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창세기 6:14-17(개역개정)
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16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그림자를 따라가면 그 그림자의 실체가 나옵니다. 그림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실체를 대략적으로 알게 해줍니다. 그림자를 보면 그 실체가 사람인지 개인지 닭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림자를 보면 실체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림자를 보면 실체인 사람이 키가 큰지 작은지 뚱뚱한지 날씬하지를 대략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체입니다. 구약은 많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이고 중요한 그림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구약의 그림자가 보여주는 신약의 실체 중에 아주 중요한 주제가 교회에 관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교회생활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에 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여러분! 지난 주일에 들은 말씀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네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하나님의 집이고,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설교도 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그림자를 통해서 신약의 교회를 보려고 합니다. 대표적인 교회의 그림자 3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방주 구약이 보여주는 첫 번째 교회의 그림자는 방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만드시고 복을 주셨지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사람들은 점점 더 하나님을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사람들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실 정도로 사람들은 죄악에 깊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쓸어버리시고 거룩한 씨를 남기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에게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에게 홍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대홍수 이전에 지구는 뺑 돌아서 이불처럼 물로 덮여있었습니다. 그 물이 모든 외부의 유해파를 차단했습니다. 그리고 지구의 온도를 일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 지구는 아열대 온대로 1년 내내 따듯했고 땅은 풍요로웠습니다. 엄청난 식물의 소출과 함께 공룡 같은 어마어마하게 큰 짐승들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홍수로 하늘의 창을 여셨습니다. 물층이 깨어지고 유해파는 급격히 증가되고 기후는 심하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수명도 홍수를 기점으로 해서 120세로 뚝 떨어지고, 소출도 줄어들었습니다. 하늘의 창이 열리고 40일간 비가 쏟아졌습니다. 제일 높은 산꼭대기로부터 7m 높이에까지 물이 차서 150일간 창일했습니다. 그 당시 지구상에 살던 사람들은 노아의 8식구를 제외하고는 몽땅 심판을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있었다는 증거가 세계 도처에 270가지나 됩니다. 산꼭대기에서 바다의 큰 물고기 화석이 나옵니다. 어떻게 산꼭대기에서 물고기 화석이 나옵니까? 노아 홍수 때는 바다, 강, 저수지 경계선이 없이 바닷물이 온 지구를 덮었습니다. 그래서 바다의 물고기 화석이 산꼭대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콜롬비아를 순방 중이신데요. 콜롬비아 수도는 보고타입니다. 보고타는 해발 2,600m의 고지대에 있습니다. 보고타에서 1시간 거리에 가면 ‘찌빠끼라’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제가 그 마을에 다녀왔습니다. 그 마을에는 소금산이 있습니다. 보고타 시민들은 그 산에서 소금을 캐서 먹었다고 합니다. 신기하죠. 그 높은 곳에 소금산이라니요. 놀랍지 않습니까. 그 소금산도 대홍수의 증거 중에 하나입니다. 방주를 통해서 교회를 보여주는 그림자 몇 가지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방주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홍수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그 당시 홍수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방주 안에 들어가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노아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세상은 결국 불로서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는 물로 멸망을 당했지만 마지막 때에는 불로서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지만 감사하게도 피할 길을 주셨습니다.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방주에 올라탄 사람들은 이 세상이 불로서 심판을 받을 때 심판을 이기게 됩니다. 그런데 구원의 길은 많지 않습니다. 유일한 길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는 이와 관련된 주님의 선포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노아 시대에 구원 받는 길은 방주에 들어가는 방법 외에는 없었던 것처럼 이 시대에 멸망 받을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둘째, 방주는 하나님이 설계하셨지만 방주를 짓는 일은 노아에게 맡기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120년 동안 방주를 준비했습니다. 그가 수고하지 않았다면 방주는 세워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창 6:15에 보면 노아가 만든 방주는 그 길이가 삼백 규빗입니다. 대략 150m 정도의 길이입니다. 축구장 보다 더 길었습니다. 너비는 오십 규빗입니다. 25m 넓이입니다. 높이는 삼십 규빗입니다. 15m 높이입니다. 배수량이 2만 톤이고 용적량이 1만4천 톤이었습니다. 가축 운반용 열차 522대 분입니다. 엄청난 규모입니다. 노아는 배 만드는 기술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잣나무로 만들고 그 안팎을 역청으로 발랐습니다. 삼층의 방주가 약 4만 5천 마리의 동물이 들어가도 찌그러지지도 않았습니다. 377일간 물 위에 둥둥 떠 있어도 물 한 방울 새지 않는, 견고한 구원의 방주가 되었습니다. 방주는 노아가 수고해서 만들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교회를 세우는 수고는 믿는 우리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수고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들이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기를 원하십니다. 방주를 만드는 일에 노아만 수고 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의 가족들 모두가 노아의 수고에 동참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목사 혼자 수고해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돌아보고 교회를 위하여 헌신할 때 교회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것입니다. 셋째, 방주는 키도 없고 돛도 없고 노도 없었습니다. 