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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의 사정을 알자(고전2;11~12)

하나님의 사정을 알자(고전2;11~12)

 

어느덧 4월도 막바지입니다. 주일로서는 오늘이 마지막이 됩니다. 1년 12달 중에 4달이 지나갔으니 1/3이 지나간 것입니다. 우리가 금년도 표어를 영적진보를 이루자고 하였는데 얼마만큼의 영적인 진보를 이루었습니까? 아니면 아직은 이것이 구호에 머물고 있습니까? 어찌되었든지 간에 올 한 해는 영적진보를 꿈꾸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올 해에는 나의 믿음이 반드시 자라기를 바라는 소원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이제 내가 이런 영적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나아가기를 소원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어제 한벗조합총회가 있어서 총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총회를 하기 전에 김민영이라는 분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영적인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얼마나 열정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저절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은 안 좋은 것 밖에 없습니다. 좋은 것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벼는 농부가 씨를 뿌려야 나는 것이지, 농부가 모내기를 하지 않았는데 논에서 벼가 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잡초는 농부가 파종하지 않아도 저절로 논에 생깁니다. 영적진보는 농사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농사를 지어야 거기에서 좋은 추수를 할 수 있는 것이지, 농사를 짓지 않고서 좋은 결실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순절 기간 동안 기도회를 하면서 제가 여러분에게 중간에 한 번 약속을 하였습니다. 지속적으로 읽으신 분들에게 상을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약속을 하면서 너무 많이 하면 꽤 많이 지출이 되겠는데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 마음을 아셨는지 전혀 염려하지 않도록 하셨네요. 4명밖에 지속적으로 성경을 읽으신 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분들은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대표로 최병주가 나오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절로 영적진보가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육은 세월이 흐르면 키도 크고 몸도 커지고 저절로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영은 스스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스스로 영이 자라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할지라도 영적으로는 전혀 자라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할지라도 영적으로 자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함께 읽어 봅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알자.” 왜 우리가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야 합니까?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내 코가 석자다.” 무슨 뜻입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일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것도 버겁다는 것입니다. 아마 현대인들은 다들 “자기 코가 석자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의 일에는 신경을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옆집 사람이 지금 어떻게 사는지 잘 모릅니다. 저 집이 밥을 굶는지? 저 집이 요즘 무슨 걱정을 하는지 모릅니다.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다들 지기 일을 하는데도 바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정”에 대하여 관심을 갖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정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의 사정을 알려고 하는 것은 우리는 영적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정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정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정을 알려고 합니다. 우리는 영적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정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진보를 목적으로 삼은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의 사정을 알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정이 궁금합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생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생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영적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생활은 육적인 생활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생활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육적생활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육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육이라는 것은 영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은 영원하지만 육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은 제한을 받지 않지만 육은 제한을 받습니다. 영은 유효기간이 없지만 육은 유휴기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육적생활과 영적생활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적생활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음식을 먹습니다. 밥을 먹죠. 그러면 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도 영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또한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육의 양식으로는 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영의 양식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육이나 영이나 양식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러나 먹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이 밥을 먹습니다. 다들 자기 양대로 먹습니다. 그런데 맛있는 것이 있으면 자기 양보다 더 많이 먹기도 합니다. 그렇게 먹으면 배가 불러서 다음 끼니는 걸러도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많이 먹어도 하루를 넘기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몇 끼니를 거를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화되기 때문입니다. 육의 양식은 이렇게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소화되는 때가 유효기간입니다. 유효기간이 끝나면 또 다시 먹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육의 양식은 유효기간이 있는데, 영의 양식도 유효기간이 있습니까? 제자 수요일에 지난주 설교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물어보면 대답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힌트를 줘도 못 맞추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도 유효기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유효기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과 기억력에 유효기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억력도 육에 속한 것입니다. 이성도 육에 속한 것입니다. 육에 속한 이성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시키면 그것은 우리의 육에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영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 영이 이 말씀을 받아야지, 나의 이성이 이 말씀을 기억해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이성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한 것을 가지고 자기가 영적인 유익을 얻은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요한복음1;1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씀 또한 영원합니다. 마24;35을 보면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의 영원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은 육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육이 아니라 영입니다. 예수님께서 요6;63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은 육이 아니라, 영입니다.

