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베드로전서 2:4-9(개역개정)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보배로운 산돌이십니다. 본문 6-8절을 보면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불신자들에게는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여기고 버린 돌처럼 쓸모없는 분으로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불신자들에게는 부딪치는 돌이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와 같습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들에게는 보배로운 모퉁이 돌이십니다. 성경시대에 건축을 할 때 가장 중요한 돌이 모퉁이 돌입니다. 그 돌은 건물의 기초석이며 다른 돌들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돌입니다.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신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5절에 보니 믿는 사람은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됩니다. 9절에 보니 믿는 사람들에게 4가지 신분이 주어집니다. 첫째, 택하신 족속이요. 둘째,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셋째, 거룩한 나라요. 넷째,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 됩니다. 오늘 설교는 그 중에서 거룩한 제사장, 왕 같은 제사장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산돌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제사장에게 중요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늘 성결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출 28:36을 보면 제사장이 쓰는 관이 나옵니다. 관에 순금으로 만들 패를 붙입니다. 그 패에는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겼습니다. 그만큼 제사장은 성결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생각이 성결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생각대로 됩니다. 잠 23:7을 보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이 나의 인격을 말해주고, 나의 가치를 말해주고, 나의 미래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 중요합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이 제사를 집례 하는 일이기 때문에 제사장은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생활이 제사장의 생활입니다. 셋째, 무슨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제물 없는 제사가 있습니까? 성경 어디를 봐도 제물 없는 제사는 없습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드렸고 가인은 곡식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편에 따라서 소를 드리기도 했고 양이나 염소를 드렸습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를 드릴 형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집에서 키우는 비둘기를 드리기도 했고 그것도 없으면 산 비둘기를 잡아서 드렸습니다. 곡식이나 구운 가루로 드리기도 했습니다. 사 43:22-24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괴롭게 했고 하나님을 수고롭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수고롭게 한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제물을 드리지 않은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이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괴로워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설교는 제사장에게 중요한 것 중에서 무슨 제물을 드려야 하는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슨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드려야 할까요? 우리가 드려야 할 제물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몸이 제물이다. 롬 12:1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의 몸이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제물입니다. 그렇다면 몸을 제물로 드린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몸이 원하는 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몸이 원하는 일을 하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몸이 가고 싶은 곳에 가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가는 것입니다. 몸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9:27에서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표현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몸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하는 생활이 몸이 제물이 되는 생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그 뜻에 몸을 쳐서 복종시키며 몸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지 않겠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뜻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에 우리의 몸을 복종 시켜야 합니다. 몸이 원하지 않을 때는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계시며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몸이 제물이 된다는 말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을 때 내 생각을 내려놓고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은 영의 부담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거듭난 사람의 영에 오셔서 거하십니다. 고전 6:17입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주님을 영접하면 그 사람의 영은 주와 한 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거듭난 영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잠 20:27을 보면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에 등불을 켜주셔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보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으로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려면 육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의 부담감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사람이 선택하는 것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성경으로 답을 찾으면 가장 좋습니다. 성경으로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성경으로 답을 찾을 수도 없고 성령님의 음성도 들리지 않는다면 심령의 부담감을 살피십시오.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신호등입니다. 파란불이 들어오면 하고 빨간불이 들어오면 멈춰야 합니다. 성경으로도, 성령님의 음성으로도 그리고 심령의 부담감으로도 답을 찾을 수 없으면 하나님의 사람을 따라가십시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사람을 따라가면 내 몸을 제물로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편에 서있던 여호수아와 갈렙보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편에 서있던 10명의 정탐꾼을 따라가다가 망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편에 서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따르기를 바랍니다.
2. 찬송이 제물이다. 히 13:15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여러분! 찬송하기를 즐겨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생활을 제물로 받으십니다. 욥은 찬송의 제물을 잘 드렸던 사람입니다. 욥은 시험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욥 1장에 보면 욥의 종들이 4번이나 차례대로 와서 욥에게 불행한 보고를 했습니다. 첫 번째 사환은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 보고를 하고 있는데 두 번째 사람이 왔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세 번째 사람이 왔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또 한 종이 왔습니다. 네 번째 종의 보고는 앞에서 보고한 세 사람의 보고보다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욥의 자녀들이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쳤답니다. 토네이도가 집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집이 욥의 자녀들 위에 무너져서 다 죽었다는 보고입니다. 욥은 아들 일곱에 딸이 셋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10명이 다 죽었다는 보고입니다. 이런 충격적인 보고를 받고 욥은 원망하며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욥 1:21입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찬송은 의무입니다. 사 43:21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만드신 목적 중에 하나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찬송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까? 호흡이 있는 동안은 언제라도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시 150:6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우리는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찬송해야 합니다. 찬송은 능력입니다. 시 149:6입니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여기서는 두 가지 영적인 무기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찬송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찬송에 능력이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찬송할 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시 22:3에 보면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찬송을 드릴 때 임재하십니다. 