방주에는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도구도 속력을 낼 수 있는 그 어떤 도구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방주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방주를 터키의 아라랏산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교회의 방향과 속도는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결정을 받아드리면 됩니다. 방향과 속도를 하나님이 결정하시기 때문에 교회 생활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조급한 사람들은 이 기다림이 답답합니다. 노아는 방주 속에서 377일을 있었습니다. 그는 377일 동안 바깥세상을 볼 수도 없었고 방주의 방향과 속도도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으면 답답해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때 노아에게 필요했던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과 기다리는 인내였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비전교회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하시고 아라랏산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때로는 답답할 때도 있고 힘이 빠질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인내하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넷째, 방주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외부는 오직 하늘이었습니다. 방주의 높이는 30규빗입니다. 그런데 창은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었습니다. 그러니까 15m 높이의 방주에 창을 내는데 높이 14.5의 꼭대기에 냈던 것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하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신앙생활은 하늘을 봐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위의 것을 찾는 생활입니다. 성경 골 3:1,2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신앙생활은 초점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 어디에 집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에 초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돋보기로 종이를 태워봤습니까? 우리 어릴 때는 그런 놀이를 자주 했는데 요즘은 아이들이 그런 놀이하는 것을 못 봤습니다. 돋보기로 태양의 빛을 종이에 집중해서 초점을 맞추면 그 종이에서 열이 나고 불이 붙고 연기가 나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태양 빛이 뜨겁게 내리쬐고 그 빛 아래에서 돋보기를 들고 있어도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불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불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불, 기도의 불, 예배의 불, 은혜의 불, 능력의 불이 있어야 하는데 불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초점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믿는 우리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까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육신이 아니라 영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땅이 아니라 하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2. 성막 구약이 보여주는 두 번째 교회의 그림자는 성막입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장소로 만들었던 이동식 성전입니다. 성막은 크게 3개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성막의 뜰과 성소와 지성소입니다. 성막의 문을 통과하면 성막의 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오른쪽에는 떡상이 있고 왼쪽에는 등대가 있고 앞쪽에는 분향단이 있습니다.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있습니다. 휘장을 통과하면 지성소인데 이 지성소에 하나님이 임재 하셨습니다.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습니다. 법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있었습니다. 법궤의 뚜껑은 시은좌, 시은소, 속죄소라고 하는데 금으로 만든 두 천사 모형이 마주보고 날개를 펴서 맞대고 앉아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셨습니다. 성막을 통해서 보여주는 교회의 그림자 몇 가지를 살펴봅니다. 첫째, 성막을 세울 때 백성들은 자원해서 헌신했습니다. 성막에는 엄청난 양의 금과 은과 보석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모든 것을 자원하여 헌금했습니다. 출 35:21을 보겠습니다.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 오연호씨가 쓴 [한국이 미국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이 한국에서 잘못한 것들을 취재하여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미국을 좀 더 알아야 하겠다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러나 오연호는 미국 현지에서 중요한 것들을 깨닫습니다. 소련도 망하고 사회주의도 망하였는데 미국이 호황을 누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연구한 결과가 바로 그 책입니다. 오작가는 결론적으로 미국은 발런티어(volunteer)정신이 있기 때문에 망하지 않았다고 강조합니다. ‘발런티어’는 자원봉사자를 의미합니다. 미국인이라면 일주일에 몇 시간, 한 달의 며칠은 자원 봉사를 해야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안 하면 사람 구실을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일 년에 4천만 명이 자원봉사에 나선다고 합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무엇을 하여도 봉사하는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이것이 미국이 강대국이 되는 이유입니다. 교회는 자원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목사는 강요하고 교인들은 인색하면 교회가 아름답지 못하고 하나님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힘 있는 교회는 자원하여 섬기는 교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할 때 안 하려고 빼지 말고 기꺼이 자원하여 동참하십시오. 하나님은 자원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둘째,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막의 기구나 성막에서 드려지는 제물이나 성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이나 성막에서 제사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교회를 짓고, 수만 명이 모이는 예배당에서 기가 막힌 프로그램에 의해서 예배를 드리고 엄청난 헌금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교회는 마치 영혼이 없는 몸과 같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은 다른 말로 하면 시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게시지 않으면 시체입니다. 사람이 잘 생겼고 몸매도 조각품처럼 아름다워 누가 보더라도 반할 정도의 외모라고 하더라도 죽어서 시체가 되면 관에 넣고 뚜껑을 닫아버립니다. 장례식을 해도 3일입니다. 