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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고전 1:26-2:5)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고전 1:26-2:5)(고전 1:26-2:5)고린도전서 1장 26절~2장 5절 1장 26절~2장 5절

 

  한 이년 전에 제 아들 영은이 앞으로 ‘전국 청소년 지도자 모임’이라는 자리에 초대하는 특별 초청장이 하나 왔습니다. 초대된 청소년들은 열흘 동안 워싱턴시의 한 장소에서 숙식하면서, 정부와 사회의 고위 인사들의 강연 등을 통하여 일종의 지도자 훈련을 받는 모임이었습니다. 영은이에게 참 좋은 기회가 되겠다는 생각은 금시 들었는데, 자세히 읽어 보니 비용이 꽤 비쌌습니다. 보아하니 미 국회와 직접 관련 있는 단체에서 주도하는 모임이고 또 전국에서 특별한 학생들에게만 보내는 초청이라면 그 비용도 그쪽에서 미리 조금이라도 마련해 줄 법 한데,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문에 몇 주일을 망설이다가, 신청 마감을 한 주일 쯤 앞두고서야 마음을 먹고 신청서를 보내었습니다. 그런 후에 답장이 왔는데, 이미 신청자가 다 찼기 때문에 제 아들은 대기자 명단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먼저 신청한 학생들 중에 취소한 숫자가 별로 없었는지, 결국 제 아들에게는 차례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참 아쉬웠습니다. 만약 그 초대한 쪽에서 경제적인 조건들까지 완전히 구비해 두었더라면 저는 분명히 당장 응답했을 것인데, 그렇지 못했던 까닭에 그 좋은 초청을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는 초청, 즉 ‘소명’은 어떠하겠습니까? 그 부르심 자체는 죄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니 정말 귀중한 기회임에는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초청받은 쪽에서 덧붙여 내어야 할 무슨 비용이나 추가로 성립시켜야할 무슨 조건 같은 것이 딸려 있지는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초청에 따른 응답은 과연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1. 하나님의 부르심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조건이 이미 완비되어 있는 초청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로부터 29절에 기록하기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고, 그들이 제일 처음 구원의 길로 초청받았을 때의 상황을 돌이켜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들의 형편이란 정말 아무 것도 내놓을만한 것이 전무했습니다. ‘육체를 따라’라는 말은 헬라어의 관용법으로서 ‘세상적인 관점에서 생각할 때’ 혹은 ‘세속적인 기준에서 볼 때’라는 뜻으로 쓰였던 말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더 말할 나위조차 없고, 그저 인간적으로만 생각해 보아도 그들의 형편은 전혀 스스로 자랑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 중에서 ‘지혜 있는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즉 세상에서 알아 줄만한 고학력 출신이나 사회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나 무슨 상류 사회 출신의 신자가 극소수였던 것입니다. 세상 사회에서도 별로 인정이나 환영받지 못할 그런 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는 ‘부르심’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곧 개인의 능력이나 업적은 적어도 기독교인이 되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상관도 되지 않는 것을 분명히 증거해 줍니다. 일단 군대 들어가면 그 전에 사회에서 좀 더 좋은 학교에 다니고 좀 더 잘 살고 했던 차이들이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런 것 가지고 어깨에 힘주어 보았자 아무 쓸모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상급자에게나 동료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될 뿐입니다. 일단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얻어 꼭같이 신자가 되고 교회의 일원이 된 자들에게는, 세상에서 따지던 지식이나 능력의 차이란 것은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그대신 상관이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본문에 「하나님께서… 택하사」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 강조되어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이미 선택해 놓으신 자를 때가 되매 불러 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 즉 소명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다른 조건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그처럼 일방적인 선택에 의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좀 더 똑똑한 사람이 예수를 잘 믿게 하신다든지, 좀 헌금 더 많이 하는 사람에게 천당 입장권을 주신다든지, 남보다 더 착하게 사는 정도에 따라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지 않으시고, 그처럼 혼자 다 결정하시고 행하시는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이라는 미약한 존재가 절대자 되신 하나님 앞에서 단 한 가지라도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생긴다면, 그 자체가 이미 말이 아니 되는 모순입니다.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그것은 그 절대자가 참 신이 아니든지, 아니면 그 절대자를 섬긴다는 사람 쪽에 엄청난 착각과 교만이 있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은 다 하나님 앞에서 상대가 못될 줄 알면서 유독 구원 문제만은 자기의 힘으로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대자연과 우주들 앞에서는, ‘인간의 힘이 미칠 수 없는 영역을 다스리는 절대자 운운’ 합니다. 그러면서도 인간 자신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자기 스스로의 양심 작용이나 선행으로써 신을 감동시켜서 그 신으로 하여금 자기를 구원해 주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 정말 얼마나 이율배반적이며 무례한 신성 모독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건방지기 짝이 없는 소리를 아예 꽉 막아 버리시기 위하여, ‘아무 육체라도’ 그 아무리 지혜롭고 실력 있고 착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만큼은 절대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하여, 이 구원 역사 역시 전적으로 당신의 뜻과 계획과 능력만을 동원하여 성취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장 30절과 31절 말씀에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구원을 위한 모든 조건을 이미 완전히 충족시켜 놓으신 가운데서 그 택자를 불러 주셨으니, 그 부름 받은 자는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된 것입니다. 신자가 되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불러 주신 그 덕택에 그저 공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일단 학생이 대학교에 입학하면 그 학교 자체가 바로 그 학생의 면모요 특권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세상 지식은 모자라도 이제 예수님의 ‘지혜’를 머리와 마음속에 입력을 받은 자들입니다. 