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사랑치 말라! (요일2:15-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오늘 본문 요일2:15-17의 말씀을 다시 읽어봅시다. 본문에서 ‘세상’이라는 단어가 몇 번 사용되었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에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모두 여섯 번 사용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사랑치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왜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할 수가 없는지 그 이유들을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이 뜻하는 세상의 의미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계를 의미합니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은 엿새 동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천지의 창조사역이 끝난 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1:31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컨대 찬송가 78장의 1절과 2절 가사를 읽어봅니다.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 저 아침해와 저녁놀 밤하늘 빛난 별
망망한 바다와 늘 푸른 봉우리 다 주 하나님의 영광을 잘 드러내도다.”
아프리카 케냐의 여성으로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왕가리 마타이(Wangari Muta Maathai, 1940. 4. 1~ )는 그의 전기인 「나무들의 어머니, 왕가리 마타이」(슈테판 에레르트 저, 김영옥역, 열림원, 2005)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은 지구를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뒤에 맨 나중에야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알고 계셨다. 인간을 가장 먼저 창조하시면 인간은 화요일이나 수요일쯤에 죽는다는 것을. 하나님이 수, 목, 금요일에 만드신 것이 없으면 인간은 스스로 생존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맑은 물, 깨끗한 공기, 땅속 무기질이 필요하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지구가 허락하는 마지막날까지 피조물들과 조화롭게 살 의무가 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창조하신 자연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 가꾸고 아름답게 보존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둘째, 세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류를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요3:16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 사용된 세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 곧 인류를 가리킵니다. 요1:10을 읽어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여기에 세상이라는 단어가 세 번 사용되었습니다. 처음 두 번의 세상은 그 첫째 의미,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계를 뜻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 번의 세상은 그 둘째 의미,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류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인류를 사랑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막12:29-3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어야 할 것입니다.
본시 세상이라는 단어는 이 두 가지의 의미, 곧 첫째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계와 둘째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류의 두 가지 의미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류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이라는 단어에 또 다른 의미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계를 인류가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창1:27-28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인류가 사단의 꾐에 빠져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인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계를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에서가 보잘것없는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장자의 권리를 상실해버린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미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인간은 자연계를 다스리는 권리를 사단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불행하게도 그때부터 세상이라는 단어는 제 삼의 의미를 새롭게 갖게 되었습니다.
셋째, 세상은 사단이 다스리는 무대를 의미합니다.
요일5:19의 말씀입니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여기에서 말하는 악한 자는 사단, 곧 마귀를 의미합니다. 온 세상은 사단의 손아귀에 놓여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가 했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눅4:5-7의 말씀입니다.
마귀는 지금 말 그대로 자기 세상을 만난 것처럼 날뛰면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언젠가는 마귀가 지옥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다시금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권리를 되찾게 될 것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세상은 바로 이 세 번째 의미, 곧 사단이 다스리는 무대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 우리에게 사단이 다스리는 이 세상을 사랑치 말라고 말씀하면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차례대로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이지를 알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요일2:15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 다음절인 요일2:16에서 자세히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말씀했습니까? 그 이유는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의 정체를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도 분명히 확립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원수요, 우리의 대적자인 마귀가 다스리는 곳입니다. 마귀의 자식들은 마귀의 종노릇을 하기 때문에 그 아비 마귀가 다스리는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의 시민들인 우리는 세상을 사랑치 말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혹시 이런 질문을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할 수는 없나요?”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결코 양립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봅시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있습니까? 빛과 어두움은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빛이 임하면 어두움은 사라집니다. 어두움이 있다는 것은 빛이 없다는 뜻입니다. 또 선과 악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선을 사랑한다면 악은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자녀를 해치는 것은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자녀를 해롭게 하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이처럼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서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마귀가 다스리는 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예수님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6:24의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1:4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악한 세상을 완전히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육신의 장막을 벗는 순간까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악한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세상에 살되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생각해봅시다. 배가 물에 떠 있습니다. 비록 배가 물 안에 있지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면 문제가 됩니다.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들어오면 퍼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배는 가라앉아 버리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가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대한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못 들어오게 막아야 합니다. 들어왔으면 쫓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요일1:9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마음을 다시금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찬송가 511장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전엔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신6:5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사단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맙시다.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합시다.
