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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귀를 걷어차지 말라/민22:21~35/ 2000년 1월 23일 설교

 

나귀를 걷어차지 말라

민수기22:21~35

2000년1월 23일 설교

22:21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귀족들과 함께 행하니

22:22 그가 행함을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타고 그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22:23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떠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 하니

22:24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22:25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 하니

22:26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선지라

22:27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의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지라

22:28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22:29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22:30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

22:31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22:32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22:33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22:34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22:35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이르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발람이 발락의 귀족들과 함께 가니라


설교:

여러분은 하던 일이 자꾸 막히고 뜻대로 잘 안될 때 어떻게 하십니까? 예를 들어서 하던 사업이 자꾸 꼬이고 어려움을 겪을 뿐 아니라 왠지 모르게 잘 안 돌아 갈 때 어떻게 처신을 합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의 대처방법을 몇 가지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돌진형이 있습니다. 이 종류 사람은 원인분석을 하지 못하고 계속 밀어붙이는 형입니다. 

2. 반성형이 있습니다. 이 형태는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깊이 돌아보는 형입니다.

마지막으로

3. 핑계형입니다. 이 형태는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환경 탓이라고 단정하고 책임을 넘기는 형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마도 이 세 종류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챤의 형태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둘째일 것 같으나 실상은 한 단계 뛰어 넘어야 하는데 그것이 저는 “경건형”이라고 합니다. 문제가 생기고 길이 막히면 무조건 기도하고 말씀으로 돌아가서 해결책을 찾으려 하는 형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전 모압 평지에서 오래 동안 기거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그 모압 땅에 들어올 때 그들을 반갑게 맞이할 수 없었던 족속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압 족속입니다. 그 모압의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의 이름은 발락이란 왕이었습니다. 그 발락 왕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인들을 무섭게 몰살시킨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군사력으로는 안 될 것 같고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한 가지 계책을 만들었습니다. 그 계책은 다름 아니라 당대에 유명한 선지자였던 “발람”을 불러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발락은 복비를 많이 부쳐서 사람들을 보내어 발람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발람은 한마디로 거절을 한 것이 아니고 하루저녁 기도해보겠다는 것입니다. 기도해보니 하나님이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12절) 결국 다음날 아침 일어나 거절하자 돌아갑니다.

그러나 발락은 포기치 않고 또 더 신분이 높은 귀족을 보내어 요청합니다. 그때도 발람은 그 요청을 한마디로 거절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겠다며 기다리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 발람의 마음이 이미 탐욕에 사로잡힌 것을 아시고 가라고 조건부로 허용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왜 발람은 그토록 발락에게 가려했을까요? 오직 한 가지 “눈앞의 탐심 때문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 말씀은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 몇 가지를 본문을 통해 찾아보겠습니다.


1. 욕심이 가득하면 하나님의 뜻을 내 뜻대로 만들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합니다.

발람은 발락 왕이 부탁한 것이 자신의 직분으로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일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겠다는 것은 물질에 대한 탐심과 영화에 대한 명예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안되는 줄 알면서도 우리는 미련이 많이 쉽게 포기치 못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사실 기도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미련을 갖고 기도해 보겠다는 것은 실상은 탐심과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이 발람의 경우가 없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이 주시는 직분을 거절하는 것일까요? 왜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뜻, 기도 해보나마나 인 것을 가지고 미련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손해 안 보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내 일신의 평안, 명예, 사리사욕, 이것이 있기에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갑니다.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합니다. 노골적으로 말할까요? 가지 말아야 할 술집에 갑니다. 떼먹지 말아야 할 십일조를 떼먹습니다. 지켜야 할 주일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 배경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요? 겉으로는 이 핑계 저 핑계 댑니다. 아직 때가 안돼서,,, 아직 남편이 안 믿어서... 아직 능력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그러나 엄격히 따져보면 욕심과 탐심 때문입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그 욕심과 탐심이 나를 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초대교회 모습이 등장합니다. 모두들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살아가고 교회는 부흥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젊은 부부가 처참하게 죽음을 당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왜요? 탐심으로 명예를 얻고자 거짓말 한 죄 때문에 무서운 심판을 받습니다. 회개의 기회도 주었지만 그 기회를 잃고 끝까지 거짓말을 하다가 죽습니다.  이것 또한  탐심의 무서운 결과입니다.