그래서 찬송할 때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루에 7번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가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사울에게 역사하는 악령이 떠나가게 하셨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송하고 기도할 때 옥이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사는 거문고 타는 자를 불러서 거문고를 타며 하나님을 찬송할 때 예언이 임했습니다. 찬송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3. 헌금이 제물이다. 빌 4:18입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이 보낸 선교헌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낸 헌금 때문에 자신이 풍족하다고 말합니다. 빌립보 교우들이 보낸 헌금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헌금에 관한 말씀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하셔서 우리들의 도움이 필요해서 헌금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주인이신데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들에게 헌금을 요구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헌금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받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돈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 6:21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주님은 헌금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헌금은 크게 4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의무적인 헌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릴 때 의무적으로 제물을 드렸던 것처럼 의무적인 헌금이 있습니다. 십일조와 첫 열매가 대표적인 의무적인 헌금입니다. 의무적인 헌금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잠 3:9,10에서는 첫 열매에 대한 말씀을 합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10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말 3:10에서는 십일조에 관한 말씀을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첫 열매와 십일조는 제물의 복이 약속되어 있으며 또한 의무적인 헌금입니다. 그런데 말라기 3장을 보면 놀라운 진리를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말 3:7-9은 이런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도 드리고 나름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떠나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의 것을 도적질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했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일이랍니다. 이스라엘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했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십일조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를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는 율법이다. 지금은 복음 시대이니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 또 십일조는 구약시대에 주신 계명이지 신약시대에는 십일조 계명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을 잘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모세 시대에 시내산에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십일조는 모세가 태어나기도 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영원한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 또 야곱도 벧엘에서 잠을 자다가 하나님을 만난 후에 십일조를 서원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도 십일조를 말씀하셨습니다. 마 23:23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아주 지극히 작은 것까지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이것도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입니다. 아주 작은 것 까지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저것도는 그들이 버렸던 정의와 긍휼과 믿음입니다. 십일조는 율법 이전에도 있었고 신약성경에도 있습니다. 둘째, 감동하여 드리는 헌금이 있습니다. 출 35:21입니다.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 건축을 위하여 예물을 드리는 내용입니다. 그들이 예물을 드릴 때 먼저 마음에 감동이 된 자들이 드렸습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에서 감동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들을 감동하셔서 성경을 쓰게 하셨기 때문에 감동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사람들을 감동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8월에 러시아에 기도여행을 갑니다. 이 사역은 하나님께서 제게 감동하신 사역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부르시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감동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북한과 러시아에 영적인 지각변동이 일어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것처럼 감동을 주셔서 헌금도 하게 하십니다. 셋째, 작정하고 드리는 헌금이 있습니다. 고후 9:7에서는 헌금에 관하여 말씀하시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하는 헌금이 작정하여 드리는 헌금입니다. 우리교회에서는 대표적으로 주정헌금이겠지요. 요즘은 가정감사헌금을 드리는 분들이 좀 있는데 그것도 작정헌금이겠지요. 1천번제도 작정헌금이겠지요. 교회 건축이나 자동차 구입 등을 위하여 작정하고 헌금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희 가정은 교회 자동차를 구입 할 때 1,200만원을 작정하고 매달 100만원씩 드리다가 중간 쯤 가서는 매달 50만원씩 헌금을 해서 작정한 금액을 다 채웠습니다. 작정 헌금을 하다보면 생활이 쪼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인색한 마음이 들 수 있는데 작정을 했다면 좀 불편하겠지만 생활비를 줄여서라도 작정을 채워야 합니다. 넷째, 자원하는 헌금이 있습니다. 출 35:21에 보니 성막을 세울 때 헌금은 첫째로 감동 된 자들이 했습니다. 그리고 감동은 받지 않았지만 자원하여 하는 자들이 드렸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역 때문에 헌금을 하는데 의무가 아니고 감동도 받지 않았지만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원해서 드릴 수도 있습니다. 고후 8:2,3에 보면 마게도냐 성도들은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넘치는 기쁨이 있었고 풍성한 헌금을 드렸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헌금생활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마게도냐 성도들은 힘대로 할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헌금을 드렸습니다. 제사장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이 제물입니다. 헌금은 의무적으로 드려야 할 것이 있고, 감동을 따라 드리는 것이 있고, 의무나 감동은 아니지만 작정하고 드리거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4. 이방인이 제물이다. 롬 15:16입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제사장입니다. 우리가 불신자를 주님에게로 인도하면 그것이 이방인을 주님에게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하여 영혼을 구원하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전도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전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 전도합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전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 죽어버린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 아닙니까. 그래서 전도는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면 전도합시다. 교회는 결국 전도를 통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면 전도합시다. 전도는 전도대상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입니다. 천만금을 줘도 그가 죽은 후에 지옥에 간다면 그 사람은 너무나 부족한 사랑입니다. 금과 은은 줄 수 없어도 복음을 주고 영생을 준다면 그것보다 큰 사랑이 없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면 전도합시다. 친구를 사랑하면 전도합시다. 이웃을 사랑하면 전도합시다. 전도는 성령의 강권입니다. 행 1:8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방향성을 가지고 역사하십니다. 그 중에 하나가 전도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전도의 부담감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전도의 방향성을 가지고 역사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성공과 실패는 성령님과의 친밀함으로 결정됩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 성공하는 것이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하나님께는 예배라는 방향성으로 역사를 하시고, 우리 자신에게는 거룩함이라는 방향성으로 역사를 하시고, 이웃에게는 전도와 섬김이라는 방향성으로 역사를 하십니다. 인생을 평안하게 살려면 성령을 거역하면 안 됩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야 평안합니다. 물살을 거슬러 수영하려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물살 따라 수영을 하면 수영이 쉬워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을 거슬러 살려고 하면 인생이 힘들게 됩니다. 성령님의 흐름을 따라 살려고 하면 인생이 수월해집니다. 성령님은 전도라는 방향으로 역사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전도하는 생활을 하면 성령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는 최고의 상급입니다. 단 12:3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이 땅에서 전도를 많이 하면 하늘에서는 스타가 됩니다. 빛이 납니다. 영광을 얻게 됩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천국에서 받는 상급은 이 땅에서 행한 대로 받습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하늘의 상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전도가 최고의 상입니다. 전도에 힘을 써서 천국 가서 많은 상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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