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영혼의 평화
시 131
중세기 산중 높은 곳에 위치한 어느 봉쇄 수도원에 이른 아침부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립니다. 사제가 나가보니 무척 피곤에 지쳐 보이는 중년 사내가 아마 밤새 산에 오른 것 같아 문을 열어 주면서 묻습니다. “누구를 찾으시나요?”, “예, 저는 평화를 찾습니다.” 그가 바로 시성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1265-1321)였다고 합니다. 그의 유명한 명작인 신곡(Divine Comedy, La Divina Commedia)은 다음과 같은 서술로 시작합니다. “내 인생의 한 중간 눈을 떠서 보니 나는 바른 길을 벗어나 어두운 숲 속에 있었다” 우리는 신곡을 꼭 단테가 인간 사후 세계를 묘사한 것으로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신곡에서 그가 여행한 지옥과 연옥 그리고 낙원의 체험은 바로 여기 인생의 도상에서 경험하는 삶 그 자체의 묘사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날마다의 길에서도 지옥과 연옥 그리고 낙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오늘은 지옥인가요, 연옥인가요, 낙원인가요? 물론 저는 연옥이라는 사후 세계는 비성경적이라고 믿지만 오늘의 우리의 지금의 영적 상태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인 상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테는 그가 인생의 전반전에 경험한 상처를 끌어안고 평생 평화를 찾아 헤맨 영혼의 순례자였습니다. 두 가지 상처가 그의 평생을 괴롭히지 않았습니까? 하나는 아홉 살 난 소년의 영혼의 창을 사랑으로 물들이고 지나간 소녀 베아트리체, 그녀는 9년 후 한번더 그의 곁을 스치면서 그의 가슴에 사랑의 열병을 앓게 하지만 그녀는 24살에 세상을 떠나가 그의 가슴에 이룰 수 없는 비련의 상처를 남깁니다. 단테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운명이 그를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그의 아름다운 고향 ‘꽃의 도시 피렌체’가 정쟁의 도시가 되면서 그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고향에서 쫓겨나는 사건이었습니다. 고향이 그를 버린 것입니다. 그는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귀향의 꿈을 그리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고향의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한 비평가는 이런 사랑의 상처와 고향의 상처가 단테로 하여금 영원한 순례자가 되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외로운 방랑자 단테는 마침내 그의 영혼의 진정한 평화를 찾기 위해 그이 나이 43세가 되던 해 붓을 들어 무려 13년간에 걸친 신곡의 드라마 그 영혼의 순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책이 완성된 다음해(1321년,56세 되던 해) 그는 베아트리체의 영혼이 인도한 주님의 품안에서 비로소 평화를 발견하고 눈을 감습니다.
오늘의 본문 시편 131편 서두에도 다윗의 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사실 시120편부터 134편까지가 소위 순례자의 노래라고 일컬어지는 시들입니다. 아마도 오늘의 시편은 명절을 맞이하며 순례의 길을 떠난 순례자들이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달하여 그들이 누리게 될 평화를 갈망하며 드리는 믿음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외로운 영혼들이 찾는 참으로 고요한 영혼의 평화-그 비밀의 처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고요한 영혼의 평화가 갈망되십니까? 그러면 이 시편에서 그 비밀을 발견하십시오. 고요한 영혼의 평화를 경험하는 비밀의 처방은 무엇입니까?