둘째로, 우리는 이 세상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요일2:16의 말씀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사도 요한은 16절에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세상으로 좇아 온 것들이 무엇인지를 세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육신의 정욕과 둘째, 안목의 정욕과 셋째,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들은 어떤 일을 합니까? 사람들을 죄짓게 만듭니다. 사단이 선악과로 하와를 유혹할 때를 생각해 봅시다. 사단의 꾐에 빠진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보았습니다. 창3:6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와가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했습니다. 이는 육신의 정욕입니다. 보암직했습니다. 이는 안목의 정욕입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이는 이생의 자랑입니다. 결국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그와 함께 한 남편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기지 못하고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마저도 같은 것들을 이용해서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셨습니다. 그러한 때를 이용하여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첫째 시험입니다. 마4:3입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는 육신의 정욕으로 시험한 것입니다.
둘째 시험입니다. 마4:5-6입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성전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실 때, 천사들이 나타나서 예수님을 받들어 무사히 땅에 내려오도록 하는 것을 사람들이 자기들 눈으로 본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길 것입니다. 이는 안목의 정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아보려고 시험을 한 것입니다.
셋째 시험입니다. 마4:8-9입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생의 자랑으로 시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사단은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벧전5:8의 말씀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불나방이 현란한 불빛에 이끌려 그 속으로 들어갔다가는 뜨거운 불에 타죽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한 나머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자신을 내어 맡깁니다. 결국 그들은 사단의 밥이 되어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십니까? 레11:45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거룩하게 살아야 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어찌 우리를 죄짓게 만드는 이 세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옛 사람 아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사랑하여,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아담이 낙원에서 쫓겨난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결코 유업으로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을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사단의 시험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날마다 이 악한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요일2:17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도,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따라 얻은 모든 것들도 다 지나갈 뿐입니다. 물 흐르듯이, 구름이 흘러가듯이 다 스쳐지나갈 뿐입니다. 그것들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반면에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딤전2:4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인 우리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가 어떻게 잠시 있다 사라질 것들과 운명을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영원히 거하는 우리가 지나가 버릴 세상과 운명을 같이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최근 미국에서 세상을 감동시킨 아름다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세계 제2위의 갑부인 워렌 버펫(Warren E. Buffett, 1930. 8. 30~ )이 30조원이 넘는 돈을 세계 제1위 갑부인 빌 게이츠가 운영하는 재단에 기부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자녀들이 셋이나 있었지만 그들에게 상속하지 않았습니다. 또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으로 자선단체를 새롭게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 많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을 한 것입니다. 그는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한없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말을 남긴 앤드류 카네기의 삶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기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최근 우리 나라의 재벌들도 각기 8천억과 1조원을 기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부할 때는 우리의 마음에 깊은 감동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기부가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에게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들을 무마하기 위하여 되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자들은 재물에 대한 욕망이 강한 반면, 여자들은 외모에 대한 욕망이 비교적 강한 편입니다. 어느 중년 여성이 쓰러졌습니다. 그는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습니다. 그는 안간힘을 쓰면서 하나님에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40년을 더 살게 해 주겠다고 응답하셨습니다. 그 응답대로 그 여성은 곧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앞으로 40년을 더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 동안 미뤄두었던 성형수술을 받고서 자신의 얼굴을 완전히 새롭게 고쳐버렸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수술 받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숨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그는 기가 막힌 듯이 항변했습니다.
“하나님, 분명히 제가 40년을 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얘야, 네 얼굴이 완전히 바뀌는 바람에 내가 너를 알아보지를 못했구나. 나는 네가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잠31:30절 말씀입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비하면 이 세상의 것들은 보잘것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잠시 잠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거할 우리가 어찌 잠시 잠깐 있다가 없어질 이 세상과 운명을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든 영광을 누리며 영원히 거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덧없이 사라질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들을 세 가지로 말씀해주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마귀가 다스리는 곳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 세상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죄짓게 만듭니다.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이 세 가지 이유를 영어문장으로 표현을 해보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We cannot love the world because of 1) what it is-the enemy of the family of God; 2) what it does-causes sin; and 3) where it is going-to its end.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계속 두 가지를 대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는 세상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입니다. 16절에서는 세상으로 좇아 온 것과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입니다. 17절에서는 이 세상은 지나간다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세상으로 좇아 온 것들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 곧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서 살아가십니다. 덧없이 사라지고 말 세상적인 것들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우리가 영원히 거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 가운데 바라보면서 날마다 이 악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추천 설교 > 박상훈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교회의 사명! (2) (마28:16-20) (0) | 2015.08.19 |
---|---|
[스크랩] 교회의 사명(1) (마28:16-20) (0) | 2015.08.19 |
[스크랩] 예수님을 본 받는 삶! (빌3:12-16) (0) | 2015.08.19 |
[스크랩]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사 41:14-16) (0) | 2015.08.19 |
[스크랩]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 (누가복음 22:31~32) (0) | 2015.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