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사명(1) (마28:16-20)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해야 할 가장 본질적이고도 으뜸이 되는 사명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
요즈음 흔히 쓰는 말 가운데 ‘나이아가라 증후군’ (the Niagara Syndrom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앤서니 라빈스(Anthony Robbins)가 쓴 책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 Awaken the Giant Within」(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2002)에 나오는 용어입니다.
그는 인생을 강물에 비유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로 가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도 없이 그냥 인생의 강물에 뛰어듭니다. 때로는 강줄기가 갈라지는 분기점에 이르러서도, 어디로 갈지를 의식적으로 결정하지를 못합니다. 우물쭈물 하다가 그냥 물줄기가 흐르는 대로 따라서 흘러갈 뿐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물살이 빨라지고, 심하게 흔들리며, 귀청을 때리는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게 됩니다. 바로 눈앞에 나이아가라 폭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제야 한탄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물과 함께 폭포 아래로 추락해 버리고 맙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무심히 배를 타고 가다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떨어져 죽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인생을 이와 같이 사는 사람들, 곧 나이아가라 증후군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왜 사는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세상에 자신의 삶을 내어 맡긴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사명은 망각해버린 채, 주일이 되면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속한 부서에서 맡겨진 일에나 힘쓰면 그것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이며,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는 마태복음의 절정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마태는 오늘 본문을 기록하기 위해서 총 28장에 이르는 마태복음을 기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하늘 나라로 함께 데리고 가시지 않을셨을까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들을 이 땅에 남겨 두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그들에게는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 남아서 해야 될 사명이 무엇이었습니까? 이것이 바로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요,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분명하게 깨달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본질적인 사명은 무엇입니까? 우선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몇 가지 가능한 견해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교회의 사명은 친교에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주로 초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생각입니다. 그들이 즐겨 인용하는 성경은 요13:35일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우들 사이에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서로 돕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사명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둘째,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는 첫째 견해보다는 한 단계 위에 있는 견해일 것입니다. 이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근거로 엡4:11-13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교회의 사명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받은 은사대로 섬기는 일에 힘쓰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셋째, 교회의 사명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는 한층 수준이 높은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을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성경말씀으로는 엡1:5-6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예배토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 세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는 다 일리가 있습니다. 또 나름대로의 성경적 근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은 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교회의 존재 목적은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만일 예수님이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바라시는 것이 서로 간에 사랑을 나누며 교제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남겨두실 이유가 없습니다. 차라리 빨리 하늘 나라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 더 낳을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완벽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미움도 없고, 시기도 없고 오직 사랑만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또 말씀을 배우며, 하나님께 찬양하며 예배드리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라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를 즉시 하나님의 나라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 늘 새 노래로 금 거문고를 켜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며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존재하게 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다른데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복음을 전함으로서 잃은 영혼을 구원함에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은 전도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20:21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왜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 이유도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라고 보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한마디로 복음을 전하는 일, 곧 전도에 있습니다. 사랑으로 교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기보다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이루기 위한 준비과정입니다. 또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인 전도의 열매로 이루어진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교회의 존재목적과 그 본질적인 사명은 전도하는 일에 있음을 분명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도하라는 지상명령을 주시기에 앞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시기 위함입니다. 마28:16-18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전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우리는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은 옵션이 아닙니다. 해도 괜찮고, 안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교회의 존재목적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으뜸이 되고 본질이 되는 사명입니다. 마28:19-20상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복음을 전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홀로 버려 두지 아니하십니다. 전도하는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마28:20하입니다.