아무리 우리 성격에 약점들이 많아도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뒤집어쓰고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구원의 조건을 채울 능력이나 보답할 힘조차 없다 해도, 그것과 아무 상관없이 그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주도 하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이처럼 간단하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누구도, 그 무엇을 두고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구원이 사람의 구도자적 자세나 수도적인 노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벌써부터 인간이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는’, 실로 교만하고 건방진 행위가 됩니다. 단 한 가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도 말하기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셔서 예수 안에 있게 해 주신 것, 그 덕분에 내가 구원의 지혜를 얻고 구원 받을만한 의로움을 거저 입게 되고 구원받은 자답게 거룩하게 사는 생활을 하게 되고, 그 덕분에 그 십자가를 통한 사면의 특권을 누리게 된 바로 이것만 세상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학교 시절에 성악을 하던 제 친구 하나가 오페라에서 주역으로 나오게 되었었는데, 고맙게도 초대권까지 제게 보내 주었습니다. 저는 그 초대권 덕택에 그 웅장한 연주회장의 좋은 자리에 앉아서 아주 멋진 오페라를 잘 감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초대권을 받고 온 사람 중에 입장할 때 또 돈 내고 표사고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정말 바보가 아닌 담에야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미 그 초대권에는 그것을 받은 사람이 그 연주회장에 입장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다 해결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보짓을 하는 사람이 정말 이 세상에 있습니다. 바로 구원받기 위해서는 사람 쪽에서 좀 더 보충해야 할 조건이 있다고 생각하는 종교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구원의 초대권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는데, 그것 받고도 사람 편에서 무슨 선행이니 공로니 하는 것을 내어서 또 다른 추가 입장권을 하나 더 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았을 때에는 조금도 망설일 것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뭔가 어렵지 않을까?’, ‘교회 나가면 이것저것 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 짐이 되지 않을까?’라고 염려할 필요가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청에는 우리 편에서 뭔가 덧붙여야 할 무슨 경비나 조건부가 전혀 딸려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부르시기 전에 모든 필요한 조건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벽하게 채워 놓으신 후에 그 택한 자들을 불러 주시기 때문에, 우리 편에서는 이처럼 ‘무조건적인 초청’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불러 주실 때에는 사람 편에서 아무 것도 덧붙일 필요가 없도록 모든 것이 완전하게 충족되어 있고 준비되어 있는 초청인 것을 믿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은, 택자는 성령의 감화감동에 힘입어 응답하게 되어 있는 초청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절부터 5절까지 말씀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기록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란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고린도를 방문하여 전도하기 시작했을 때를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18장 5절에 보면, 그때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한 복음의 주제는 그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하는’ 것뿐이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전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했다’라는 말은, 무슨 철학적인 토론이나 세속적인 변론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고린도뿐 아니라 바울은 어디를 가도 항상 그랬습니다.

고린도 바로 전에 아덴에 전도하러 가서 아레오바고를 방문했을 때에도 바울의 그런 자세는 똑 같았습니다. 그 아레오바고라는 자리는 일종의 반원형 극장 같은 곳인데, 당대 최고 수준의 토론과 최신 정보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자리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묘사하듯이 문자 그대로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서조차 바울은 단지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을 증거했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무슨 대학 교수들과 청중들이 모여 철학 토론을 벌이는 자리에 가서 느닷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 구원 받습니다’라고 외친 격이었습니다. 만약 마음만 있었다면 사도 바울이 그런 철학적 토론을 못할 사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다소라는 이방 지역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당시 로마 사회의 최상류층 문화에, 헬라 학문 세계의 최첨단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유대 사회에서도 당대 최고 학부를 졸업한 수재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야말로 얼마든지 기독교와 철학을 적당히 접목시켜서 재미있는 수사와 논리를 전개할 실력과 재주가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철학적 논쟁을 벌여서 그네들을 압도하고 기독교를 변증할 실력까지 얼마든지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변론으로 전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복음이란 것이 머리 잘 돌아가고 어려운 말 잘 알아듣는 사람만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또한 사도 바울은 그의 전도가 결코 ‘지혜의 권하는 말’이 되지 않도록 하려 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아니 많은 목사들까지도 기독교 전도를 무슨 ‘좋은 말로 권하는’ 수준으로만 취급하고 있습니다. 