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작은 여우들을 잡으십시요.
설교본문 : 아가서 2:11-17
설교자 : 이동원 목사
귀한 찬양 감사 드립니다.
저가 미국에서 살 때 보석상 옆을 지나다가 그 유리창에 써 놓은 광고를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뭐라고 쓰여있는가 하니 '결혼반지를 빌려드립니다' 결혼반지를 빌려드립니다.
이것은 결혼은 어차피 계속될 수 없다는 그 사회의 비극적인 풍조를 반영한 광고였든 것입니다.
이 나라가 문화는 발달했지만 참 가정들이 무너지고 있구나, 이러한 안타까운 가슴으로 그날 드라이브를 해서 저의 집으로 오는데 저의 집 동네 그 몇몇 집 앞에 쓰여진 광고판이 또 남다른 감회로 제 마음속에 다가왔습니다.
그 미국에서는 집 같은 것을 팔 때 복덕방에 내어놓으면 그 집 앞에다가 이 광고판을 써 붙이거든요 그래서 house for sale, 뭐 이렇게 쓴다든지,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home for sale, 또 이렇게 쓰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가정을 팝니다" 이렇게 저한테 들려오더라구요. 느껴지더라구요. 가정을 팝니다. 아! 가정들이 무너지고있구나, 그러면서 바다건너 이 조국 땅 한국에 가난하지만 아직도 든든하게 지켜지고 있는 가정들을 보면서 그 조국의 가정들이 훨씬 더 행복하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더 이상 이 땅에서도 현실이 아니란 것을 우리 모두 인정해야 하는 가슴 아픈 현실 앞에 오늘 우리는 부딪히고 있습니다.
지난 1999년 그리고 21세기를 넘으면서 2000년, 그 2년 연속 신문 언론 매체들은 이땅에 그 매년 결혼하는 사람들이, 세쌍이 결혼한다면 한 쌍이 이혼하는 통계를 나타내고 있다고, 2년 연속 보도되고있는 것을 여러분은 아마 접했을 것입니다. 이땅의 가정들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닌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오늘날 우리의 가정을 위협하는 요인들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가정이 무너지고 있는 위기, 왜 그렇습니까?
종종 위기를 겪고있는 부부상담을 해보면 그 요인들이 뭐 거창한 그런 요인들이 아니라 매우 작은 요인들 때문에 가정들이 무너져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아가서의 표현을 빌리면 작은 여우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이런 표현이 등장했습니까?
아가서는 잘 아시는대로 솔로몬 왕과 촌녀 술라미 여인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 아가서에 나타난 주인공이 솔로몬 왕과 술라미 여인, 한 남자와 한 여인의 관계 뿐만이 아니라 사실은 세 사람이다, 목동과 여인이 사랑하는데 그 사이에 끼여들어서 사랑을 훔치는 솔로문의 삼각구도에서 아가서를 이해할려는 그런 문헌학적 접근 시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이 두 사람이냐 세 사람이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두 연인이 사랑하고 있었던 사람이 사랑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아가서의 엔딩은 happy ending입니다. 사랑의 위기를 넘어서서 부부로서 사랑을 성숙시켜나가는 경험에 도달한다는 아름다운 내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 그런데 오늘 15절에 보시면 그들이 한때 겪었던 사랑의 위기가 표현되고있는 그런 대목입니다.
이 아가서2장15절에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그런데 그 여우라는 말이 본래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복수, 그래서 little foxes, 여우들, 작은 여우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본래 팔레스타인의 황야에는 많은 여우들이 기식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사사기 15장에 보면은 삼손의 스토리가 나오는데 삼손이 여우를 300마리 잡지않습니까? 그래서 꼬리를 다 붙들어 메었어요 그 다음에 불을 질렀어요. 그러니까 뭐 여우들이 그냥 죽어라고 돌아다니면서 맴맴 돌면서 밭을 다 파헤치고 곡식 단을 다 망쳐버리는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혀주는 그 삼손의 복수극의 한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고있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 이렇게, 그 사실 팔레스타인 땅에서 여우란 것은 언제나 포도농사를 망치는 원흉으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갑자기 어느날 포도원에 등장해서 그 땅을 파고 구멍을 만들고 심지어 포도줄기를 갉아먹는 이런 여우들은 황야에 혹은 포도원의 무법자들 파괴자들로 통하고 있었든 것입니다.
