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시인 류시화씨는 ‘엮은 시집’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시도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Healing Poem, 곧 ‘치유의 시’를 주제로 한 권의 시집을 엮어서 출간했습니다. 그는 그 책에 나오는 한 시의 제목을 그대로 따서 시집의 제목을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라고 정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시 한 편을 소개해 드립니다. 제목은 「신과의 인터뷰」이며, 작가는 미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우리사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깨닫는 것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과의 인터뷰」
어느 날 나는 신과 인터뷰하는 꿈을 꾸었다.
........중략........
내가 물었다.
“인간에게서 가장 놀라운 점이 무엇인가요?”
신이 대답했다.
“어린 시절이 지루하다고 서둘러 어른이 되는 것, 그리고는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는 것,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돈을 다 잃는 것,
미래를 염려하느라 현재를 놓쳐버리는 것, 그리하여 결국 현재도 미래에도 살지 못하는 것,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것, 그리고는 결코 살아 본적이 없는 듯 무의미하게 죽는 것.”
........중략........
“당신의 자식들에게 그밖에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신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내가 이곳에 있음을 기억하기를, 언제나, 모든 방식으로.”
이 시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단순히 생존하는데 있지 않고, 무엇인가 가치가 있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데 있음을 이 시는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연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지금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분명하게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잘못된 것들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유익하게 생각하며 자랑할만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빌3:5-6에서 7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처음 네 가지는 선천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것들이었고, 뒤의 세 가지는 그가 후천적으로 추구해서 얻은 것들이었습니다. 빌3:5-6절 말씀입니다.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뒤에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빌3:7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바울은 과거에 자기에게 유익한 줄로 여기며 자랑했던 것들을 이제는 해로 여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해가 되며 방해가 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과거의 자랑거리들을 기꺼이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대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얻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새롭게 얻게 된 것을 다섯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그것이 빌3:8-1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첫째로 얻은 것이 빌3:8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는 그리스도의 지식, 곧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얻었습니다. 둘째로 그가 얻은 것은 빌3: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그는 그리스도의 의를 얻은 것입니다. 셋째와 넷째는 빌3:10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가 셋째로 얻은 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었으며, 넷째로 얻은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이었습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얻은 것은 빌3:1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섯 가지를 얻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지식을 얻었고, 2) 그리스도의 의를 얻었으며, 3) 그리스도의 권능을 얻었고, 4)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얻었고, 5)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이 얻은 것들이 너무도 귀하기에 그는 그 이후로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다음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3:17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보이라”는 말은 눈여겨보라는 뜻입니다. 과연 우리가 어떤 점을 바울에게서 배워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의 신앙의 성숙을 위한 여섯 가지 원리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차례대로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 바울은 자신의 부족함을 잊지 않았습니다.
12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바울은 자신이 이미 얻었다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은 얻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무엇을 아직 얻지 못했습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이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그는 아직 온전함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다섯 가지를 얻었습니다. 그 첫째가 그리스도의 지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전13:9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부분적으로 알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더 많이 더 깊이 알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했습니다.
바울이 둘째로 얻은 것은 그리스도의 의였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그에게 하셨던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목욕을 한 자라도 또다시 발을 씻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는 이미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육신을 갖고 살기에 우리는 자주 넘어지며 죄를 범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셋째로 얻은 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귀신도 쫓아내었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렸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는 없앨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자고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은혜로 그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넷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이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그는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까지 본받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다섯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은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이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하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모든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래적인 일입니다. 아직까지는 실제적으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많은 것들을 얻었지만 그것으로 그가 온전함에 이르렀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 누구보다는 믿음 위에 굳게 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온전함에 이르지 못했다면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도 바울과 똑같은 고백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성숙의 첫걸음은 우리의 부족을 깨닫는데 있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만일 우리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우리가 온전하다고 착각하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성숙이 없습니다. 바리새인처럼 영적으로 교만해집니다.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비판하고 정죄하는 외식과 위선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항상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하게 영적 성장에 힘쓰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바울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12절 하반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바울은 좇아가는 삶, 뛰어가는 삶, 달음박질하는 사람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무엇을 위하여 좇아갔습니까? 바울이 좇아가서 잡고자 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혔습니다. 왜 예수님은 바울을 잡으셨습니까? 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롬8:29-30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창세 전에 바울을 미리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바울을 하나님의 아들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바울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를 미리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를 미리 하나님의 자녀로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 가운데 우리는 이미 영화롭게 되기로 작정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과정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한 것이 그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알았기에, 그는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을 본받는 것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그는 부단 없이 좇아가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닮으라고 바울을 붙잡으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닮는 것을 그의 삶의 목표로 삼고 뛰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물질입니까? 권세입니까? 명예입니까? 그러나 그런 것들이 우리의 궁극적인 추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찬송가 505장 1절의 가사를 생각해 봅시다.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예수를 닮기 원함이라
예수의 형상 나 입기 위해 세상의 보화 아끼쟎네
예수를 닮기 내가 원하네 날 구속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지금 곧 오사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소원, 우리의 마땅한 기도의 제목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예수님을 닮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 받아 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님을 닮는 것을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기를 바랍니다. 학생은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예수님을 닮기 원하고, 주부는 가정에서 가사를 돌보면서 예수님을 닮기를 원하고, 직장인들은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예수님을 닮기를 원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며, 예수님이 뜻하시는 것을 우리도 뜻하며, 예수님이 목적으로 두신 것을 우리도 목적으로 삼고 살아갑시다. 예수님을 본 받는 삶이 우리 삶의 최우선 목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바울은 집중했습니다.
