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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랑하지 못함 / 엡 2:8-10 (신311쪽)

예전에 제가 처음 교육전도사를 할 때, 

그 때 섬기던 담임목사님께서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하시면 

꼭 저를 같이 데리고 가셨습니다. 

물론 제가 봉고차 운전을 해야 하기도 했지만 

그 목사님은 저한테 목회를 좀 가르쳐 주시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막상 성도들의 가정에 심방을 가시면 

늘 같은 찬송에, 같은 본문 말씀으로 예배를 인도하셨습니다. 

찬송은 언제 어디서나 28장이셨습니다. 

성경말씀은 한결같이 시편 121편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달라지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나중에 저는 아예 성경찬송을 안 펴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는 사실 그런 목사님의 태도를 속으로 흉을 봤습니다. 

심방을 하면서도 심방에 대한 준비도 제대로 안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목사님의 마음은 딱 하나이신 것 같습니다. 

그냥 당신이 섬기는 모든 성도들의 모든 가정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를 원하시는 마음이신 것입니다. 


성도들의 가정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복을 받는 것이 

그 목사님 목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요, 강조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똑같은 말씀과 찬송을 반복하시는 겁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내용이고, 반복되는 내용이라면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만큼 우리가 틀리거나 실수하거나 지키지 못하기가 쉽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강조를 하시는 겁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말씀 중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단어가 바로 은혜라고 하는 겁니다. 

은혜의 원 뜻은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전혀 받을 만한 자격이나 조건, 

심지어는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은혜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미 너무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렇죠? 

교회생활을 좀 했다 싶은 성도는 벌써 귀에 따가리가 앉을 만큼 많이 들었을 말씀입니다.


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복음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하고, 

신앙생활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내내 들어야만 하는 겁니다. 


그와 반면에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뭡니까? 

우리가 이 부분에 있어서 너무 많은 실수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말씀을 계속해서 듣고 또 들어도 

늘 이 부분에서 우리가 망가지고 실수하고 넘어지고 자빠집니다. 


뒤에 나오는 9절 말씀까지 붙여서 읽으면 본문의 의미는 더 명확해집니다.


9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결코 자랑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누구든지 예외는 없습니다. 


그런데 꼭 나는 예외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아니 자랑한다고 생각도 못하면서 자랑을 남발하고 있습니다. 


예배당에 쉽게 나올 수 없는 요즘 같은 계절일 때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신앙생활의 훈장을 너무 많이 붙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훈장을 붙여 달고 뭘 하자는 겁니까? 


훈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선 생각해봐야만 합니다. 

훈장의 기본적인 성격은 우선 남에게 자랑하자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잘 되었다고 하는 것을 자랑해서 남들에게 동기부여를 하자는 겁니다. 

나라사랑, 전쟁, 선행, 수출 등등이 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더 많은 사람에게 함께 참여하도록 하자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함께 하는 것이면 크게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드시죠? 


그런데 그 생각이 이제 기독교의 근본적인 정신을 변질시키는 겁니다. 


기독교의 근본정신이 뭡니까? 


황금률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예배당 문턱을 몇 년 만 밟았더라도 

몇 번씩은 충분히 들어보는 말이 황금률이라는 단어입니다.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겁니다. 

그러나 이 황금률이 

지금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GIVE AND TAKE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셔야만 합니다. 

단순히 주고 받기가 아닙니다. 

주는 것이 있어야만 받는 것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냥 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상대가 있어서 그 상대에게 내가 뭔가를 바라고 주라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김치 한 포기를 상자에 담아서 보냈으면 

그 상자에 다시 귤이라도 하나 가득 해서 받을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는 도대체 뭡니까?


주는 것만 기억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주기만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받는 것은 누가 책임을 져주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을 져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근본정신인 섬김의 원리요, 도리입니다.


막10:44-4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런데 자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에 예수님을 원수처럼 보고 으르렁 대던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원수처럼 대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요? 