아~ 그런데 포도꽃이 피어나는 계절이면 그 여우들이 더 기성을 부립니다. 그런데 그 계절은 일년 중 가장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아름다운 계절이고 또 연인들이 로맨스의 꽃을 피우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면 종종 그 여우들이 나타나서 깽판을 치기도 하고 또 포도원에 들어가서 포도원을 망치기도 하고 그래서, 팔레스타인 땅의 연인들에게 있어서 여우들은 언제나 사랑의 파괴자로 상징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영적으로 말하면 이 여우의 역할이 마치 마귀의 역할과 같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마귀가 참소자라는 뜻이죠. 참소자, 본래 마귀란 낱말은 희랍어에서 두 단어가 결합된 것입니다.
아~ 무엇 무엇 사이에 between, 그 다음에 던진다. 던져서 사이를 가른다, 참소자, 이간자,
부부 사이를 이간시키고 부모와 자녀 사이를 이간시키고 모든 아름다운 관계들을 파괴하는 것, 이것은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사탄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때때로 아주 작은 보이지 않는 것을 가지고 이런 교묘한 부부의 틈새를 벌리는, 또 모든 유형의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작전들을 벌립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작은 여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포도원, 아름답고 건강해야 할 우리의 포도원을 헤치고있는 작은 여우들을 잡자!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의 오늘의 포도원을 위협하고있는 여우들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저와 여러분의 가정이 건강하게 지켜지기 위해서 우리는 이 포도원을 헤치는 여우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우리의 가정의 포도원을 망치고있는, 헤치고 있는 혹은 부부의 틈새를 파고들어오는 이 여우들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아가서 본문뿐 아니라 아가서 전체를 통해서 이 아가서의 연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경험하고있었던 사랑의 위기, 그 위기 속에서 볼 수 있는 경계 되어야 할 사랑의 적들, 파괴자들을 몇 가지를 찾아볼려고 합니다.
그 첫째는 뭐냐하면 열등감이에요. 열등감이라는 여우, 우리는 열등감이라는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자, 한번 아가서1장을 펼쳐보시기를 바랍니다. 아가서1장요. 5절과 6절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시인데 우리 다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아가서1장5절과6절 다같이 시작,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계달의 장막 같을 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어떤 그 여인의 열등감이 묻어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아~여기보면 6절에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자기 피부 색갈에 대한 열등감, 우리 여인네들이 그 피부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마 포도원에서 일하는 가운데 이 여인의 얼굴이 검어졌든 것으로 보여집니다. 또 그것도 타의에 의해서,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나를 흘겨보지 말라" 이것이 타인들을 의식하고있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여기에?
그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나를 포도원지기로 삼았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에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했다" 내가 이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 피부가 검어져서 내 포도원은 지키지 못했다.
아마도 자기 포도원이라는 말은 자기얼굴 관리를 얘기하는 것 같에요. 내가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피부가 검어지고 내 얼굴관리 미용관리는 제대로 못해서 내가 검어졌다, 나를 흘겨보지 말라,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아름답다, 여인의 자존심.
여기보세요 5절에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계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계달의 장막은 검은 염소가죽 이에요. 내가 검은 염소가죽처럼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아름답다고 항변하고 있는, 그 여인의 이 항변의 대목 속에서 그 의식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깊은 열등감을 여러분 볼 수 있지않습니까?
저는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중요한 요인중의 하나가 열등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열등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어떤 사람도 열등감에서 자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때로 열등감 때문에 열심히 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병적 열등감이에요.
우리가 병적 열등감에 붙잡히게 되면은 인간관계가 정상적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있어서 지나치게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사람들, 자기자신에 있어서 지나치게 방어적인 사람들, 또 쉽게 사람들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 대부분 이런 사람들은 밑바탕에 그 병적인 열등감이 깔려있습니다. 여러가지 유형의 열등감, 뭐 피부에 대한 열등감, 외모에 대한 열등감, 환경에 대한 열등감, 자기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열등감, 뭐 돈에 대한 열등감 이런 숫한 열등감들 속에 붙잡혀서 인생을 살고있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부부 관계도 대체로 원만하지 못합니다.