왜 모든 일에 능숙한 팔방미인이 못삽니까?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닮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애정이 어린 표현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그것도 유럽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주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바울은 모함을 받아 심한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그만큼 빌립보 교회와 그 성도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애정은 각별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의 순진한 성도들을 미혹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처럼 율법을 지키고 할례만 받으면, 누구든지 온전해질 수 있다고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미혹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염두에 두면서 자신을 예로 들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무슨 뜻입니까? “형제들아!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얻은 것이 그렇게 많건만, 나도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있다. 그러니 율법을 지키고 할례만 받으면 온전하게 된다는 율법주의자들의 그릇된 주장에 미혹을 받지 않도록 하라.” 그러면서 그는 13절 하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바울은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집중했습니다. 그가 집중했던 한 가지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을 닮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 바울은 두 가지를 덧붙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은 잡으려고 좇아갔습니다. 그는 과거에 발목잡히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잘 한 것도 잊어버리고, 잘못한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오로지 그는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갔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과거지향적인 삶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날을 주십니까?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한 주를 주십니까?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라고 하십니다. 오직 한 가지 일, 곧 예수님을 닮는 일에 힘을 쓰라고 하심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자들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좇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눅9:6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손에 쟁기를 잡으셨습니까?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만 바라보며 부지런히 전진하십시다.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닮으며, 예수님을 본받는 일에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바울에게는 동기가 분명했습니다.
학생이 공부에 대한 분명한 동기가 있을 때, 더욱 분발해서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에게는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는 분명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빌3:14절 말씀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이 푯대로 삼고 좇아갔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을 닮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닮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아무리 뛰어도 이 땅에서는 이 푯대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위에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이 푯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우리를 부르실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상을 주십니다. 그 상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것, 우리의 기도 제목이며, 우리가 푯대로 삼고 뛰었던 것, 곧 예수님을 온전히 닮게 되는 그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온전하게 되어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 나라의 모든 영광을 누리며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실 때,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야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영원한 형벌을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은 심판대가 아닌 시상대에 서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받습니다. 그 상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마감하면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딤후4:6-8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장차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게 될 “의의 면류관,” 곧 의라는 이름의 면류관은 궁극적으로 어떤 것이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이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온전함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닮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에게는 동기 곧 motivation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 어떠한 고난도 이겨내고 계속해서 끝까지 그 푯대를 향하여 달음박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이 위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 우리가 푯대로 삼고 뛰고있는 것을 상으로 주실 것을 분명히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열심히 뛰어가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바울은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빌3:15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그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며,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은 온전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염두에 두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전하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온전하지, 어떻게 그들이 온전하겠는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시는 날, 하나님이 주실 상으로 온전함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이 땅에서도 하늘 나라에서도 결코 온전함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이렇게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라는 말씀입니까? 바울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원리들을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첫째, 우리 자신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에수님을 닮는 일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우리에게도 상 받을 날이 온다는 동기가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15절 하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혹시라도 율법주의자들처럼 자기들이 온전하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기를 일삼는 자들이 있다면, 또는 예수님을 닮으려고 애쓰고 노력하기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면서 육신의 일, 세상의 일에만 파묻혀 사는 자들이 있다면 바울은 그런 자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딤후4:14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이것이 모든 목회자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목회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목회에 지장을 주고 해를 끼치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들이 일일이 그들과 대항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 그들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돌이켜주셔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를 깨닫게 하실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련이나 징계를 통해서 그를 깨닫게 하시고 그를 잘못된 길에서 바른 길로 돌이켜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다.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자가 있다면 그를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원수라도 사랑하면서, 그를 위해 기도해 주면서 살아갑시다.
여섯째, 바울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진행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빌3:16절 말씀입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일단 손에 쟁기를 잡았으면, 뒤를 돌아보지도 말고 중단하지도 말고 앞만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전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포르투갈의 탐험가였던 마젤란이 배를 타고 스페인을 출발했습니다. 그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최남단에 있는 마젤란해협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탄 배는 그곳을 통과해서 태평양으로 나갔습니다. 그가 탄 배는 세계 최초로 세계일주에 성공을 했습니다. 그가 이 위대한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난관을 겪어야 했겠습니까?
항해지도를 잘못 판독해서 본시 계획했던 항해가 2년에서 3년으로 늘어났습니다. 그 때문에 준비한 식량이 고갈되었습니다. 배 안의 장비도 닳아서 못쓰게 된 것들도 많았습니다. 선원들 가운데는 돌아가기를 주장하면서 급기야 반란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젤란은 언제나 같은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계속해서 항해하라! 계속해서 항해하라! 계속해서 항해하라!”
그렇게 해서 결국 그가 탄 배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세계일주에 성공한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비록 우리 앞을 홍해가 가로막더라도, 여리고 성이 가로막더라도, 아낙 자손이 가로막더라도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 우리는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부름의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대로 예수님을 온전히 닮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라의 모든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신앙 성숙의 여섯 가지 원리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을 본받기 위한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넷째, 우리에게는 부름의 상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여섯째, 우리는 끝까지 계속 가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푯대로 삼고 좇아가야 할 것은 예수님을 온전히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본받는 것입니다. 그 언젠가 하나님이 위에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상으로 예수님을 온전히 닮게 될 것입니다. 부름의 상을 받는 그날까지, 의의 면류관을 쓰는 그날까지 우리 모두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닮으며,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고, 예수님이 뜻하시는 것을 우리도 뜻하며, 예수님이 추구하시는 것을 우리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