 일들을 설명을 합니다.
그랬더니 역시 바리새인 중에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방인들도 자신들처럼 할례를 받는 것과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이 먼저냐? 할례가 먼저냐? 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구원이 먼저라는 답이 나온다면
할례는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할례는 구원 받는 일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도 되질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구원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 물론 그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지만
오늘 우리들과 같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
아브라함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별칭을 갖고 있을 만큼,
그의 구원받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믿음으로 받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구원에 관해 제일 처음 나오는 내용은 바로 창15장입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내용입니다.
창15:1-6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시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롬 4:1-3“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 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할례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은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할례는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구원을 하신 그 다음에서야 받게 하셨습니다.
창17:23-27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으니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이었고 그 아들 이스마엘이
그 양피를 벤 때는 십삼 세이었더라 당일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생장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아브라함은 이미 구원을 받은 다음에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영적인 자녀를 만들어내는 조건이 아닙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죄 많은 우리들로 하여금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실 테니까,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하는 의미로서 행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 주신 것을,
붙들고 사는 의미로서 행한 것입니다.
구원이 먼저이고, 할례는 나중입니다.
더군다나 할례가 구원 받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미 믿음으로 얻은 것입니다.
할례는 다만 내가 구원받은 사실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표시일 뿐입니다.
또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는 그것만으로 구원받음에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외에 다른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도 엄격한 의미에서는 틀린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미 구원을 얻었으면 되는데,
그 외에 다른 어떤 것이 도대체 왜 필요합니까?
우리의 영안이 어둡기 때문에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둡다는 말은 전혀 못 본다는 뜻이 아니라,
제대로 봐야할 것을 못 본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보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보질 못하고,
여태 붙들고 살던 율법을 자꾸 붙드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구원 받지 못합니다.
물론 율법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내가 구원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만 해줍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의 원 기능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율법의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오해를 합니까?
율법의 조항 중에서 우리가 뭘 반드시 해야만 구원받는,
아니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 것 같은 생각들을 합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정성을 쏟아야만 하고,
뭔가를 행해야만 하고,
뭘 해도 해야만 하는 보이지 않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주 중에도 교회에 나와서 함께 뭔가를 자꾸만 해댑니다.
일주일에 일주일을 교회를 가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그렇게 해야만 뭔가 한 것 같으니까 그렇습니다.
때문에 정작 구원받은 백성들이 해야만 하는 일은 등한히 합니다.
주 중에 교회 너무 자주 나오지 마세요.
남편 밥이나 제 때 제대로 잘 챙겨드리세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하세요.
롬 4:4-11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 시냐 무할례 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잘 아는 십계명의 제 4계명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입니다.
그런데 그 안식일을 잘 지키는 전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입니다.
힘써 누구의 일을 하라고 하십니까?
자기 일을 하는 겁니다.
교회 일을 하고,
주의 일을 하고,
선교회, 전도회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업의 일,
자기 삶의 일,
세상 속에서의 자기 일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대충 하지 말고 힘써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태도는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또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이 세상에 녹아들어서 하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과 세상의 내 일이 동급입니다.
같은 레벨입니다.
세상의 일도 중요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같은 크기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사는 것 외에
신앙적인 다른 노력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다움은
세상 속에서 드러내고 서있어야만 합니다.
사람이 둘 이상 모이면 다른 사람들과 자신들을 구분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를 반드시 구분하고,
구별하고 또 심하게는 차별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미 구원받은 백성들입니다.
이미 구원해주심에 감사하면서 사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구원해주신 것으로 서로를 붙들고,
이해하고, 섬겨주고, 사랑하는 삶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 외의 다른 어떤 조건도
우리가 하나 되어 교회를 섬기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우리의 의나, 경력이나, 어떤 조건이나, 행함이
의미가 되면 문제만 드러날 뿐입니다.
우리 모두 그저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든든하게 붙들고 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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