사실 부부관계를 위협하는 공격1호가 저는 이 열등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것, 저는 가정이야말로 열등감을 치료할 수 있는 제일 좋은 하나님의 처방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이 뭘까요? 저는 가정에 대한 성서적 표현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적합한 표현이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은 옷을 벗을 수가 있는 곳입니다. 옷을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않더라.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옷을 벗을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래도 부끄럽지 않는 대상, 내 모든 약점을 드러내어 놓고, 그러나 그 약점을 받아주는 상대방에 의해서 그 사랑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의 열등감이라는 것이 치유를 받는 거에요.
그러나 이것이 치료되지 못하는 사람, 가정에서 아직도 이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지속적으로 상대방에게 공격적입니다.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을 주셨는데 가정에서조차 열등감의 치유를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어요?
조금 관점을 달리하면, 그러나 사실은 아~뭐 약점 없는 사람이 없으니까 허물없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 허물조차도 약점 속에서도 장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 뭐 검은 색깔, 검다 생각하면 열등감이 될 수도 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검은 것이 아름다운 색깔일 수도 있잖아요
여러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색갈이 검정색 입니다. 왜 그럴까요? 제 아내가 술람미 여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 아내 피부색깔이 좀 검지 않아요 네, 그러나 저는 그것 때문에 뭐 참 볼 때마다 오히려 검은 색깔이 아름답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저도 열심히 검은 색을 입을려고 애를 씁니다.
아~ 처음에 제가 결혼 딱 하고 나니까 뭐 제 아내 이름도 마음에 안들더라구요. 이름이 그렇게 촌스러운지 몰라요. 뭐 명자, 한국에 얼마나 흔한 촌스러운 이름,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또 얼마나 순박한 이름이에요? 그래서 명자! 명자 불러볼수록 좋아져요. 아~ 이제는 아예 그냥 M자만 보면 얼마나 좋은지, 하하~~
그래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식당이 뭐냐? 맥도날드 입니다. 하하~~ 앞에M자가있고 M자만 보면 마누라생각 하게 되고, 그래 참 이름 좋구나, 이렇게 생각하기에 따라서 관점에 따라서 굉장히 달라질 수가 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본문의 스토리는 사실은 이 여인이 그런 열등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열등감에도 불구하고 왕이 나를 사랑한다. 이 사실 때문에 열등감을 극복해 나가는 사랑의 과정이에요.
사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야 말로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는 자리에 선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해요.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허물을 아시는 주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잖아요. 이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수용, 수용 안에서 우리의 열등감이 치료를 받아야지요 이제는, 하나님이 받아주셨는데 나를, 그래서 성경이 그렇게 말하지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받아주셨으니,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으니 너희도 서로 수용하며 받으며 살아야 한다고.
탕자의 드라마가 그 얘기가 아닙니까? 자, 탕자가 돌아올려고 그러는데 아버지가 "야! 너 생활 완전히 100프로 고친 다음에 돌아와라, 그래야 내가 집에 받아준다, 그러지 않았어요." 이것은 기독교적인 인간관계의 접근방법이 아닙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에 관해서 아직도 못마땅했을 거예요. 그러나 돌아온다는 사실만이 감사해서 자, 저 먼 나라에 가서 모든 것 탕진하고 낭비하고 소모하고 다 떨어진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 그러나 아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품어주고 받아주었잖아요? 그래서 이 돌탕이 새로워지잖아요. 돌탕, 돌아온 탕자란 말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다 돌탕들이 아닙니까? 돌아온 탕자들, 그래서 그 다음부터 새로워져요.
그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하면서 조건 없는 사랑을 경험하면서 아버지 미안해요!. 그러면서 그 다음에 새로워지는 거에요. 이 조건 없이 수용을 해줘야 돼요.
특별히 부부관계에서 세월이 흘러갈수록 약점이 발견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약점을 주님이 나를 받아주신 것처럼 나도 수용할 수 있을 때 그때 우리는 열등감을 넘어선 건강한 가정.
그렇습니다. 이 열등감이라는 여우를 잡지 못하면 우리 포도원이 아름다운 포도원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 속에 혹은 부부사이에도 존재할 수 있는 열등감이라는 여우,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잡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열등감이라는 여우.
그 다음에 두번째 잡아야 할 여우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고독이라는 이름의 여우라고 말하고 싶어요. 고독의 여우.