오늘은 이 가운데서 첫째 대지에 해당하는 예수님의 권세에 대해서만 살펴보고 나머지 부분은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권세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해야 할 사명을 주시기에 앞서서 먼저 예수님에게 어떤 권세가 있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가룟 유다는 자기의 갈 길로 갔습니다. 따라서 그를 제외한 열한 제자는 갈릴리로 갔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명에 따라 되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전에도, 또 부활 후에도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26:32입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의 무덤에 나타난 천사도 여인들에게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마28:7입니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곧이어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인들에게 나타나셔서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28:10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열한 제자는 예수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산이 어느 산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갈릴리에는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된 많은 산들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팔복산이 있었습니다. 마5:1-3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또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산도 있었습니다. 요6:3-5입니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또 예수님이 기도하러 올라가셨던 산도 있었습니다. 마14:22-23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또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서 십자가에 대해 말씀을 나누시던 변화산도 있었습니다. 마17:1-2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아무튼 예수님이 명하셨던 산은 제자들이 잘 알고 있는 산이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난 때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부활하신 당일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막16:9입니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같은 날 예수님은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막16:12입니다.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같은 날 저녁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인 곳이 나타나셨습니다. 막16:14입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그로부터 여드레가 지난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을 깨끗이 제거해 주셨습니다. 요20:26-27입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에 따라 갈릴리로 갔을 것입니다. 그들이 갈릴리까지 가는데는 대략 닷새 정도가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후 약 보름정도가 흘렀을 때, 갈릴리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즉시 예수님이 명하신 산으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몇몇 제자들은 디베랴 바다로 가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요21:1-4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제자들이 고기 잡는 일을 준비하며, 정리하는 데 또 닷새 정도가 흘러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예수님의 명하셨던 산에서 제자들을 만나신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약 20일 정도가 지났을 때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이 땅에 사십일 동안 계셨습니다. 행1:3입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감람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갈리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데 또 다시 닷새 정도가 걸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갈릴리에 있는 어떤 산에서 제자들을 만나신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20일에서 35일 사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장소에는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우선 그곳에는 본문에 나타난 열한 제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천사와 예수님에게서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실 것이라는 말을 들은 여인들도 그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 외에 그곳에는 예수님을 믿는 다른 제자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장인 고전15:6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은 일시에 오백여 형제들에게 그 모습을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때가 그 경우였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도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장에 의하며, 감람산에서 내려와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힘쓴 무리의 수는 120명 정도였습니다. 행1:12-15상입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일시에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신 때는 바로 오늘 본문의 경우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대적들은 대부분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리는 오백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대적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안전하게 모이기에 적합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입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그들은 예수님이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명에 따라서 그곳으로 갔기 때문에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날 새벽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 동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그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열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 동산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는 축복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은 그곳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귀한 사명도 받고, 귀한 약속의 말씀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명대로 그들이 그곳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우리도 이사야 선지자처럼 예수님이 명하시고 예수님이 보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십시다. 우리도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확실하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다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찬송가 355장의 가사가 바로 우리의 마음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존경의 뜻을 표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 땅의 통치자 가운데 한 명 정도로 생각하고 경의를 표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자신들의 주요,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경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그들 가운데는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사실 그대로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달리 꾸며서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일점 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열한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몇 차례 뵈었습니다. 여인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모인 오백여 명의 대부분은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뵙게 되는 것입니다. 한 곳에 오백 명이나 모였으니까, 뒤편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습이 분명하게 보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 그들 가운데는 의심 많던 도마처럼, 혹은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두 제자처럼 믿기를 더디하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점을 아시고, 그들의 의심을 해소시키기 위해 어떻게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18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은 그들 가까이 나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좀더 분명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말씀하시던 음성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된 제자들은 그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모든 의심을 떨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의심하던 그들도 이제는 모두 예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에게 경배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오실 때를 생각해 봅시다. 처음에 제자들은 그가 예수님이신 줄을 몰랐습니다. 유령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서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물위를 걸어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마14:33입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멀리서 보게 될 때, 의심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나타내 보이시며, 제자들이 평소에 익히 들었던 그 음성으로 친히 말씀하실 때,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주시오,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경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엎드려 경배하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에게 주신 권세는 절대적 권세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에게 주어진 권세는 전적인 권세입니다. 그 권세는 모든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절대적이고도 전적인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절대적이고도 전적인 권세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도 사하실 권세가 있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인간세계에서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물위를 걸으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도 잠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연세계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장차 마귀와 그 사자들을 불붙는 유황못으로 던지실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세계, 자연세계, 영적인 세계의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이고도 전적인 권세를 가지신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했던 말, 곧 자기에게 경배했던 천하를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한 말을 참으로 사악하고 거짓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이미 성부 하나님에 의해서 성자 예수님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세에 대한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곧 우리들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아무런 권세도 없는 자가 명령을 하면 그 명령을 받는 사람이 복종을 하겠습니까? 쉽게 무시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시기 위해 먼저 자신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곧 절대적이고도 전적인 권세가 있음을 먼저 밝히신 것입니다.