1.헛된 욕심을 버리셔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영혼이 평화를 경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일까요? 욕심입니다. 이 측면에서 보면 불교와 기독교의 가르침의 유사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불가의 교훈과의 명백한 차별성은 기독교는 모든 욕심을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주 거룩한 욕심, 선한 욕심 그리고 의로운 욕심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사람들이 새로운 의욕을 갖고 산업을 발전시키고 문화를 꽃피워 온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성경이 이런 우리의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욕심조차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의 욕망이 아무리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것이라 해도 그것이 경계선을 갖지 않으면 우리의 욕심은 너무도 쉽게 거룩한 욕심이 추한 욕심으로, 선한 욕심이 악한 욕심으로, 의로운 욕심이 불의한 욕심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헨리 클라우드(Henry Cloud)와 존 타우센드(John Towsend)라는 기독교 심리학자는 그들이 쓴 매우 중요한 책인 “NO라고 말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의 대화의 기술”(Boundaries)이란 책에서 그리스도인의 지혜롭고 승리로운 삶의 가장 중요한 연습이 바로 ‘경계선 긋기’(to set boundary)라고 지적합니다. 못하는 것을 못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시편기자가 지적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좋은 일이라 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으나 그것이 분명히 거룩한 일이고 좋은 일이었음에도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다윗은 이때 요즘 말로 하면 오버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거절을 하나님의 뜻으로 수용하고 다만 자신의 아들 솔로몬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바로 본문 1절의 마음이 그에게 있었던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그렇습니다. 비전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일까지 하려는 욕심의 사람이 되지는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는 일까지 단순히 자기 명예욕으로 시도하는 욕심-그것이 바로 헛된 욕심의 정체인 것입니다. 단테가 신곡에서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지옥 순례를 시작하자마자 어두운 숲에서 세 마리의 야수를 만나지 않습니까? 표범과 사자와 늑대였습니다. 단테의 평론가들은 이 세 야수는 다름 아닌 색욕과 권력욕 그리고 물질의 탐욕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런 욕심이 바로 우리의 인생을 지옥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약1:14-15말씀을 기억하십시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평화를 원하십니까? 헛된 욕심을 버리십시오.
2.주의 임재로 만족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모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시편기자는 엄마의 품에 안겨 잠든 아기의 모습에서 그런 평화를 찾습니다. 아기가 느끼는 가장 큰 위협은 무엇이겠습니까? 엄마가 곁을 떠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엄마의 젖을 먹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아기가 더 이상 엄마의 젖을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런데도 아기가 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곁에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엄마가 내 곁에 임재하는 한, 엄마가 나의 필요를 엄마의 방법으로 공급할 것을 확신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맡기고 엄마의 품에서 잠들 수 가 있습니다. 빙그레 웃으면서 말입니다. 엄마의 임재가 바로 그의 행복이고 소망이 된 것입니다. 본문 2절을 읽어 보십시오. “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뗀 아이와 같도다”
물론 이렇게 아기가 젖을 떼고도 울지 않고 엄마를 신뢰하게 되는 것도 하나의 배움의 과정인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빨리 배울수록 아기의 영혼은 평안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엄마의 젖이 아니라, 엄마의 존재 그 자체인 것을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엄마라면 이유의 과정을 급격하게 하지 않고 되도록 이 시기에 아가에게 더 많은 스킨십을 제공하고자 할 것입니다. 젖을 떼는 것이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를 잘 받은 아기라면 이제 젖이 없어도 엄마가 여전히 나와 함께하고 그리고 그 엄마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을 믿기에 이제 그 아가는 평안히 잠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꿈꾸면서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아가가 잠꼬대 하며 혹시 웃는 소리를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ㅋ ㅋ ㅋ----난 행복해-엄마가 나와 함께 하기 때문이야”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행복의 고백이 이와 동일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신앙생활하다 보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 주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체험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의 영혼이 참으로 평안하려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닌 주님의 임재가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 하나로 우리가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이 지상에서 육체적으로 제자들의 곁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주신 약속이 무엇이었습니까?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28:20)
3.오늘 지금에 집중해야 합니다.