자, 아가서 3장을 보시면 3장1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가서 3장1절에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2절에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자, 무슨 얘기냐하면 이 여자의 연인이 뭐 어떤 이유인지 잘 모르지만 잠시 그녀를 따나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순간적이지만 이 여인은 다시 고독을 느껴야만 했었습니다. 여기서 이 여인이 경험하고 있었든 사랑의 위기를 다시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평범한 사랑의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사랑이란 뭘까요? 복잡하게 얘기하지말고, 사랑은 함께 있는 거예요. 더불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또 비록 사랑하는 상대방과 더불어 함께 있어도 인간은 여전히 고독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인간이기에 피할 수 없는 어떤 실존적인 고독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러나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있으면 어느 정도 우리는 고독감을 해소할 수가 있지않습니까?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부 되게 하시고 가정을 주신 가장 중요한 실제적 이유중의 하나가 성경에 보면 고독에 대한 처방으로서 가족을 주셨다는 거에요. 그래서 시편 말씀에 보시면 하나님이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고독을 아시고 하나님이 가정이라는 제도를 주셨다. 더불어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으므로 우리는 이 고독감을 극복해 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보시면 하나님이 첫사람 아담을 지으신 후에 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걸작품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지금까지 창조의 과정에서 아담 하나를 지어놓고 나서 조금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셨어요. 성경에서 처음으로 부정적인 언어, 이런 단어가 출현합니다. "좋지않다" 보기에 좋지않다, 아담을 혼자 있는 모습을 보시고, 덩그라니 혼자 있는 모습 보시고 "사람이 독처 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그래서 하와를 짓지 않습니까? 반려자인 짝으로서 하와를 지어 놓으셔요. 그리고 창조가 완성이 돼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제가 이렇게 강대상에 늘 올라와서 보면, 부부가 나란히 와서 예배 드리시는 분들,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보시기에 심히 좋은지 몰라요. 그런데 분명히 결혼한 사람인데도 따로따로 앉아있어요. 얼마나 보기에 안 좋은지 몰라요.하하~~
물론 성가대나 특별한 이유가 있는 사람은 몰라도 그렇지 않는데 왜 결혼한 부부 이면서도 따로따로 앉아있어야 합니까? 이해가 안돼요. 왜 결혼했는지 이해가 안돼요.
요즘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그 자녀들의 교육문제로 인해서 부부 사이 별거하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많아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뭐 월남전을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남편이 월남으로 헤어져 있고, 또 사업을 위해서 사우디로, 뭐 그때도 적지않는 사회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자녀들의 교육 문제라 할지라도 부부사이에 헤어지는 것, 저는 이것이 별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바람직하지 않는 일 뿐만 아니라 우려해야 할 일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인간은 모두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인간관계의 틈새를 노립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7장에 보시면 부부의 관계의 중요한 삶의 원리가운데 하나로 성경이 이런 것을 강조했잖아요? 바울 사도의 말씀입니다마는 부부를 향해서 주시기를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서 합의상 얼마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못함을 인하여 사탄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우리는 사탄에게 찬스를 주면 안돼요. 부부가 떨어져있다 보면 얼마든지 시험에 들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우리에게 애써서 강조하는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정상적인 부부관계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여러분 특별한 어떤, 그리고 아주 짧은 기간이 아니라면 또 기도할 영적인 어떤 목적이 아니라면 헤어져있지 말아야 합니다, 부부는. 함께 있어야 돼요.
그래서 성경적 부부생활의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악착같이 붙어 다니는 것입니다 하하 한번 따라서 하십시다. 악착같이 붙어 다닙시다. 그 옆에 같이 오셨으면 한번 쳐다보며 악착같이 붙어 다녀요 응? 하고 한번 해보세요. 해보세요. 되게 참 수줍어하는 한국 사람들이에요. 그렇죠? 네.
저는 악착같이 붙어 다닙니다. 어제도 롯데, 분당에 있는 롯데 백화점을 따라다녔습니다. 이 쇼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어요? 이를 악물고 쫓아다녔어요.하하~~ 왜냐하면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저는 그리스도인 들이야 말로 성경이 경계하는 이런 삶들을 경계 받고 극복하기에 가장 좋은 사람들이에요.
