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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수님의 대답(요21;15~17)

예수님의 대답(요21;15~17)

 

예수님의 질문은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모든 인간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결국은 사랑하느냐는 물음입니다. 부부간에 있어서도 그렇고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다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우리는 이미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한 순간에는 사랑보다 돈이, 사랑보다 명예가, 사랑보다 다른 어떤 것이 더 중요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순간이지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영원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은 사랑을 먹어야 인간다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부부가 있었습니다. 대학원에서 논문심사를 앞두고 있는 딸, 그리고 회사의 임원이지만 명퇴의 압박을 받으며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과 함께 사는 전업주부의 아내가 살고 있는 가정입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아침 시간은 딸과 남편이 "여보", "엄마" 부르면서, 전업주부는 오직 자기들을 위하여 봉사해야 하는 것처럼, 자기들의 필요한 것들을 챙겨달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으면 그 책임은 고스라니 전업주부의 책임으로 돌아갑니다. 이날은 전업주부의 생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자신의 생일을 모른 체 여느 날처럼 자기는 가사 도우미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자 한 마디 외칩니다.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아내의 비명처럼 외친 한 마디를 듣고 출근한 남편은 점심시간에 아내를 불러내어 함께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점심을 합니다. 그리고 고급 포도주도 한 잔 같이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기가 할 일은 다 한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자 아내가 또 다른 것은 없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카드를 건네주며 백화점에 가서 사고 싶은 옷 한 벌 사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내가 또 다른 것은 없냐고 합니다. 그러자 남편은 나는 시간이 없어서 함께 갈 수 없다고 덧붙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여보! 사랑해, 아니면 여보! 고마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냐고 따지듯이 묻습니다. 아내의 이 말에 남편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웬 사랑타령이냐?"고 타박을 합니다.

남편의 타박에 아내는 정색을 하면서 남편에게 이혼을 하자고 합니다. 그러자 남편이 내가 돈을 안 벌어다 줬냐고 묻습니다. 남편은 열심히 돈을 벌어다 줬습니다. 부족함이 없이 살았습니다. 아내는 아니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내가 당신에게 폭행을 한 적이 있느냐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한 번도 폭력을 행사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내는 아니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내가 바람을 피운 적이 있냐고 묻습니다. 아내는 아니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남편이 그런데 왜 이혼을 하자는 것이냐고 따지듯이 묻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나는 더 이상 유령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요즘 오십대 주부들에게 "빈 둥지 증후군"이라는 병이 있다고 합니다. 우울증 중세와 비슷하여 심하면 자살 충동을 느껴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남편 출근하고 자식들도 학교로 직장으로 나가고, 자기 혼자 집에 남게 되었을 때에 생기는 "빈 둥지 증후군"은 인생의 허무감에서 오는 병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유령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빈 둥지 증후군"은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남편의 사랑, 자식의 사랑으로만 치료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남편들은 전업주부들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집에 있으면서 뭐하냐고 살림도 제대로 못하고 이런 식으로 타박하기가 일수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지 못하면 자신을 유령처럼 생각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면 자신의 실체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빈 둥지 증후군"과 같은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통하여 사람다움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물음은 "사랑"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되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빠지면 그 모든 것이 허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다움은 "사랑"으로 되는 것임을 잊지 말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옆 사람과 축복의 인사를 합니다. 사람다움은 "사랑"입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오직 사랑입니다. 돈이 사람답게 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사람을 사람답게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오직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옛 생활로 돌아간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사랑에 확신을 가지고 대답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배반의 경험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였지만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부활의 주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아십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는 것일까요? 지금 주님의 관심은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베드로야!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네가 확신하느냐?"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지금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사랑을 베드로에게 확신시키려는 것입니다. "베드로야! 너는 너의 배반으로 인해 나를 향한 너의 사랑에 대해서도 확신을 못하지? 내가 너를 안다. 하지만 베드로야 너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말라. 나는 아직도 변함없이 너를 사랑하고 있단다. 나의 사랑에 확신을 가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일4;10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때 자주 불렀던 찬양 중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곡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 받아야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변함없는 사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받은 사랑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사람의 사랑은 언제 변할지 모릅니다.

어떤 청년이 처음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 여자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영원을 꿈꿉니다. 그 사랑이 영원할 것처럼 얘기합니다. 그 얘기를 들은 엄마가 한 마디 합니다. 얼마나 가는지 한 번 보자. 사람의 마음은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를 수가 있습니다.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변하기 쉬운지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니"(17;9)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도 맹세하면서 결코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배반하느니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의지가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강한 사람입니다.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어떻게 하였습니까? 배와 그물과 고기를 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가족들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족을 포기하는 것은 그만두고, 우리는 몇 푼 안 되는 내 돈을 포기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그런 베드로, 배반보다는 죽음을 선택하기로 결단한 베드로의 마음도 변했습니다. 이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이 붙잡아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만이 나를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물으십니다. 세 번째 물었을 때에 베드로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근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근심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고 또 뒤집는 것이 아니야?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언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근심이 되는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의 근심은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대답을 처음 할 때부터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대답은 "내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내 양을 치라."는 것입니다. 먹이라는 단어의 원어는 '보스코'라는 말이고, 치라는 말의 원어는 '포이마이노'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와 세 번째는 내 양을 '보스코'하라고 하셨고, 두 번째 대답은 "내 양을 '포이마이노' 하라."고 하셨습니다. '보스코'라는 단어는 우리말 번역대로 꼴을 먹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포이마이노'라는 단어는 돌본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한 마디로 한다면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야! 내 양을 너에게 맡긴다." 예수님의 대답은 "베드로야! 내 양을 너에게 맡긴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주님을 향한 자기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근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내 양을 맡기겠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말을 들었을 때에 베드로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주님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나를 확신하지 못하는데, 나에게 주님의 양을 맡기겠다니요? 주님을 배반한 나에게 주님의 양을 맡기겠다니요. 나 자신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는 나에게 주님의 양을 맡기다니요. 주님의 양은 주님의 생명이 아닙니까? 아니 주님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주님의 양이 아닙니까? 주님은 양을 위하는 일이라면 당신의 생명도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양을 저에게 맡기겠다니요. 내가 어떻게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마음이 주님의 대답을 들은 베드로의 마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양을 너에게 맡기겠다는 주님의 대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한 그의 과거의 아픔 때문에 자기의 사랑에 대해 확신조차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야 너는 너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지만, 그렇지만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으라. 너의 지난 과거의 아픔 때문에 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에게 물은 것은 너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네가 확신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대답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같은 자가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내가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직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주님의 기쁨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목적입니다. 사랑이 목적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함으로써 목적을 이루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 자체가 주님의 목적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이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은 당신의 양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은 이제 베드로를 목자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제 너는 목자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라는 것입니다." "네가 예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네가 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네가 목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을 들으십니까? 부활의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답을 들으십니까?

근심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우리의 고백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언제 우리의 말이 바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근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주님의 양을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이 주님의 대답에서 어떤 주의 음성을 듣습니까? 네가 목자라는 것입니다. 네가 나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주님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 속에는 주님의 약속도 함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약속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은 내 이름으로 기도할 때에 내가 시행하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 속에는 이런 약속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약함과 허물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나가는 자가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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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가장낮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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