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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복이 있는 사람(시편1;1~6)

복이 있는 사람(시편1;1~6)

 

  우리 옆 사람과 함께 축복의 인사를 합시다.  “당신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복을 얘기할 때에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가지고 말을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좋은 집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그 사람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또 좋은 직장이나 직업을 가졌다면 그 사람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가문이 좋다거나 아니면 좋은 이력을 가졌다고 하면 그것을 보고 복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복을 말하는 근거이며 또한 이것이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복이 있다고 말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방금 전에 서로를 향하여 축복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당신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서로에 대해서 복이 있다고 말하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냥 목사님이 한 번 하라고 해서 한 것  뿐입니까?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복이 있다”고 선언을 하는 것은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복을 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축복의 산에 오를 제자들을 향하여 복을 명하였습니다.  “복이 있으라.” 예수님은 축복의 산에 오른 제자들을 향하여 복을 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님께서 복을 명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는 그렇게 믿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축복의 산에 오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축복의 산에 오른 사람들은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그러한 복의 기준들을 저들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저들에게는 그렇게 좋은 집이 없었고요?  그렇게 좋은 직장이나 직업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었고, 애통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저들을 향하여 복이 있으라고 명하였습니다.  주께서 명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명하시면 명하신대로 이루어집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뤄집니다.  주님의 말씀은 보증수표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를 향하여 “잔잔 하라.”고 명하자 바다가 고요해졌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하자 나사로가 돌무덤에서 베를 감은체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 무성한 잎을 자랑했던 무화과나무를 열매가 없어 저주하자 그 무화과나무는 곧장 말라버렸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곧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복을 명하였으므로 그 명을 받은 사람은 복이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이 있는 자.”이신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의 기준이 되는 그런 것들은 가지지 못했을지라도, 주께서 나를 향하여 복을 명하였으므로 내가 복이 있는 자인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우리 옆 사람과 함께 다시 한 번 축복합시다.  “주께서 당신에게 복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이 있는 자라고 선언하는 것은 주께서 나를 향하여 복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나를 복이 있다고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향하여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기를 바랍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을 근거로 삼지 말고, 주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근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삼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사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주께서 복을 명하셨으므로 우리에 복이 임하였습니다.  주께서 풍랑이 이는 바다를 향하여 잔잔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언제 잔잔해졌습니까?  다음날 잔잔해졌습니까?  아닙니다.  그 말씀이 떨어지는 순간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주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언제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습니까?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는데 며칠 걸렸습니까?  아닙니다.  그 말씀이 떨어지자 나사로는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은 곧바로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나에게 복을 명하셨기 때문에 지금 나는 복이 있는 자입니다.  지금 내가 복이 있는 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장차 복이 있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내가 복이 있는 자인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명하였지만 내가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명하시고 내가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무리 명하셔도 믿지 않으면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명하셨지만 그 말씀을 믿지 않고 계속해서 내 생각과 판단으로 결정을 합니다.  그래도 내가 셋방은 면해야 복이 있는 것이지 아직도 셋방을 살고 있는데 무슨 복이야?  내가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어야지 아직도 일할 직장이 없는데 무슨 내가 복이 있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널 때가 보리 수확 철입니다.  그 때는 요단강이 범람하는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요단을 건너라고 하셨습니다.  건널 때에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건넜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가 발이 물에 잠기자 물이 갈라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갈라진 요단강으로 제사장들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저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가자 물이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자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신앙이란 내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갈 때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복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이 있는 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복 있는 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요단이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요단강은 여전히 삼킬 듯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궤를 멘 제사장들은 넘실대는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요단으로 들어갔습니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으로 들어가자 넘실대던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우리들에게 복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복 있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월세를 살아도 복 있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일자리가 없어도 복 있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백도 없고, 가진 것이 없어도 복 있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수입이 넉넉지 않아도 복 있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다시 해석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가정의 삶을 살지 않고 실상의 삶을 산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가정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다.”  이게 가정의 삶입니다.  직장 주시면 충성하겠습니다.  가정의 삶입니다.  성공하면 헌신하겠습니다.  가정의 삶입니다.  잘 되면 봉사하겠습니다.  가정의 삶입니다.  믿음의 삶은 이런 가정의 삶이 아닙니다.  실상의 삶입니다.  실상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잘 되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잘 될 것을 믿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성공하면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할 것을 믿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주시면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실 것을 믿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상의 삶입니다.  성도의 삶은 가정의 삶이 아니라, 실상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가정의 삶을 살기 때문에 그 믿음이 실상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입니다.  가정의 삶이 아니라, 실상의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복 있는 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복 있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복을 명하였는데 계속해서 가정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직도 “복이 임하면” “복을 받으면” 이렇게 가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으면 가정이 아니라, 실상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으로 살지 말고 실상으로 삽시다.  복 있는 사람은 항상 실상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 있는 사람의 삶에 대해서 시편 기자가 말하고 있는 첫 번째 것은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왜 시편 기자는 왜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를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왜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을 말하면서 먼저 “아니고”를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요?  복을 말하면서 왜 이것을 먼저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복은 어떤 결과만이 아니라는 것을 강력하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어떤 사람이 로또에 당첨이 되면 “그 사람 복 받았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어떻게 보실까요?  하나님도 그 사람을 향하여 복 받았다고 하실까요?  하나님은 그 사람을 복 있는 자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로또를 당첨한 자에게 복을 명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어떤 결과만을 보고 “복이 있네, 없네.”를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결과만 보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전체를 보십니다.  시작과 과정과 결과를 함께 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결과만을 보고 판단합니다. 