자, 우리의 가정의 포도원을 헐 수 있는 첫번째 여우, 뭐라고 그랬어요? 열등감,
자 주님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다, 이 여인은 왕이 나를 받아주셨다, 이 프라이드가 생기는 거에요. 열등감을 극복해요.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죄와 허물을 아시고도 받아주시고 용서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다음에 함께 하신다 얼마나 함께 하십니까?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해 주시겠다. 우리가 이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또 똑같은 경험을 나눠주고 더불어 함께 있는 삶을 산다는 것,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이 더불어 함께 있는 축복이 우리의 가정을 지키는 견고한 축복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번째로 우리가 잡아야 할 여우가 있어요.
그것은 의사 소통의 혼선, 혹은 대화의 결핍이라는 여우입니다. 대화의 결핍,
자, 5장 들어 가보십시요. 아가서 5장에 보시면 5장2절 이하에 또 사건이 하나 일어납니다. 5장 2절이 이렇게 시작하는데요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 학자들은 이것이 꿈속의 사건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실제적인 비유적인 사건을 실제로 이야기 한 것이다. 뭐 이렇게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자,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그런데 안 일어난다 이 말이에요 여자가,
3절에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무슨 얘기입니까? 신랑이 와서 문을 두드리는데 잠들어있는 신부의 모습, 어떤 때 우리마누라 모습하고 비슷해요.
신랑에게 적절히 응답치 못하는 신부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인데, 뒤늦게 일어나기는 일어나요. 그런데 이상한 사건이 일어나요.
6절에 보면은 자,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러니까 일어나서 문을 열었을 때는 없어졌어요. 신랑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아직도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는 모습, 만나도 만나지 못하는 모습.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만나도 만나지 못하는 비극, 우리가 한 지붕 아래서 산다고 그래서 부부가 저절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함께 공존하지만 마음이 통하지않는, 마음이 통하지않는 이런 비극들이 얼마나 자주 일어납니까?
본래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해서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성경에 보면 '너를 위하여 돕는 배필로 지으리라" 그런데 돕는 배필, 여기서 돕는 다는 단어를 한 구약의 학자는 이 돕는다는 말을 조금 의혹이지만 그러나 그 단어의 핵심적인 의미를 살린 다른 단어로 바꾸었을 때 이렇게 번역한 학자가 있어요. "통할 수 있는 배필" 통할 수 있는 짝, 부부는 통할 수 있는 짝이어야 합니다.
마음이 통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대화가 가능한 것, 그것을 위해서 부부 되게 만드신거란 말이지요. 그런데 부부사이에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 대화가 결핍되었다. 이것처럼 비극이 어디에 있어요?
그런데 이 대화란 것은 노력이 필요해요. 창조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시간도 함께 하고 또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 볼려는 노력을 통해서 이 대화의 길이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베드로전서 3장에 보시면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충고합니다.
남편들에게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 남편보고 아내를 좀 연구하라는 말이에요.남편은 아내에 대한 지식을 가져라, 요즘 아내가 어떻게 지내는 지 아세요 남편들은? 아내가 왜 외로워 하는지, 왜 마음아파 하는지, 이 갱년기에 왜 고통스러워 하는지 아십니까? 최근에 아내가 어떤 마음의 자리 감성의 자리에서 어떤 고통과 갈등을 느끼고있는지 알아보셨습니까? 우리가 부부 생활에도 연구가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좀 지식을 가지고 아내를 관찰해 보십시요. 여러분의 아내를 아십니까?
또 아내 여러분들 여러분의 남편을 아십니까? 여러분 남편이 요즘 왜 스트레스를 느끼고 왜 어려워하고 왜 고통스러워 하는지, 직장문제로 사업문제로 얼마나 그가 곤고해 하고 아파하는지 좀 아세요? 아세요?
우리가 이 알아볼려는 노력을 통해서 서로 진지한 대화, 마음의 대화 '여보 당신 마음 아프겠네' 그리고 그 마음속에 아픔을 틀어놓는 진지한 대화가 부부사이에 있느냐 말이에요.
여러분 이런 대화를 소흘히 여기면 또 대화 없이 지내다 보면 하루 이틀 사흘 지나보면 부부도 때로는 타인처럼 남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그러다 보면 가까이 살지만 당신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 되는 거죠.
아 당신은 누구 시길래 내 마음 깊은 곳에 외로움 심으셨나요
그냥 스쳐 지나갈 바람이라면 모르는 타인처럼 아무 말 말고 가세요.
하하~~ 그렇게 되는 거죠 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죠.