길게 해야 5일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몸이라 하더라도 죽으면 같이 살 수 없습니다. 화장을 해서 재로 만들든지 땅을 파고 매장을 해버립니다. 매장을 하면 다시는 땅 속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달구질을 해버립니다. 그리고 봉분을 만듭니다. 시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도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매장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셋째,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광야 생활하면서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약2,000명 되는 천부장 회의에서 떠날 날짜를 다수결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12명의 족장회의에서 타협을 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과 함께 움직였습니다. 성막이 이동하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움직였고 성막이 멈추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멈추었습니다. 성막에는 구름이 피어올랐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이었고 밤에는 불이 구름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불기둥이었습니다. 성막을 덮고 있는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움직였습니다. 구름 기둥이 멈추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멈추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성막의 인도를 받은 것입니다. 성막시대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역사는 오늘날 성령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이 시대의 교회를 성령으로 인도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인 증거입니다. 롬 8:14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아멘 넷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생활할 때 성막 중심의 생활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동시에는 성막을 중심으로 앞에 여섯 지파 뒤에 여섯 지파가 대열을 맞춰서 이동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지역에 머무르게 되면 동서남북으로 각각 세 지파씩 머물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교회가 내 집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교회를 가까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곧 교회생활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가까이 하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고 교회를 멀리하면 하나님과도 멀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기도 많이 해주세요. 우리가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교회를 더욱 견고하게 세워나가실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돈 많은 사람도 없습니다. 튼튼한 중소기업 사장님 한 명 없잖아요. 또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고위공무원도 없고 국회위원이나 장관 한 명도 없고 심지어 시의원 구위원도 한 명 없잖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를 위하여 기도해주시고 부족한 저를 위해서 늘 기도해주시고 성도들을 위해서 서로 기도해주시면 하나님이 도우실 줄로 믿습니다. 강동구 변두리에 가면 크지 않은 조그마한 예배당이 하나 있습니다. 오래전 그 언덕 밑에 천막촌들이 있었는데 그곳에 조그마한 예배당이 하나 있었습니다. 모두 서울시 땅이었습니다. 거기에 아파트촌이 건설되니 철거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주민들이 다 떠나가고 이사를 갔습니다. 갈 곳이 없는 교회가 마지막까지 남아서 예배드리는데 철거반들이 와서 못질해 버렸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모두 끌어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났는 줄 알고 포클레인이 와서 뚜껑은 집어 치워버리고 푹 찍어서 트럭에 옮기려다 보니까 머리가 하얀 할머니 한분이 허리가 딱 잘려진 채로 모래 속에 파묻혀서 들려왔습니다.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하나님 예배당 무너진다고 그래요. 여기 예배당 서게 해달라고 목사님이 울면서 기도했어요. 우리는 어디로 가요. 우리 교인들은 어디로 가요. 여기 크지 않지만 작은 예배당 짓게 해 주세요” 울며 기도하고 혼자 예배당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포크레인 기사는 ‘머리가 하얀 할머니 허리가 잘렸구나’ 생각하고 쓰러져서 기절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할머니는 허리가 잘려진 것이 아니고 모래위에서 기도하다가 포크레인이 푹 찍으니까 허리가 모래 밑에 파묻힌 채, 기도하는 자세로 딸려 올라온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적인 문제가 될 것 같으니까 그곳을 예배당으로 불하했고 그곳에 예배당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 교회에 여러 사람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가장 연약하다고 할 수 있는 할머니를 사용해서 교회를 지켜주셨고 예배당이 건축되게 하셨습니다. 교회 중심으로 사시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3. 군대 구약이 보여주는 세 번째 교회의 그림자는 군대입니다. 출 12:41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내용을 기록하는데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는데 여호와의 군대가 나왔다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군인들입니다. 군대를 통해서 보여주는 교회의 그림자 몇 가지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군대에는 대장이 있습니다. 군대에는 무슨 조직이든지 장이 있습니다. 분대에는 분대장이 있고, 소대에는 소대장이 있습니다. 대대에는 대대장, 연대에는 연대장, 사단에는 사단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에도 대장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둘째,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은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를 했던 것입니다. 며칠 전에 휘트니스 클럽에서 운동을 하면서 디스커버리TV에서 하는 군대에서 가장 위험한 보직과 관련된 방송을 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다 본 것은 아닙니다. 제가 보는 동안에 위험한 보직 4가지가 나왔습니다. 하나는 화생방요원입니다. 신경가스 같은 것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가스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겠는데 어떤 가스는 방독면도 뚫고 들어온다고 합니다. 공군소방병들도 아주 위험한 보직입니다. 불도 위험하지만 더 위험한 것은 전투기에 불이 붙었을 때 폭탄이 폭발하면 생명을 잃는 것은 순간입니다. 폭발물 제거병은 당연히 위험스러운 보직이고요. 트럭 운전병들도 아주 위험스러운 보직이랍니다. 전쟁 중에 아군에게 식량과 보급품을 전달해야 하는데 비행기나 헬기가 갈 수 없는 곳에는 트럭으로 전달을 해야 합니다. 보급품을 실고 이동하는 트럭은 적들의 표적이 되기 때문에 아주 위험하다고 합니다. 