영은 유효기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육은 유효기간이 있지만 영은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육의 양식에도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그것이 영원히 배부른 것이 아닙니다. 소화가 되면 다시 배가 고프고 배고프면 다시 양식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도 유효기간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은 유효기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질 수 없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는 말씀을 들었는데도 영적인 진보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영의 양식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내 육의 양식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내영이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하는데, 나의 이성으로 이 말씀을 기억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내가 먹은 육의 양식이 영원히 나를 배부르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이성으로 기억된 말씀도 그 때는 은혜를 받은 것처럼 포만감을 느끼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시 배고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 영이 이 말씀을 먹으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요4장에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을 만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영이 먹으면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는 것입니다. 히4;12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내 영이 받은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나를 영적으로 다시 배고픔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저희 마을에 권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이 분은 한글도 모릅니다. 한글을 모르니 성경을 읽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도 읽지 못합니다. 지금이야 교회에서 성경공부도 있고, 이런 저런 세미나도 있고 배울 수 있는 곳도 많이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사십년 전에 무슨 성경공부가 있었겠습니까? 주일날 수요일에 목사님 설교를 듣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항상 영적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합니까? 성경도 읽을 줄 모르고 성경공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영적으로 충만함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한 구절이라고 하더라도 그 말씀을 자기 영의 양식으로 받게 되면 그 말씀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이성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내 영이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영이 받으면 그 말씀이 나의 양식이 되어 내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날마다 말씀을 듣습니까? 그것은 배고프기 때문에 듣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배가 고프기 때문에 음식을 찾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 것과 하나님의 충성된 사람이 되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김민영씨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분이 지금 52살인데, 45살에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런데 45살 까지 자신의 삶을 자기를 위해서 살았던 삶이었지만, 지금 자기의 삶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떤 삶이 더 행복한 삶인 것 같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위한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이 강의를 하면서 자주 하는 말이 제가 행복한 것처럼 보이지 않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이분은 고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농고를 졸업했습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당당한지 모릅니다. 살려고 하는 삶은 피곤하고 힘듭니다. 하지만 살리려는 삶은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살려고 살았습니까? 아니면 살리려고 살았습니까? 예수님은 살려고 산 것이 아니라, 살리려고 사셨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살려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살리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은 자에서 산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살기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사는 자입니다. 우리 옆 사람과 함께 축복의 인사를 합시다. “당신은 살기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 사는 자입니다.”

살기 위해서 사는 사람은 날마다 전쟁을 해야 합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사는 것이 피 말리는 전쟁입니다. 어제 강의를 마치고 질문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질문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계절별로 매출의 차이가 없느냐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떤 대답을 하였는지 아십니까? 참으로 깜짝 놀라운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잘 되는 8개월이 있는데 안 되는 4개월을 왜 걱정을 하느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매일 서서 호떡을 굽고 강의도 서서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서 있으려면 체력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되는 날은 안 된다고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체력을 위해서 운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사는 사람과 살리기 위해서 사는 사람의 생각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살리는 삶을 살려면 생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사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의 생각이 달라집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이지만 저들의 마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잡히시던 때와 똑 같았습니다. 여전히 저들은 두려워서 밖으로 향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을 때에 저들은 담대하게 나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생각이 달라진 것입니다.

장로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저들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핍박하였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기쁘게 해야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야겠느냐? 대답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성령님이 들어오시면 우리의 마음이 창조적으로 변합니다.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먼저 성령님을 인정하지 못한 죄를 회개하십시오. 육의 생각으로만 살았던 것을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성령님을 인정하십시오. 성령님을 사모하시고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성령님은 보혜사입니다.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보내신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을 인정하고, 사모하고, 영접하기를 원하기만 하면 성령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중요한 것은 들어오신 후에 우리가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이시기에 우리가 성령님을 무시하면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근심케 하면 다시 성령 충만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임했을 때에 항상 성령님과 협의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무시하면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나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결단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가장낮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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