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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수 안에서 / 엡 2:5-7 (신311쪽)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 우리가 갖고 있는 창조의 신앙에 대한 공격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과학이라고 하는 우리 인간의 노력의 산물을 가지고 

신앙의 영역에 대한 인간의 어리석기만한 도전이 점점 거세지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시간 안에 이제 사람이 사람을 만들어내는 일까지도 

가능할 것이라고 하는 전망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천주교를 비롯한 종교계에서 많은 반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노골적으로 사람까지 만들겠다고 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멀지 않은 장래에 곧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치료의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사람의 장기들이 곳곳에서 판매되게 될 것입니다. 

간 전문 판매, 심장, 대장 전문 판매와 같은 일들이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질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불가능한 것은 뭡니까? 

없는 것에서 있게 하는 창조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과학은 하나님께서 이미 다 만들어놓으신 

환경과 형편과 조건을 발견하고 이용해서 이루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때문에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만드신 것과 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왜 오늘 말씀의 서두에서 과학의 한계를 이야기하느냐면 

과학의 조합으로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없듯이 

우리가 행하는 신앙생활의 조합으로 우리의 구원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실력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다 완성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실에 대해서 뭐라고 개입할만한 여지가 조금도 없는 겁니다. 

우리의 구원이 결코 우리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물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의 핵심이고, 

절정이고, 

완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구원은 이미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것이 김이 빠진 사이다 정도가 아닙니다. 

앙꼬 없는 찐빵이 아닙니다. 

이미 그것은 사이다가 아니고, 찐빵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절마다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 입니다. 


이 단어가 공연히 양념 삼아서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명색이 기독교니까 그래도 그리스도라는 단어와 예수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자는 의미에서 들어 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우리의 구원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여전히 우리가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만 산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호흡을 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삶은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 3:16-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살아있으나 이미 죽은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죄에 대해서는 죽었고, 

의에 대해서는 살게 된 자들입니다. 

때문에 구원은 이미 다 완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는 믿는데 구원받는 데까지만 믿고 그 나머지는 전혀 믿지 않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우리들의 신앙 수준의 한계가 드러나고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안에 발생하고 있는 모든 신앙적인 문제들이 다 어디서부터 나타나느냐면 

이제 내가 혼자 잘 해보겠다고 하는 것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한마디로 자기 감정과 자기 마음과 자기 열심을 믿는 겁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은 더 이상 필요 없고, 

이제 내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의 신앙생활을 해가려고만 하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 주변을 한 번 보세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 일들을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주장들을 하는 겁니다. 

구원에 이르는 것에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좀 더 성숙해가고 성장해가고 철들어가는 신앙생활이 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인격이 성숙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가지고 될 것 같습니까? 

전혀 가능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하면, 

내가 마음만 먹고 하고자만 하면 다 될 것 같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스스로의 생각 중에서 괜찮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내가 육체의 소욕 가운데 붙잡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가만히 한 번 스스로를 생각해보세요. 

내가 정말 의로운 일을 위해서,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것도 아니면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고민하고 염려하고 있을까요? 

명분은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다 자기 욕심입니다. 

내 자존심 상한 거, 

내 대접 받지 못한 거, 

나 알아주지 않는 것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우리가 이미 구원을 자들이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고 살아도 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 반대입니다. 


교회의 머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세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신앙생활의 머리인 것입니다. 


머리의 지시로 몸이 움직인다는 것은 다들 상식으로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제 우리가 꼼짝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는 로봇이 된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훨씬 더 깊은 차원의 은혜와 사랑이 숨어 있는 겁니다.


7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여기 이 말씀의 은혜를 제대로 잘 이해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따르고 살게 하려고 강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놀랍도록 

풍성하고 엄청나게 들어 있음을 알게 해주시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우리를 통해서 더 많은 세대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기를 원하고 바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이 

어느 정도의 기쁨과 감격인지를 사실 우리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막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쯤에 할머니 댁을 자주 들락거렸습니다. 

이유는 딱 하나였습니다. 

할머니 댁의 냉장고에는 언제든지 아이스크림이 잔뜩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녀석의 생각에는 자기가 가기만 하면 

냉장고에는 아이스크림이 자동으로 있는 것처럼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스크림을 누가 갔다 놨을까요? 

손자가 아이스크림을 잘 먹는 것을 기뻐하신 할아버지가 

주머니에 돈만 있으면 사다가 채워놓으신 겁니다. 

비록 돈이 들지만 

돈이 드는 것에 비해서 손자가 먹는 것을 보는 기쁨이 더 큰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누리는 그 기쁨의 크기를 짐작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을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정말 하나 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뿌리는 아픔으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 땅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기뻐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무 희생 없이 그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신 것이 아닙니다.


고후 5:20-21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를 알지도 못하신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신 겁니다. 

이 희생의 크기를 아시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까 다 감당하셨겠지 라고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산다면 

그 삶은 당연히 희생과 고난과 손해 보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는 삶이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다움의 기준은 

얼마나 손해 보고, 

얼마나 희생하고, 

얼마나 고난을 당하느냐 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잘 되느냐가 결코 아닙니다. 

만약에 지금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눅 9:57-58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는데 그래도 따라오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이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예수 안에서의 삶은 희생과 손해와 고난을 통해서 얻는 기쁨을 누리는 겁니다. 

뼈를 깎는 것 같은 아픔으로 내 것을 내놓고 살면 

찾아오게 되는 영혼 깊은 곳에서의 기쁨입니다. 


인간적으로, 세상적으로 가지는 기쁨의 깊이가 아닙니다. 


우리 나무목교회의 성도들이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하면 

적어도 희생과 손해와 고난 정도는 거뜬하게 지고 가는 은혜로 가득하셔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느끼셨던 기쁨의 맛보기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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