군대에서는 아무리 위험해도 보직 발령이 나면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기 때문입니다. 전투 중에 “공격 앞으로”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군인은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공격 앞으로” 명령이 떨어졌는데 뒤로 물러나면 현장에서 총살을 시킬 수 있는 것이 군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명령 따라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의 군인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군대에는 적이 있습니다. 군대에는 적이 있는데 우리 그리스도인의 대적은 마귀입니다. 적이 누군인지 헷갈리면 안 됩니다. 요즘 대한민국에는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냐 아니냐를 놓고 갈등이 있습니다. 저는 북한 주민은 우리의 형제이지만 북한 정권은 우리의 적이라고 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적이 누구인지 잘 파악을 못하고 엉뚱한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정부를 적으로 생각하는 교인도 있습니다. 또 어떤 단체와 그 단체에 속한 사람들을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사람이나 단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나 그 단체를 통해서 역사하는 마귀가 대적입니다. 넷째, 군인에게는 계속해서 훈련이 있습니다. 저는 논산 훈련소로 입대를 했습니다. 4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수도방위사령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2주간이지만 논산 훈련소와 비교가 되지 않는 강력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대에 배치를 받은 후에는 1주일 동안 돌격훈련이라는 이름의 강력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앞에서 받은 4주 훈련이나 2주 훈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훈련이었습니다. 어느 병사는 그 훈련이 끝나면 군대생활에서 훈련은 끝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해마다 유격훈련이 있습니다. 동절기 훈련이 있습니다. 수방사는 수도권에 있기 때문에 폭동진압훈련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훈련이 있습니다. 군대는 입대해서 전역 할 때까지 계속해서 훈련을 받습니다. 금요일 저녁 심야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다보니 송파 파크데일 아파트 단지 앞에 피자를 굽는 자동차가 있었습니다. 저희는 6천 원짜리 피자를 샀습니다. 집에서 아이들과 피자를 먹으면서 TV에서 하는 군대 체험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혹한기 훈련인 것 같은데 마지막 코스가 영하 26도의 추위에 얼음물 속에 들어가는 훈련이었습니다. 왜 군대에서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훈련을 시킬까요? 당연히 강한 군인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훈련 시에 흘린 땀 한 방울은 전투 시에 피 한방을과 같습니다. 훈련을 잘 받은 병사가 전투력이 강해지고 전쟁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계속해서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계속해서 훈련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훈련이 있습니다. 훈련은 고통이 따릅니다. 훈련생은 언제나 괴롭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이 늘 천국 같으면 좋겠지요. 그것이 우리의 바람 아닙니까? 하지만 신앙생활은 고난이 따르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고난이 있습니까? 천국 가기 전까지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고난을 받아드려야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시 119:67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이 유익입니다. 시 119:71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는 훈련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훈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강력한 군사가 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을 때는 훈련이 잘 되지 않은 병사들도 전체에 묻혀서 훈련을 끝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훈련은 목적하는 바를 달성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적당히 훈련하다가 시간이나 때우는 식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그 목적이 성취될 때까지 훈련시키고 또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서 중대원들과 소대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습니다. 우리 소대는 제가 가르쳐서 100% 유단자가 되었습니다. 소대장님이 그것으로 주제 발표를 해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그때 제가 가르치던 교수 방법은 반복교육이었습니다. 자세가 될 때까지 붙잡고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제 후배들 중에는 저에게 질린 사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세가 나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과 인격을 훈련하시는데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이 찾아오면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표에 이르도록 하나님께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치 있게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그가 가진 능력과 위치에 상관없이 누구나 귀한 존재입니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고 구원을 해주셨으니 더욱 가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고 같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얼마나 훈련 되었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중국 오지에 가면 거위과에 속하는 다마구찌라고 하는 훈련된 고기잡이 새가 있습니다. 다마구찌 한 마리면 두 세 가족이 먹고 살고도 남을 수 있는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잘 훈련된 다마구찌 한 마리의 값은 황소 한 마리보다도 비쌉니다. 그러나 훈련받지 못한 야생 다마구찌는 거위 값도 받지 못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원석과 같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잘 연마된 보석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잘 훈련된 그리스도인들은 면류관의 보석처럼 귀한 사람들입니다. 힘든 일들이 있습니까? 사람 때문에 힘듭니까? 물질 때문에 힘듭니까? 건강문제 때문에 힘이 듭니까?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훈련을 하십시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변화되십시오. 면류관의 보석처럼 존귀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훈련 받는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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