저는 릭 워렌 목사님의 저서인 “목적이 이끄는 삶”을 통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설정하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여기에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인생은 목적 못지않게 과정도 소중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일의 목적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우리가 미래에 이루게 될 결과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만일 이런 사람들이 그 결과를 이루기 전에 세상을 떠난다면 그의 인생은 실패라고 해야 할까요? 그것은 성경의 통전적인 가르침은 아닙니다. 성경은 내일 못지않게 오늘도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보라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라”(고후6:1)고 가르칩니다. “내일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태6:34)고 가르치십니다. 내일 우리가 성취할 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위해 오늘 우리가 땀 흘려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인하여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기자는 우리가 ‘지금 여기서부터’ 여호와를 바라고 기뻐할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본문 3절입니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오늘 지금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는 사람은 내일도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할 수 있을 것이고 미래에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오늘을 우리는 ‘영원한 오늘’ 혹은 ‘영원한 현재’(eternal now)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지금을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로 알고 기뻐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지금부터 영원까지’(now and forever)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인생을 목적 중심적으로만 혹은 결과 지향적으로 살다보면 오늘의 평화, 오늘의 기쁨, 오늘의 행복을 상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인가 우리 시대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펜스 존슨의 ‘선물’이라는 책을 소개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한 소년과 한 노인입니다. 어린 소년에게 노인은 가장 소중한 선물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 선물만 얻으면 너는 정말 행복한 일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선물이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암시를 주면서 스스로 찾아보라고 말합니다. 소년은 노력은 해보았지만 그 선물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을 흘러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서서히 그 선물 생각을 잊어버립니다. 점차 그에게는 해야 할 일, 처리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인이 되어 직장을 갖게 되고 직장 승진에서 떨어지고 마음대로 되어지지 않는 인생에 대한 불만이 쌓여 가던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노인이 말한 선물 생각을 하게 됩니다. 노인을 다시 찾아가 대화를 시작합니다. 노인은 그때에도 직접적으로 그 선물이 무엇인가를 말해주지 않고 암시만 줍니다. 노인은 성인이 된 소년에게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날들속에 그가 가장 행복했던 때를 기억해 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한 순간 소년은 그 선물의 정체를 깨닫습니다. 그 선물은 오늘 이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영어로는 선물 곧 present 라는 말이 현재 바로 이 순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무엇을 하든 우리가 의미있게 생각하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여 몰두하는 현존의 행복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그를 예배하는 감격을 즐기고 계신가요? 아니 이 순간 아직도 살아서 내가 호흡하는 행복을 느끼며 심호흡을 하고 계신가요? 아니 이 순간의 나의 현존이 바로 은총인 것을 느끼고 계신가요? 아니 나 같은 인생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주께서 나의 주인이 되셔서 내가 오늘 이 순간 그의 품에 안겨 사는 행복을 느끼고 계신가요?
저는 오늘의 메시지를 단테의 신곡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신곡에 보면 단테의 지옥과 천국 여행에 두 안내자가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스승 베르길리우스입니다. 그의 안내로 지옥을 순례합니다. 한 기독교 평론가는 그가 바로 율법의 상징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의 종말은 지옥입니다. 우리는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했고 하지 말 것을 해버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율법을 깨트린 죄인이 되었고 당연히 죄의 값은 죽음이고 지옥입니다. 단테는 그의 스승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것이 율법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단테는 마지막 그의 순례의 여정에서 뜻 밖에도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연인 베아트리체를 만납니다. 이 여인이야 말로 은혜의 상징이요 그리스도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녀는 빛이었고 사랑이었습니다. 그녀의 안내로 하늘을 날고 천국에 적응하면서 마침내 그는 이렇게 그의 영원한 사랑을 만난 소감을 피력합니다. “나는 행복했다. 나는 모든 것 속에 있었다. 내가 그 안에 그가 내안에 있었다. 나는 자유였다. 나는 참으로 완벽하게 고요한 영혼의 평화를 맛보고 있었다. 그것은 영원한 평화의 시작이었다.” 순례자 단테는 정욕의 추구로도 도덕으로도 정치로도 찾지 못한 그 고요한 영혼의 평화를 마침내 그리스도안에서 찾은 것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베아트리체와 결혼하지 못했어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어도 비극의 주인공일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가 쓴 책의 제목처럼 이제는 ‘거룩한 희극’(Divine 'Comedy'-tragedy의 반대라는 의미로)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천국이 그의 영혼에 임한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체험한 때문입니다. 오늘 그 고요한 영혼의 평화를 선물로 받으시지 않겠습니까? 이동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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