두번째 교훈

2. 영의 눈이 어두우면 나를 살리려는 나귀를 걷어 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발람은 탐심이라는 것 때문에 이미 영안을 잃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허락했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귀족들과 함께 갑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 길을 막으려고 나타났습니다.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을 막습니다. 그런데 발람을 태우고 가는 나귀는 그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는데 발람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귀도 보는 천사를 하나님의 종은 못보고 있습니다. 결국 애매한 나귀만 매를 맞습니다. 나귀가 길을 이탈합니다. 그대로 가다가는 자기 주인이 죽겠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발람은 “이놈의 나귀가 미쳤나” 하면서 채찍질합니다. 그러다 좌우에 담이 막힌 좁을 길로 들어섰습니다. 나귀가 담벼락에 비벼대니 발람의 발이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자 막 채찍질하며 나귀 배를 걷어찹니다. 그래도 나귀는 그 여호와의 사자를 피하려고 하는데 이젠 피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귀가 엎드립니다. 이제 발람이 열이 날대로 났습니다. 이제는 지팡이로 나귀를 내려칩니다. “야! 너 죽고 싶어 환장했냐?”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은 안 되었으나 아마도 그러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나귀 입을 열어 말하게 합니다. 28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그러자 발람이 큰소리칩니다. “네가 나를 거역한 연고니 내손에 칼이 있었으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성도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솔직히 발람이 나귀를 향해 한 말은 누가 들어야 할 말입니까? “너 죽고 싶어 환장했냐?” 이 말은 발람이 자신에게 해야 할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것도 모르고 나귀를 향해 펄펄 뜁니다.

영안이 어두운 자의 어리석음을 보게 됩니다. 죽을 줄도 모르고 그 길로 가려고 애를 쓰는 이 모습이 누구의 모습일까요? 혹시 우리 모습은 아닐까요?


또한 자기를 살려주려는 나귀의 심정도 모르고 자기 뜻대로 안 가준다고 나귀를 걷어차고 있는 모습에서 혹시 우리는 이러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닌 지요?

또 왜 하나님의 사자는 발람을 데리러 온 귀족들을 그 자리에서 처형치 않고 왜 발람하고만 티격태격하는 것일까요? 분명히 모압 귀족들과 함께 가는 길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하고는 상대도 않습니다. 왜요?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버려 두고 예수 믿는 사람들만 길을 막는지 깨달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가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욕심 때문에 가는 길이라면 속히 돌아서기를 축원합니다. 또 혹시 길이 막히고 일이 계속 꼬이면 하나님이 막으시는 줄 알고 속히 돌아서기를 축원합니다. 괜히 내 생명을 살려고 도움을 주는 주변 사람과 가족만 걷어차지 말고 돌아서야 합니다.


3. 하나님이 길을 막으실 때는 속히 포기하는 것이 사는 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길을 가려는 성도에게 천사까지 동원하시어 막으십니다. 그런데도 고집을 부리면 결국 갈 수는 있을지 몰라요. 발림도 결국은 갔습니다. 고집을 부리니까 갑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도 비참합니다. 발림의 말년은 어땠을까요? 

그는 가서 발락왕의 부탁대로 저주를 하려고 했으나 하나님이 강제로 발람의 입을 통해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십니다. 그러다가 결국 민수기31장 8절을 보면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왕들을 처형할 때 함께 처형을 당합니다.  비참한 말로를 맞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막을 때, 하지 말라 할 때 그때가 복입니다. 사업의 길을 막습니까? 깊이 생각하고 기도해보세요. 자녀의 길을 막으십니까? 그 길이 자녀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결혼의 길이 자꾸 막힙니까? 거기도 분명 하나님의 다른 뜻이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 뜻대로 안된다고 계속하려고 고집부리지 마세요. 내 고집을 꺾고 속히 돌아서는 것이 사는 길임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성도의 길을 막으실 때도 있습니다. 그때 그것이 하나님의 막으심인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발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탐심문제요,  하나는 영안이 감긴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이것은 하나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내 영적 눈을 멀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이라면  단호하게 끊어 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내게 유익한 나귀, 내 생명을 살리려고 애쓰는 나귀를 걷어차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혹시 죽을 자리인지도 모르고 그리로 들어가려고 애쓰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하나님 백성을 축복하는 일에는 언제나 앞장서시고 자신도 모르게 저주하는 일에는 한발도 들여놓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나귀를 걷어차지 않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출처 :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글쓴이 : 최일환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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