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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의 긍휼 / 엡 2:4-5 (신 311쪽)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큰 딜레마는 역시 

내 쪽에서의 행위 부분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어떻게 받습니까?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구원 인자는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 믿음, 누구든지, 등에서 어떤 것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구원의 핵심은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구원은 내가 능력껏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허락하시는 은혜입니다. 

주체가 내가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걸 아무리 설명을 하고 강조를 해도 

우리는 금방 내 쪽의 능력과 실력 쪽으로 가버리는 것 같습니다. 


구원의 모든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구체적이고 최종적인 계획을 다 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현실과는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구원의 사랑은 이미 충분히 만족하고 완벽할 만큼 공급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바로 그 내용입니다. 


4-5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는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이 없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자꾸만 되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어떤 것으로 되돌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신 긍휼이 아니라 내가 행하는 신앙의 행위 쪽으로 자꾸만 가고 있습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내가 택하고, 내가 행하고, 내가 결정한 쪽으로만 갑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측면보다는 

그저 매사 내 하고 싶은 대로, 

내가 할 만 한 것으로, 

내 의지와 내 노력의 정도껏으로만 빠지는 경향이 너무도 다분합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구원의 뜻과는 정 반대의 방향에 가있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왜 그렇게 중요하느냐면 

이것에 흔들리면 신앙생활 전체가 다 흔들려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엄마가 돈을 줘서 딱지를 사서 동네 친구들과 딱지치기를 했는데 엄청나게 많아 따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잔뜩 모아온 딱지를 되팔아서 엄마한테 받은 돈은 갚고, 

자기 혼자 집 나가서 이제 딱지도매상 차린다고 하는 겁니다. 

엄마가 나한테 왜 돈을 주셨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자기가 이룩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의 주인이 결국 자기라는 겁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이 온통 자기 열심으로 포장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해서 은혜를 차지하자는 겁니다. 


이단의 가장 큰 특징이 뭡니까? 

열심입니다. 

그저 맹목적으로 열심입니다. 

자기 잘 된다고 하니까 무조건 자기 혼자 뜨겁습니다.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왜 아닙니까? 

우리가 지금 누구 때문에 살아났는지를 제대로 확인해봐야 하는 겁니다. 

내가 살아난 것이 내 실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죽었던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다시 살리셨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이 시제는 과거시제입니다. 

이미 옛날에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지금 살리신 것이 아니고, 

또 앞으로 살리실 것도 아니라 

이미 옛날에 다 살리셨습니다. 


내가 언제 죽었었는데 나를 옛날에 살리신다는 말씀이냐고 물으신다면, 

이미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죄 안에 다 죽었던 자들입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상 적에 이미 다 죽었습니다. 

육신은 이 땅을 사는 동안 멀쩡하게 다들 살아있었는지 모르지만 

이미 그 영혼은 다 죽어 있었습니다. 

육신조차도 이 땅을 사는 날이 제한되어 있었던 죽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다시 다 살리셨습니다. 

누구 때문에 다시 살리셨습니까? 

나 때문에 다시 살리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정답입니다. 

모든 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내 공로와 내 실력과 내 의지의 산물로 내가 구원 얻은 것처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 어느 쪽으로 빠지느냐면 자기 열심과 자기 노력과 지기 의지 쪽으로 빠집니다. 

때문에 서로 간에 차별이 있고, 

편 가름이 있고, 

경쟁이 있는 겁니다. 


왜 우리 중에 다툼이 있고, 서로에 대한 반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외면하고 자기의 노력 쪽에 강조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다, 

나는 이렇게 한다, 

내가 한 게 얼만데 라는 쪽의 강조가 

결국 서로에게 대한 비교의식과 경쟁의식을 갖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의식을 교묘하게 이용해먹는 

세상적 방법의 신앙생활과 목회가 

우리 기독교 안에 이미 너무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겁니다. 


