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짝사랑을 해보셨습니까?
아마 사춘기 시절을 지날 때, 누구나 다 한 번쯤은 가져보는
삶의 한 과정이 바로 짝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대상이 누구이든지 관계없고,
또 사랑의 결과에 대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혼자만의 사랑입니다.
짝사랑의 도가 지나치면 상사병이라고 하는 마음의 병이 걸리기도 한답니다.
영적으로도 짝사랑이 있습니다.
가장 큰 짝사랑은 하나님의 이 세상을 사랑하심입니다.
요 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모릅니다.
또 모르면서도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살다가 어디서 하나님께 대하여 주워들은 것이 있더라도,
오히려 하나님을 더 외면하고 사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오늘 악한 세상의 가장 큰 죄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래도 악한 이 세상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전혀 반응하지 않는 이 세상을 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은 짝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세상을 짝사랑하심에 대해서 가슴깊이 깨닫고,
아울러 같은 삶을 산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삶을 다 드려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사랑하려고 애를 섰습니다.
보세요.
루스드라에서 그는 돌로 맞아서 죽었습니다.
19절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내치니라”
죽은 줄 알 정도로 돌을 가지고 폭행을 가한 것입니다.
죽었다고 알았기 때문에, 그 시신을 성 밖으로 버릴 만큼 참혹하게 얻어맞은 겁니다.
그러니 사실 죽은 겁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죽지 않았지만, 이미 다 죽은 겁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습니까?
이유는 단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자기는 어떻게 되더라도 좋다고 생각을 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그렇게 얻어맞고 나서도 여전히 그는 복음을 전합니다.
그의 모든 삶은 여전히 복음을 전하는 일에 총동원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죽을 수도 없고, 쉴 수도 없는 것입니다.
20-21절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죽었다고 생각할 만큼 어지간히 맞았으면 겁도 날 터인데,
전혀 겁을 내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맞아 죽을 정도로 맞았음에도,
그는 복음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그는 자기를 죽일 만큼 미워하고 싫어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줄 모르는 바보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냉대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껴안고 사랑하는 일을 결코 저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를 죽일 것 같이 하더라도, 그들에게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잘못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세상을 너무 쉽게 버린다는 것입니다.
버릴 뿐만 아니라 아예 정죄를 해버리고,
그들로 하여금 복음 앞에 서야할 그 어떤 틈도 내주질 않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없이 사는 형제와 가족들이
내가 전하는 복음과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관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우리들의 순진한 착각입니다.
절대 아닙니다.
혹시 그들이 인간적으로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이해할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복음을 싫어하고, 예수를 부인하고, 오히려 더 적대시합니다.
때문에 ‘너는 예수만 전하지 않으면 좋은 친구다.’라는 말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자기한테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만나서 재미있게 놀다가 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증거 해야만 할
역사적인 사명과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 몸으로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속이 다 썩어야 합니다.
자존심을 다 버려야 합니다.
한 영혼보다 더 귀한 가치가 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에
우리의 실력이나 현재의 위치나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놔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말로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삶 전체를 다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살아도 될까 말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든 삶을 요즘 다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려고 온갖 스트레스를 다 받느니,
차라리 전하지 않고 나 혼자 편히 믿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복음 안에 사는 성도라고 하면서도
남들을 향해서 엄청나게 공격해대고, 무시하고,
싸우고 사는 한심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무조건 저들을 품어야만 하는데
전혀 품을 생각이 없는 겁니다.
그냥 자기를 따라오든지 말든지 하라는 겁니다.
맹목적으로 강요만 하고, 그 삶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기분 좋으려고,
외식을 하러 갔다가 기분 망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도무지 음식이 짜고 맵고 맛이 없는 식당에 가면 그렇습니다.
더 기분 나쁜 건 식당 주인이나 종업원들의 태도입니다.
손님이 맛이 짜다 맵다 하면 그것을 해결해줘야만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싱겁게 해주고, 안 맵게 해줘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냥 자기 입맛에만 맞춥니다.
그리고는 먹으려면 먹고 말려면 말라는 식입니다.
기준이 손님에게 가 있어야만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손님에게 맞춰야만 하는 것입니다.
요즘의 정부가 욕먹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국민들의 원하는 대로 해줘야만 합니다.
자기들이 국민들을 계몽하고 계도하려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국민을 두려워하거나 섬기는 태도가 아닙니다.
혹시라도 문제가 있고, 사고의 우려가 있다고 한다면
우선 그 대책은 완전하게 세우고,
국민들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자기들의 하는 대로 따라오라고,
국민들한테 지시만 하기 때문에 더 큰 반발을 자꾸 부르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복음은 일방적인 선포입니다.
듣든지 안 듣든지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판단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전하려고 하는,
기본적인 자세를 잃지 말아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들을 섬겨야 하는 겁니다.
결코 내팽개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입으로는 복음을 전하면서도,
삶으로는 내팽겨 쳐버린 우리 주변의 영혼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쨌거나 저들은 우리에게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의 예자만 들어도,
빈혈이 나고, 현기증이 나오고, 속이 울렁거립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건 복음이 주는 거룩한 영향력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저들은 늘 우리들에게 적대적이고 공격적입니다.
한 번도 고분고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저들을 포기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바울이 그의 제자들에게 하는 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2-23절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한마디로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는 그 고통과 아픔이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에 그 모든 환난이 끝나고, 밝은 일들로 가득해지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은 쉬지 않고 환난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 고비만 넘기면 행복하게 살 텐데 라고 하는 것은 그냥 꿈일 뿐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모든 삶이 괴로움입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좀 더 확장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신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들처럼 인생살이에 고생하는 영혼들을 불러서,
좀 더 많은 축복과 은혜를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렵게 살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받는
괴로움과 환란을 기뻐하는 사람들로 만들어 가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고집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마치시기까지,
우리의 할 일은 오로지 한 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서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 온 몸으로 감당하는 겁니다.
우리 역시 세상을 짝사랑하고 살아야만 합니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다 짝사랑해야만 합니다.
사랑의 결과에 연연해 하지 않고,
온 몸 바쳐서 사랑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를 통해서도 선교는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그 책임을 다하려고,
기도도 하고,
금식도 하고,
은혜도 누리는 것입니다.
이 책임을 외면하고 성도답게 사는 길은 없습니다.
빌 1:27-3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우리 나무목교회와 속한 모든 성도들과 여러분 모두가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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