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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고린도전서 1:10~17)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고린도전서 1:10~17)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을 전도하려 할 때 자주 듣는 말 중에 하나가 “교회 가봤자 사람들 싸우는 꼴 보기 싫어서 아예 안 나갑니다.”라는 말입니다. 또 교회 다니다가 낙심한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볼 때에도, 자기가 옛날에 다니던 교회 안에서 목사와 장로가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고 그 이후로 신앙생활을 그만 두었다는 소리들을 흔히 듣게 됩니다. 이처럼 교회 내의 분쟁은 예나 지금이나 교인들로 하여금 시험 들게 만드는 이유들 중에서 몇 번째 안으로 손가락 꼽을만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인삿말이 끝나자마자 당장 경책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고린도교회 안에 벌어지고 있던 분열과 파당의 문제였습니다. 앞으로 고린도전서의 본론이 전개되면서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문젯점들이 등장하겠지만, 사도 바울은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 당장 해결되어져야만 할 급선무가 바로 이것이라고 보았던 까닭에 제일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고린도교회 내의 분쟁과 분열은 어떻게 해서 발발된 것이었습니까? 오늘날 역시 지상교회 안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싸움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야기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1.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과 다른 말을 퍼뜨리는 교인이 바로 교회를 마음으로 나누고 있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의 본론이 시작되는 제일 첫 줄 10절에 기록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형제들아’라는 호칭을 고린도전서에서 39회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른 바울 서신들과 비교해 볼 때 그 빈도수가 최고로 많은 것입니다. 이 호칭이 두 번째로 자주 사용되는 바울 서신들, 즉 로마서와 데살로니가전서만 해도 각각 19회밖에 사용되지 않았고, 다른 서신들은 훨씬 더 적습니다. 즉 바울은 그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더욱 각별한 사랑을 품고 있는 가운데서 이런 엄한 경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남을 권면할 때 이보다 더 간절하면서도 동시에 권위 있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기독신자라면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이 권면을 들으십시오’라는 말 앞에서는 절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잘못 행하고 있는 교인까지도 여전히 귀중한 형제로 여기고, 그런 교인을 가르치는 권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두는 것 - 이것만이 교회가 마땅히 시행해야 할 권면의 참된 방법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분쟁’이란 말은 ‘갈라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고린도교회가 벌써 현실적으로 나뉘어졌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미 영적으로 내분이 일어나고 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으로는 이미 갈라진 상태가 교회 안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쟁이 점점 더 크게 발전하여 교회가 완전히 쪼개어지는 일을 막기 위해서는 「다 같은 말을 하고…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했습니다. ‘같은 마음’이란 생각하는 방식이 같음을 의미합니다. ‘같은 뜻’이란 한 문제를 두고 서로 같은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일단 그렇게 속이 같아야 겉으로 나오는 말도 ‘같은 말’이 될 수 있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밖으로 나오는 말이 같으면 그 말을 내게 되는 속이 같은 것이고, 그처럼 속이 같으면 이미 온전히 합하여져서 나뉘어질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나오는 말이 꼭 같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무슨 단체에서 공식 대변인이라는 것을 두어서, 자기 당이나 자기 회사의 입장을 꼭 한 입을 통해서 공적으로 알립니다. 그래야만이 서로 엇갈리는 소리가 나올 수 없고, 자기 단체의 단합이나 일치를 더욱 잘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다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그 마음과 뜻이 같다는 것과 직결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공식 대변’이란 것은 바로 강단의 설교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 오가는 모든 말들은 바로 이 설교 말씀, 오직 이 공적 선포에 대하여 단 한 마디라도 서로 엇갈려서는 아니됩니다. 그러므로 교회 일을 해 나갈 때 당회에서 결정된 사실과 예배 시간에 광고하는 말이 다르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가 하는 말과 장로가 하는 말이 교인들 귀에 달리 들리는 일이 생기면 절대로 안됩니다. 설교 시간에 함께 들은 말씀과 교인들끼리 친교하는 자리에서 입으로 나오는 말이 달라서는 아니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밖으로 나오는 말이 다르면, 이미 속에서는 금이 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들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선포하는 진리가 동일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영적 사고 구조가 같아져야 합니다. 