저는 부부에게 있어서 이 대화의 상실이라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문제가 아니에요. 이것은 가정이라는 포도원을, 이렇게 살다 보면 메마른 건조한 사막처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막 속에 아름다운 포도원, 이것이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인데 우리는 가정마저도 메마른 사막처럼 만들고 마는 것이에요. 대화가 없으면 그렇습니다.
한번 미국에서 어떤 잡지를 읽다가 재미나는 기사를 보았는데 그 미국 사람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적이 뭐냐? 자연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가장 크다란 적이 뭐냐? 그랬더니 보통 사람들은 다 어떻게 대답을 했느냐 하면 그것이 산불이라고, 한국도 산불 종종 나지만 미국서 한번 산불 나면 굉장합니다. 한달 내내 타요 그냥. 어마어마한 살림이 다 타버립니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다 산불이라고 대답을 했어요. 그런데 재미나는 것은 전문가들, 그러니까 이 환경 전문가들은 그 미국의 자연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적이 뭐냐 그럴 때, 다 일치된 대답인데 그 대답을 보고 저가 놀랬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흰 개미 때래요. 흰 개미 때, 그 흰 개미 때가 그렇게 크다란 자연의 손실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굉장한 것만 손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에요. 가장 작은 것,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열등감 치료되지 못하는 열등감, 또 내 마음속에 해소되지 못하는 뼈저린 외로움, 고독, 또 부부간에 대화를 소홀히 하는 것, 거기서부터 서서히 가정은 무너져갈 수가 있어요.
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아가서2장15절에서 이 여인은 이렇게 호소합니다. 어떻게요?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명령사로 되어있어요. 그러나 어떤 영어번역에 보면은 우리가 잡자! 영어에 Let us catch, Let us catch, 우리가 함께 잡자! 잡자.
이 여우들은 함께 잡아야 돼요. 남편만의 노력으로 안돼요. 아내만의 노력으로 안돼요. 부부가 함께 노력해야 되요. 우리가 함께 이런 우리의 가정의 아름다운 포도원을 헤치는 여우들을 잡자! 이 공동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남편에게는 아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내에게는 남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도움을 얼마든지 주실수 있어요. 또 이미 주시지 않았습니까?
자, 이런 인간 관계의 근본문제, 혹은 가정을 헤치는 근본 문제들을 우리는 이미 해결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이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열등감. 보시고 아시면서도 있는 모습 그대로 다 받아주셨지요? 거기다가 땅끝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그랬었죠? 또 우리와 대화하자고 그랬어요, 주님은. 계속 대화하자고 교제하자고, 우리가 그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도 그 은혜를 베풀며 살아야지요. 우리가 다시 그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수 있다면 여러분의 가정에 부딪히고있는 문제가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 해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의 가정의 문제 극복하지 못할 문제 없다고 믿습니다.
제가 어떤 그 미국 크리스챤 부부들의 간증을 다루고있는 잡지를 읽다가 아주 평범하지만 짤막한 이야기에서 감동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이 부부는 별거중인 부부였어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도장을 찍어야 되요. 이혼도장.
미국에서는 일정한 기간이 지나가면 이제 저절로 싸인하고 이혼이 되는데 그 남편의 마음속에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가 그리스도인이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마지막 싸인하고 이혼이 합법화되기 전에 제가 한번 정말 진지하게 기도하고 제 아내를 찾아가겠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애에 짧지만 정말 진지한 기도를 드렸데요. 하나님 저를 좀 도와주세요. 저는 제 아내에게 가서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제 아내에게 너무 잘못했어요. 제가 그것을 알아요. 하나님 용서해 주시고요,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을 주시고 무슨 행동을 해야할찌 그것도 하나님이 가르쳐 주세요.
그래서 그날 자기가 큐티 하는데 마태복음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낼 때 네가 말할 것 염려하지 말아라 말할 것을 성령이 주신다, 그 말씀을 읽었대요. 그리고 이제 찾아갔어요. 그런데 그 아내가 친정 집에 친정이 뉴져지 바닷가에 있었대요. 그런데 그 바닷가에서 사실은 이 부부가 처음 만났대요.