조금만 이익이 되고 

유익이 된다 싶으면 

온갖 감언이설로 속 알맹이까지 다 빼먹어 버립니다. 

누구 하나 새벽에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고 살면 

금방 이것도 저것도 다 맡겨서 

온 영혼육이 완전히 탈진할 때까지 다 빼먹어 버립니다. 

그러다가도 조금만 더 나은 사람이 왔다 싶으면 

또 그 쪽에다가 몰입을 합니다. 


때문에 지금도 너무 많은 배신이 이 바닥에 넘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무목교회는 저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룩하고 달성하는 어떤 공로의 탑이 아닙니다. 

나무목교회는 분명히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때문에 혹여 성도들의 생각이 

담임을 하고 있는 저하고의 뜻이 일부 맞지 않더라도 

다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정하고 고집하고 있는 것도 바꿀 수 도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교회의 본질을 헤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어떤 것이든지 다 가능한 것입니다.


살전 5:9-15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 

이 땅 살면서 서로에게 해야만 하는 것은 화목입니다. 


화목은 내가 먼저 이루는 것입니다. 

먼저 서 있는 자들이 나중 오는 자들에게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비워주고 양보하고 내려놓을 때 이루어지는 겁니다. 

나를 본 받자거나, 

나를 따르라거나, 

내게 동의하라는 것이 아닌 

그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용납하는 것이 바로 화목의 태도입니다. 


그것은 곧 나와 함께 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상대에게도 함께 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내 열심과 내 노력과 내 의지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 같은 것을 긍휼히 여기시어 함께 하라고 허락하신 지체들임을 인정하는 겁니다. 


물론 상대가 내 바라고 원하는 것에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뭡니까? 

그렇게 부족한 그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난 영혼이라는 겁니다. 

죽었던 영혼이 하나님의 긍휼로 새롭게 태어나서 이제 걸음마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른의 눈으로 볼 때는 다 미흡해 보이고, 한심해 보이고, 미숙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도 역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이를 내게 보내주시고, 함께 하라고 하심은 

내가 그보다 좀 더 성숙하기 때문에 

나더러 좀 책임지고 함께 걸어가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내가 행할 수 있는 화목의 은혜입니다. 


감사하게도 내게는 어린아이와 같은 그 지체의 신앙을 

어른의 신앙으로 키워가야만 할 거룩한 의무와 책임이 부여된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키울 때 기본적으로 어른의 태도가 어떠해야만 합니까? 

딱 한 가지입니다. 

어른의 시야를 버리고 아이의 시야로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른에 비해 모든 것이 다 늦습니다. 

때문에 바라보는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속에서 열불이 날 때가 많습니다. 


밥 먹는 것도 늦습니다.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담고 온갖 딴 짓을 다 합니다. 

애들 밥숟가락으로 하나 되는 그걸 목구멍 안으로 빨리 넘기질 못합니다. 

그걸 보고 있자면 밥숟가락을 탁 채서 그만 먹으라고 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다려야만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두 번 말해보고 나면 그만 두라고 하고 싶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딴 데 가서 잘 하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많아도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나무목교회의 형편이 그럴 때가 아니라서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자리에 앉아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닙니다. 


아직 미성숙하니까 기다려줘야만 하는 겁니다. 

자라지 못했다면 여기 아니라 다른 곳에 가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좀 더 자라기를 기다려줘야만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까?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개척교회를 하고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들을 바로 그렇게 기다려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우리를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오늘 우리들의 눈에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영혼들에게도 똑같이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판단하고 평가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기다려주면 됩니다. 

자랄 수 있도록 필요한 영양분을 우리의 것 중에서 나눠주고 기다리면 됩니다. 

그러다보면 나도 자라는 겁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힘과 그 크기가 대단한 것입니다. 


그 긍휼하심에 의해서 

오늘도 거룩하게 복되게 걸어가시고, 

아울러 허락하신 은혜의 지경을 더 넓게 귀하게 만들어가는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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