온 교인들이 그처럼 한 가지 영적 사고 구조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강단에서 전해지는 설교, 이것만이 교회의 유일한 공적 선언이 되어야 하며, 모든 교인은 오직 그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간증하고 전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비록 서로가 다 다른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이처럼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을 가지고 각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일함으로써, 진정 마음으로 하나되는 교회를 지키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특정 목회자에 대한 호감을 떠벌리는 교인이 바로 교회 내의 분쟁을 책동하는 자입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1장 11절 이하 16절 말씀에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글로에’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달리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만 어쨌든 고린도와 에베소를 오가던 교인이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 글로에란 사람 편으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라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이 말은 ‘나로서는 들어도 도무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소식을 들었다.’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그 소식이란 곧 고린도교회 안에서 ‘분쟁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분쟁을 야기시킨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러 목회자들에 대한 편애심이었습니다. 당시는 아직 신약 성경이 집대성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던 까닭에, 교인들은 예수님의 화육 이후의 복음 사건들에 대해서는 사도들의 육성 설교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여러 사도들의 개성이 다른 목회 철학이나 설교 스타일이 교인들에게 각각 다르게 와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설교의 주제 즉 복음 자체는 분명 꼭같은 것이었지만,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 꼭같은 것에는 주의하지 않고, 전달자들의 개성적인 차이에 ‘각각’ 그만 빠져 들어가 버렸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바로 여기에서 아주 심각한, 큰 편차를 내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원래가 학문이 풍부하고 성격이 온화한 데다가 받은 영력이 또한 보통이 아니었으며, 거기에다가 고린도교회를 설립했던 초대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니 그가 고린도교회를 떠나 있던 그 시점에도 여전히 그를 특별히 흠모하던 교인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볼로 역시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사도로서 성경공부를 잘 가르치는 은사가 특별했습니다. 그 역시 고린도에서 사역한 일이 있었다고 사도행전 19장 1절에서 밝히고 있는데, 그때 또 그를 좋아하는 교인들이 많이 생겼을 것입니다. 나중에 고린도전서 16장 1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아볼로더러 고린도교회를 다시 방문하라고 ‘많이 권하고’ 있습니다만, 아볼로는 계속 사양하고 있습니다. 아마 아볼로도 고린도교회 내에 그처럼 목회자들에 대한 편애 때문에 파당이 생긴 것을 알고, 자기가 지금 당장은 가지 않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게바 즉 베드로는 두말할 것 없이 예수님의 수제자이며, 또한 카리스마적인 인격과 대중을 휘어 잡는 설교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당연히 그 베드로를 만난 기회가 있었을 것이며, 또한 그런 스타일을 좋아한 교인들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즉 자칭 ‘그리스도파’라고 불리운 무리는 정확하게 그 내용을 알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증언을 중시하는 신자들이었든지, 아니면 남들이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는 것을 보면서 자기네들만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교만해 하던 무리들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처럼 목회자들에 대한 제각기 다른 선호도 때문에 파당이 생긴 것을 듣고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교회에서 자기가 직접 세례 준 사람이 적은 것을 두고 이제 와서는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감사할 정도였습니다. ‘그리스도와 가이오’는 바울의 전도에 의하여 기독신자가 된 자들이고, 스데바나 역시 마찬가지인데, 바울은 이 몇 사람들에게만 직접 세례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직접 세례 주는 것을 자제한 이유는, 아마도 초신자들이 자기와 인간적으로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막으려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는 순회 전도하는 사람이니 자기와 개인적으로 너무 가까워지면 그들이 다음 목회자를 영접할 때 방해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확실히 접붙이게 되는 신앙 생활에 방해가 될까봐 그렇게 조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항상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지만, 세례 받는 사람 쪽에서는 그런 식으로 오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유명 인사의 사인 받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듯이, 다른 사람 아닌 사도 바울에게서 세례 받았다는 것이 무슨 특별한 세례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교인들이 당시에도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 준 집례자에 따라 세례의 효과가 달라지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은, 어느 목사에게 주례 받느냐에 따라 그 결혼의 행복 정도가 결정되지 않는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고린도교회의 분쟁은 사도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 결코 아니라 어디까지나 교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어느 목회자를 더 좋아하는가 하는 이 문제가 극대화되면서 야기된 것입니다.