그래서 자기 아내보고 여보, 그러나 자기 아내는 나가기도 싫다고 이제 싸인만 해주면 끝나지 않느냐고, 당신하고 마지막으로 바닷가를 한번만 꼭 걷고싶다고, 잠시라도 얘기를 하고싶다고,
그러니까 아내는 그냥 뭐 억지로 쫓아 나왔죠. 그래서 이 부부가 바닷가를 거니는 거에요. 그냥 말없이 걷은 거에요. 어색한 표정으로 계속 걷는 거에요. 그러나 여러가지 생각을 했겠지요. 처음 만났든 바닷가, 같이 걸었던 바닷가, 그런데 한참 가다가 갑자기 물이 아마 밀려들어올 시간이 되어서 물이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아내가 넘어졌어요. 넘어졌어요. 넘어져서 물을 틀고 일어나다가 반지가 빠져 나왔어요. 결혼반지가, 그래서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 거에요. 오, 오, 반지, 반지 그러더니 갑자기 아내가 몸을 도사리더니 "쯧, 미안하지만요 그렇지만 뭐 어차피 반지는 필요 없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그 순간 남편이 엉뚱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자기 반지를 딱 빼더니 물에 던져버렸어요. 아내가 쳐다보면서 '아니 당신 그 반지 왜 던져요?' 그 남편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 반지가 외로울 거 아냐? 내 반지가 함께 있으면 좋을 거 아냐?"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에 아내는 울기 시작했다고 그래요. "당신 정말이에요?" "정말이야" "그럼 난 당신하고 있고싶어" 아내는 남편의 손을 잡더니 이렇게 말하더래요. "나 집에 갈꺼예요. 한번 더 노력하죠"
이것이 회복의 시작이 였어요. 회복의 시작이 였어요.
주님의 은혜라면 우리가 극복하지 못할 문제는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인생의 포도원이 아름답게 가꾸어지는 계절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일어나십시다 다 일어나십시다.
우리 함께 같이 기도할 때 우리 부부들이 같이 오셨으면 좀 손 좀 한번 잡아봐요. 잡고요 같이 한번 기도해봐요. 하나님 우리를 부부 되게 하셨는데 우리 포도원이 아름다운 포도원, 꽃이 피는 포도원, 시와 노래가 있는 포도원, 그런 포도원이 되게 해달라고 회복시켜 달라고 우리의 열등감도 씻어주시고 받아주신 주님, 고독한 우리에게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시는 주님, 나와 더불어 대화하고싶다고 말씀하시는 주님, 그 주님이 여러분과 저의 주님이라면 그분의 은혜로 그분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극복하지 못할 문제는 없잖아요 하나님 우리가정 도와주세요 회복시켜주세요
하나님 이 땅 이 시대의 가정들이 아가서가 그리고있는 그 아름다운 포도원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요.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한번 기도 하시겟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 이 시대의 가정들이 어렵습니다. 우리 가정들을 치료해 주시고 새롭게 해주시고 도와주시옵소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가정들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포도원들, 때로는 여우들이 돌아다니며 구멍을 뚫고 밭을 풀어헤쳐놓고 이를 갉아먹고 있는 포도원들, 하나님 이 여우들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우리 포도원의 아름다운 낭만이 사랑이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꽃이 피는 포도원이 될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주 먼 옛날 가사의 뜻을 생각하며 힘차게 찬양하십시다.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 당신을 향한 계획 있었죠
하나님께서 바라보시고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네
이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게 나의 손으로 창조 하였노라
내가 너로 인하여 기뻐 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사랑해요 축복해요 당신의 마음에 우리의 사랑을 드려요.
사랑해요 축복해요 당신의 마음에 우리의 사랑을 드려요
우리 부부끼리 친구끼리 좀 안아주세요 이렇게, 친구끼리 부부끼리, 참 한국 남자들 여기서 부부끼리도 못 안아 주고, 참 나도 남자지만 한국 남자들 참 해도 너무해요. 부부끼리 뭘 곤란해요 한번 안아 보세요. 부부끼리 같이 오신분, 다른 사람 약 오르게 한번 안아줘 봐요. 녜, 하하~~
기도하시겠습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이 부활의 아름다운계절 우리의 가정 속에 희망이 사랑이 믿음이 회복되며 시와 노래와 낭만이 있는 아름다운 포도원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포도원을 헤치는 작은 여우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붙잡게 하시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가정마다 하나님의 축복이 성령의 인도하심이 부부사이의 아름다운 교통이 우리의 생이 다하도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복 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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