물론 자기들의 기득권이 침해받기 때문인 것도 있었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무슨 이유 때문에 그토록 예수님을 싫어했을까요? 


딱 한 가지이유입니다. 

자기들을 다른 죄인들, 세리나 이방인들과 

동급으로 취급하고 대우한다는 것 때문에 그랬습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열심과 종교적인 삶은 

분명히 죄인들이나 이방인들과는 전혀 다른데 

예수님은 그들을 그냥 몽땅 다 죄인으로만 떨이 취급을 한 것 때문에 

그토록 증오하고 싫어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람들 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죄악된 의식입니다. 

내가 남하고 분명하게 다르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른 것을 끊임없이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때문에 복음주의자라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가만 보면 언제든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요렇게 하고 이딴 거 해야만 하는 까다로운 규정들과 조건들을 너무 많이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 기독교를 타락하게 만들고 있는지 모릅니다.


누가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있건 그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식, 

재물, 

사람, 

일, 

권세, 

권위, 

명예, 

건강 등등 

어차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누가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그 앞에 자랑할 것도 없고, 

기죽을 것도 없고, 

배 아플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누구라도 별로 큰 의미가 없고,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결론이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한테 뭘 주셨다고 하는 것은 결코 그것을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주셨습니까? 

오늘 본문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10절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보다 더 정확한 답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비하신 선한 일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선한 일이 뭡니까?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도 서로 지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 겁니다. 


때문에 누가 뭘 시작하더라도 같이 한 번 해보자는 겁니다. 

누구 하나가 교회 안에 율법을 끌고 들어와서 

이렇게 저렇게 비교하고 잘난 척 하는 것을 그냥 봐주질 못합니다. 

기어코 자기도 같이 다른 것으로 잘난 척을 해줘야만 속이 시원한 겁니다. 

넌 십일조 한다고? 

그럼 난 이런 거 한다! 

너 새벽기도 한다고? 

그럼 난 부지런히 전도한다.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지가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고, 

상대방의 코를 납작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서로 그 싸움을 계속해서 하는 겁니다. 

결국 서로 망하는 겁니다. 

상대방의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하는 일이나 말에 대해서 가만히 지적만 하는 것은 정말 쉽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설교를 여러분이야 늘 듣는 설교니까 

그저 그런 것 같지만 실제로 여러분이 한 번 해보실래요? 

제가 한 번 일일이 다 지적을 해드려 볼까요? 

아니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신앙생활에 대해서 

제가 한 번 대놓고 다 지적을 해볼까요? 

그것도 그냥 하면 그러니까 성경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야기를 해볼까요?


만약 그렇게 하면 모르긴 해도 난리가 날겁니다. 

자기는 자기 스스로를 잘 몰라요. 

때문에 남의 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쉽게 이렇다 저렇다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자기는 남보다 더 우월하고, 

훨씬 잘난 것임을 증명하는 수단을 삼을 때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 자기 잘난 척이 되면 

그건 바른 신앙생활이 되질 못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남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이런저런 의견도 받아들이고, 

또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사람들을 섬기고 가는 겁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서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자기 자신한테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만 적용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이젠 우리가 먼저 좀 더 성숙해져야만 합니다. 

아이들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더욱 사랑으로 섬겨주는 것입니다. 

나이 어린 사람한테 

내가 먼저 고개 숙이고 인사한다고 해서 

내 인격이 깎이는 것 절대 아닙니다.


지하철에서도 가끔 보면 

자리를 양보해주는 젊은이에게 

굳이 서서 가겠다고 앉으라고 하시는 어르신들을 뵐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참 보는 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그런데 꼭 그런 틈에서 얌체처럼 자기가 먼저 슬쩍 앉아버리는 중년들이 있습니다. 

전에는 그런 이들이 정말 미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 

이제 중간에 그렇게 새치기를 하는 그런 이들까지도 

이해하고 사랑하고 품어주는 넉넉한 이해와 사랑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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