여러 해 전 김현희는 KAL기를 폭파해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한 사람의 가냘픈 여성이 그 엄청난 짓을 할 수 있었던 동기가 무엇입니까? 그는 김정일 장군이 친필로 자기에게 그 일을 명했다는 사실에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토록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명하시는 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을 살리라고,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일을 하라고 우리를 명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명에 절대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지나가던 배들이 자주 난파를 당하는 아주 위험한 해안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자그마한 집이 하나 서 있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서 세워진 집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사람을 구하기 위한 작은 배 한 척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몇몇 헌신된 구조대원들은 밤낮없이 그 해안을 살피면서, 물에 빠진 사람들이 있으면 자신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뛰어들어 그들을 구조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조를 받았습니다. 구조를 받은 사람들이나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 일을 귀하게 여기고 함께 동참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그 일을 위해 시간도 내고, 물질도 내었습니다. 그 돈으로 새로운 배들을 몇 척 구입했습니다. 전문 인력들도 고용했습니다. 그 결과 해안가에 세워진 인명구조소는 점차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일에 참여하던 몇몇 사람들은 현재의 인명구조소가 너무 작고 볼품이 없는 것에 불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좀더 편한 장소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 안에 좋은 가구들을 들여다 놓았습니다. 이제는 인명구조소가 사람들에게 모임 장소로 인기가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모이는 것을 좋아해서,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조하는 일에는 점차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그 일을 전담할 사람들을 돈주고 고용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배 하나가 해안에서 좌초되었습니다. 고용된 전문 구조요원들이 달려가서 물에 빠진 사람들을 많이 구조해왔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아름답게 장식해 놓은 새 건물은 금방 지저분해졌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인명구조소의 책임자들 몇 명이 대표로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새 건물을 더럽히지 않도록 새 건물 옆에 샤워실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구조를 받은 사람들은 먼저 샤워실에 가서 몸을 깨끗이 씻은 후에, 새 건물로 들어오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러자 얼마 안 가서 인명구조소와 관련된 사람들이 두 편으로 갈라졌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명구조하는 일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은 자기들의 모임과 사교에 방해가 될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그곳에 인명구조소가 세워진 목적은 교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내서 살리는 데 있음을 지적하면서 인명구조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이러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조하는 일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따로 나가서 그들 자신의 새로운 인명구조소를 만들어서 그 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인명구조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따로 나와서 자그마한 새 인명구조소를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새로운 인명구조소도 옛날에 겪었던 그 변화를 똑같이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인명구조소는 하나의 모임장소요, 사교클럽으로 전락해버리고, 또 다시 새로운 인명구조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그 뒤로도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 해안에 가보면, 수많은 건물들이 그곳에 서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나가던 배들은 계속 난파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그런데 그 주변에 인명구조소는 많이 있건만, 인명을 구조하는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물에 빠진 채 그대로 죽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교회가 해야 할 본질적인 사명은 잊어버리고, 그저 자신들끼리만 모이는 일에 만족을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여 우리도 나이아가라 증후군에 따라서 교회가 해야 할 본질적인 사명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일, 곧 전도하는 일임을 잊지 맙시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전도하는 일,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충실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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