  우리는 오늘 1절 말씀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결과만을 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이 다 용납되고 용서되는 그런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사고가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의 법칙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을 가더라도 제대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가면 된다는 식의 논리가 너무 팽배해 있는 것입니다.  사회가 이렇게 되면 공로주의 업적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훈장을 달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무슨 업적이나 공로가 있으면 훈장을 주지 않습니까?  그런 훈장을 달면 그것이 권위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바로 그런 업적주의 공로주의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결과만 있지 시작과 과정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들이 금식하고 구제하는 것은 그것이 업적이 되고, 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2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양으로 구별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런데 이 말을 듣고서 양들이 하는 말이 우리가 언제 그랬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그렇게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주님을 그렇게 공궤하고  돌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맞는 얘깁니다.  저들은 주님을 그렇게 공궤하거나 돌본 적이 없습니다.  저들은 단지 공궤가 필요한 자를 공궤했을 뿐이요, 돌봄이 필요한 자들 돌봤을 뿐입니다.  그 사람이 누군가에는 별로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을 돌보면 나중에 내게 콩고물 좀 떨어지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양들은 가정의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을 돌보면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삶을 실상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복이 있는 자로서 산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복 있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상의 삶을 삽시다.  가정의 삶을 살려고 하지 맙시다.  지금 주의 말씀이 내 안에 이루어졌음을 믿고 주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나아가는 삶이 복 있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사는 것입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단지 조용한 방에 들어가서 말씀을 생각하는 정도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묵상한다는 것은 그 말씀을 내게 적용하는 것이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 있는 자는 말씀을 자기 삶에 적용하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지만 실상의 삶을 사는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그 환경을 변화시키고 바꿉니다.  이러한 삶을 살게 되면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상의 삶을 사는 사람은 미리 앞당겨 걱정하지 않습니다.  나무는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사과나무라면 가을이 되어야 사과가 열릴 것입니다.  복숭아나무라면 여름이 되어야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것도 시기가 있듯이 열매를 거두는 것도 시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이미 우리에 명해졌습니다.  때가 되면 분명히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때가 되면 맺혀야지 좋은 열매입니다.  때가 이르거나 늦으면 맛이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항상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복입니다.  여기에는 때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 때까지 실상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정의 삶이 아니라, 지금 내가 여기에서 믿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복 있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가장낮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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