교인도 사람이고 목사도 사람인지라, 어느 목사를 더 좋아하는 차이는 생길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어느 목사를 특별히 흠모하고 끔찍하게 사랑하고 남달리 받들어 모신다고 하면서, 그 자체가 마치 자신의 진실하고도 열정적인 신앙생활인 것으로 착각할 때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게 됩니다. 목사 청빙하는 과정에서 교회가 쉽게 나뉘어지는 것이라든지, 어느 한 목사가 교회를 떠나면 아예 본인 신앙생활이 끝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자신을 남 앞에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교인을 오히려 극도로 조심해야 합니다. 부교역자들을 보고 “저는 어디든지 목사님만 따라 나가서 신앙생활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교인이야말로 정말 문제아 중의 문제아인 줄 알아야 합니다. 특정 목사를 따르는 것이 신앙생활 그 자체인 줄 아는 교인, 자기가 좋아하는 한 목사를 남달리 잘 받들어 모신다고 떠벌리는 것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귀히 모시는 것과 직결되는 것처럼 여기는 교인, 바로 이런 교인들이 앞으로 교회를 갈라 놓는 데 제일 앞장서게 될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결코 특정 목사의 팬 클럽이 될 수 없습니다. 정말 훌륭한 목사님을 모시고 있으면, 그 목사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그 목사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진짜 사랑하고 경외하도록 가르치고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모실 줄 아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제대로 모르는 교인이야말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가장 위험한 인물입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7절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세례를 무시하는 말이 결코 아니라, 세례보다는 복음 전파가 그 자신의 사명의 본질임을 밝힌 말입니다. 목사는 다른 종교의 사제들처럼 어떤 의식을 집례하는 것이 주요한 사명이 아니라, 복음 전파하는 것 자체만이 유일의 사명이며 최고의 사명인 것입니다. 마가복음 3장 14절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실 때에도 제일 먼저 강조하신 사명이 이것이었습니다. 세례는 두말할 필요없이 기독교의 제일 중요한 두 성례 중에 하나이지만, 그것조차도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제일 사명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전도하며 세례 준 목적은 자기 개인의 팬을 모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똑바로 인도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행하시는 구속 사역에는 조금도 더할 수 없음을 재차 천명했습니다. 아까 13절에서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느냐」고 했습니다. 아무리 바울이 큰 사역을 해도 그가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속죄 사역을 베풀어 준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혹 신학자들이 가끔 쓰는 ‘바울의 기독교’라는 표현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그 누구보다도 바울 자신이 펄쩍 뛸 노릇입니다. 아무리 신약 성경을 쓰고 많이 전도하고 해도 바울에게는 속죄 사역의 능력이 없고, 아무리 그가 세례를 많이 집례해도 바울의 이름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세례가 집행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직접 세례 주는 것을 자제해 가면서까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기 사역을 통하여 나타나기를 고심했던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핵심, 이 신앙의 주제, 이 교회의 구심점에서 벗어나서 사람의 ‘말의 지혜’를 서로 내세우고 서로 견주게 되면 곧 분쟁이 일어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어떤 목사는 쉽고 재미있게, 어떤 목사는 강력하고 뜨겁게, 어떤 목사는 깊고 오묘하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지상교회의 목사들은 각각 자기 나름대로 받은 ‘말의 지혜’를 사용하여 설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와 사도들을 그렇게 사용하셨듯이, 오늘날 목회자들 역시 로보트처럼 꼭같이 쓰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개성을 살려서 다르게 사용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좋은 설교가 은혜로운 이유는 그 설교자 때문이 아니라, 그 설교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임을 정확하게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이 그 전달하는 사람 때문에 가리워져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누가 설교해도 그 설교의 내용,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이 핵심만을 붙잡을 줄 알아야만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지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십자가 은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 교회에서 말을 높이기 시작하면 그 교회는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대속 은혜 때문에 눈물 한방울도 흘려 보지 못한 사람이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 그 교회가 갈라지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말의 지혜’로 자기 신앙 없음을 가리우려 하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 항상 있습니다. 아니 ‘말의 지혜’가 ‘십자가 복음’보다 더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수두록 합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야말로 교회에서 소위 ‘입바른 소리하는 사람’이라고 자랑하는 바로 이런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가장 큰 문제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몇 십 년 동안 섬긴 노하우가 있다.’라든지, ‘내가 이 교회를 위해서 지금까지 이런 공로를 쌓아왔다.’라는 따위가 바로 실상은 교회를 깊이 쪼개어 나누고 있는 말들입니다. 아직 무슨 직분이 없고 아직은 교회에 큰 봉사할 힘이 없다 해도, 일단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이 복음의 진짜 알맹이만큼은 확실히 믿고 체험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신 이 교회에 확실히 붙어 있는 한 지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나뉘어질래야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요지부동의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 그리스도의 몸되신 교회에 분쟁이 생기고 분열이 생기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분명 그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출석은 하고 교인 명부에 이름은 올라 있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연결되어 있지 않는 교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애당초 원래가 붙어 있지 않으니 사소한 일만 생겨도 금새 나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단이 신자들을 시험하려 할 때 가장 즐겨 사용하는 작전이 바로 교회 내의 싸움입니다. 교회 내에 분쟁이 생기는 것이 다른 교인들이 다 못나서 그런 것이라고 속단해서는 아니됩니다. 교회가 갈라지는 것이 목사가 똑똑치 못한 까닭이라고 책임 전가를 해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남 욕하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다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바로 이 경향교회에서 실제로 영적으로는 나뉘어져 있는 교인이 아닌지 조심해서 살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말을 하는 사람, 목회자를 편애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고 세상 지혜만 가지고 있는 사람 - 이런 교인들이 오늘도 교회를 나누고 있습니다. 교회의 본체와 같이 생각하고 교회의 목사와 같이 말하는 교인, 목회자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날 줄 아는 교인, 세상에서 자랑하던 것 다 버리고 오직 십자가 은혜만 아는 교인 - 이런 참된 지체가 되어서 이 주님의 교회를 더욱 온전히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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