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물음(요21;15~17)`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노하우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성공을 위한 노하우, 출세를 위한 노하우, 자기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노하우에 대한 공부들을 많이 합니다. 요즘 잘 팔리는 책들은 다 이러한 노하우를 가르쳐 주는 책들입니다. 주식투자에 성공하는 비법, 공부를 잘하는 비법, 10억을 버는 비법, 인간관계를 잘 맺는 비법 등등 모든 영역에서 노하우에 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 같습니다. 노하우라는 것은 어떤 것을 성취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무엇을 할 때에 효과적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하우를 알면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노하우를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 비해 훨씬 빠르게 일을 수행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적은 비용이나 힘을 갖고서도 일을 잘 성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이명박 정부가 추구하는 경제적 실용성은 바로 노하우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용성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쓸데없이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실용적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실용성이 모든 가치의 최우선적인 가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실용성 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사랑이 실용성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실용성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권이 실용성보다 더 중요한 가치입니다. 이런 가치들이 실용성이라는 가치에 밀리면 곤란합니다. 또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실용성이 곧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실용성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실현될 때에 우리들은 더욱 행복할 수 있습니다. 실용성에 있어서는 뒤떨어질지 모르지만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하는 것은 사랑할 때이며, 믿음가운데서 살 때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은 자본주의 세상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국가입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실용성이 매우 강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실용성보다 더욱 중요한 가치들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교회도 세상을 좇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실용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실용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실용이 교회의 우선적인 가치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비유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것은 실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우리에게 실용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잃어버린 양은 말썽을 피우는 양이요, 문제를 일으키는 양입니다. 그 양을 다시 찾는다고 하더라도 언제 또 문제를 일으킬지 모를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냐고 하면서 천국은 마치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는 것도 실용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3년 동안 동도동락 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번 하기가 어렵지 한 번 한 사람이 두 번 하기는 어렵지 않다. 처음 하기가 어려운 것이지 한 번 하고 나면 두 번 세 번 하는 것은 그렇게 힘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배반이라는 것도 처음 하기가 어려운 것이지, 한 번 하고 나면 두 번 세 번 하는 것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한 번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두 번 세 번 배반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저들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용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은 실용성이라는 측면에서 판단하면 대부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베다니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 식사할 때에 한 여인이 귀한 향유가 든 옥합을 깨트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을 때에 제자들이 그 여인을 향하여, 왜 그 귀한 향유를 허비하느냐고 책망하면서,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훨씬 실용적인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실용성으로 보면 제자들의 말이 맞지 않습니까? 이 여인의 행위는 실용적으로 보면 제자들의 말처럼 허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만 두어라고 하십니다. 왜 저 여인을 괴롭게 하느냐고 하시면서 저는 실용성으로 판단하는 너희들보다 지금 내게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은 실용주의가 아닙니다. 신앙에는 실용성보다 더 귀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적으로 살아갈 때에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허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이런 관점에서 한 번 조명하려고 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이 앞 장면을 먼저 한 번 볼 필요가 있습니다. 1~14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요 21: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요 21: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요 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요 21: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요 2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요 21: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요 21: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요 21: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요 21: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요 21: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요 21: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요 21: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요 21: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요 21: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여러분 1~14절속에는 제자들이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고기를 잡는 장면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처음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도 저들은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의 고기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제자들은 그물질을 하였지만 단 한 마리의 고기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른 쪽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였더니 많은 고기를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고기를 끌고 육지에 올라오니 거기에는 숯불이 피어져 있었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이 놓여 있었습니다. 숯불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을 때에 베드로는 마당에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식사하는 장면은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탁을 함께 하는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오늘 조반 식사는 제자들이 준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친히 준비한 식탁인 것입니다. 뭔가 예수님께서 어떤 의도를 갖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장면들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장면을 연출하시고 베드로와 제자들을 만나는 것일까요? 제자들은 이 장면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요? 아마 저들은 지난날의 자신들의 모습을 회상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자기 자신들을 돌이켜 보니까 자신들은 실패자들임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한 때는 배와 그물과 고기를 포기하는 용단도 있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뜻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용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모두가 실패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은 제자들의 아픈 과거를 회상하도록 연출하시는 것일까요? 왜 저들의 실패를 다시 기억나게 하시는 것일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을 통해서 분명히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다시 사명자로 부르시기 위하여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을 대신하여 주님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에게 맡기기 위하여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대신하여 복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 사역은 실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사역인 것입니다. 실용에 의한 사역은 실패할 수 있지만, 사랑에 의한 사역은 실패가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복음의 사역은 실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 되어져야 하는 사역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실용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용적인 삶은 지금의 삶이 항상 도구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일주일이 뭔가 찝찝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뭔가 일이 잘 못 될 것 같아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도 있고, 또 예배를 드리면 내가 소원하는 일이 잘 풀릴 것 같아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예배는 다 실용적인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는 예배가 도구로 전락한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드리는 예배가 된 것입니다. 예배가 목적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따른 이유와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를 실용적인 예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가 실용적으로 된다는 것은 예배의 타락입니다. 예배는 무엇을 위한 도구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배는 그것이 곧 목적인 것입니다. 복음은 실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할 때에 그것이 곧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린다면 예배가 곧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 기도가 곧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봉사를 하면 봉사가 곧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섬긴다면 섬김이 곧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곧 목적이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외에 다른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한다는 것은 그것이 곧 목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서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어떤 보상이 필요하지가 않습니다. 사랑은 보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것 그것이 곧 보상입니다. 사랑하는 것 그것으로 나는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것 그것으로 나는 행복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어떤 물음을 하고 있습니까? 사랑을 묻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물음은 "사랑"에 대한 물음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질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하시는 질문은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실용성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실용성에 길들여진 삶은 자신의 삶이 항상 도구로 전락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곧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없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기도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찬양을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봉사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밥을 먹는 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곧 목적이요, 전부가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아루토르 토스카니니"라는 21세기 최고의 지휘자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지금까지 한 일들 중에 최고로 중요한 일은 어떤 일이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토스카니니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내게 있어서 최고로 중요한 일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요. 그것이 오렌지를 까는 일이든지, 아니면 지휘를 하든지 말입니다." 참으로 대가다운 대답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최고로 중요한 일이 되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여러분의 목적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그것이 최고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면서 산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에는 밥을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고, 걸을 때는 또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고,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될 때에 내가 비로소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일주일을 살면서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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