복음 증거를 세상의 흔한 카운셀러들이 하는 말과 비슷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는 근본적으로 ‘권하는 말’이 아니라 ‘선포’ 그 자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안 믿고 사는 것보다는 그래도 믿으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부드럽게 선택을 권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 믿으면 천당 구원이요 믿지 않으면 지옥 영벌이다’라고 사실 그대로를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이 바로 전도의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기독교가 ‘지혜’, 즉 이성적인 논리나 판단을 전적으로 배격하거나 부정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세상의 그 어떤 최고 지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 그 자체를 능가할 수 있는 구원의 복음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구원의 복음이 어떤 깊은 지식 체계에 근거한 것이라면, 정말 똑똑한 사람만 이해하고 믿고 구원 얻을 수 있었을 것이며, 무식한 사람은 그 무식한 죄 때문에 구원 얻을 길이 막혀 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아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을 하고 그것만을 증거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기만 하면, 빈부차이나 지위고하나 지식유무를 막론하고 그 어느 누구도 간단히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구원의 길인 줄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 2:3)는 말은 바울이 사도가 된 후에도 인간적으로는 여러 가지 결함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0절에 보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향하여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비판했다고 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하여튼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 전도 사역을 할 때, 그는 사람을 끌만한 특별한 매력이나 카리스마를 소유한 사람은 못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의지했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 보다 구체적으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었습니다. 비록 어눌한 말로 전도한다 해도, 서툰 화술로 전도한다 해도 택자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게 되는 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 순간에 직접 역사하시기 때문이며, 사도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철석같이 의지했으며 또한 무수히 체험했습니다. 이론적으로 얻게 된 믿음은 그보다 더 정교한 이론에 의하여 무너질 수 있지만,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심기어진 신앙은 아무리 교묘한 이론이 공략해 와도 끄떡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이처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택자의 심령에서 작동하면 그것으로 만사 오케이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영접하고 믿게 되는 것이 그 성령께서 그 사람의 심령 속에서 작동하신 명백한 증거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택자는 바로 그런 믿음으로써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초청을 받는 사람이 그 초청을 수락하는 답장을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 답장을 보냄으로써 그 초청이 확정되듯이, 부름 받은 택자는 성령의 감화감동을 통하여 믿음이라는 반응을 하나님 앞에 나타냄으로써, 소명에서 시작되었던 구원은 영생이라는 마지막 과정까지 틀림없이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예수 믿는 마음이 생기게 만든다는 것은 실로 얼마나 신기하고도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입니까? 세상에서 그처럼 똑똑하고 돈많고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자기 죄 때문이라는 것을 믿고 눈물 흘리게 되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동시에 세상에서 그처럼 무식하고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도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입고, 이제는 누구 앞에서도 당당히 ‘주 안에서 자랑하는 자’가 되는 것도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런 일은 절대로 인간의 양심이 해낼 수 없습니다. 이런 능력은 절대로 인간 자신의 노력이나 선행을 통하여 나타날 수도 없습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사람의 마음을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끌리게 만들고 믿고 고백하게 만드는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 성령 하나님의 감화감동하게 하시는 능력이 나타날 때만 가능한 일인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내가 예수 믿기 전부터 유독 남달리 선행을 많이 쌓았다고 기특하게 여겨서 하나님께서 날 불러 주셨습니까? 내가 남보다 더 똑똑해서 기독교 복음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주셨습니까? 우리들 중에 아무도 그렇게 부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는 그 죄값에 대하여 전혀 무력한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다 해결할 것 해결해 놓으시고 우리를 불러 주신 까닭에 그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된 자들입니다.

사람의 종교적인 능력, 영적인 우수성, 양심의 발전이 구원을 성립시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것은 초대도 받지 않았는데 자기가 마음대로 찾아가서 문 열어 달라고 대문을 두드리고, 주인 허락이 없었는데도 ‘나는 이 잔치상에 앉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하고 스스로 앉을 자리를 찾으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구원은 결코 그런 주객전도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구원의 주체가 되신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먼저 불러 주심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며, 그 부르심을 받은 자는 아무 다른 조건이나 댓가를 지불할 필요도 없이 그저 믿기만 하면, 그 구원은 결코 취소되거나 백지화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쉰들러의 리스트’라는 영화에 보면 그런 장면이 있지 않습니까? 주인공 쉰들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들 중에서 자기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여 겨우 허가를 얻어 내게 됩니다. 그래서 그 수용소에 잡혀 와 있던 유대인들 전원이 도열해 있는 가운데서, 쉰들러의 리스트에 적혀 있는 이름들만 하나하나 호출됩니다. 그 이름 불리움을 받게 되는 그것만이 바로 살 수 있게 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옛날에 쉰들러의 공장 직원이었던 유대인들조차도 자기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방도가 없었고 아무리 용을 써도 무력한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지 자기 이름이 불리어지는 것 - 그것 하나만 가지고 모든 것이 꿈처럼 다 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생명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쉰들러가 이미 다 완벽하게 해결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쉰들러가 자기 전 재산을 다 털어 가면서 그 생명들에 대한 값을 다 치루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 유대인들이 해야 할 것이라고는 자기 이름이 불리어졌을 때 그저 앞으로 한발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쉰들러의 리스트에 의하여 자기 이름이 불리어질 때, 그들 중 아무도 그것이 자기를 개스실에 집어넣기 위해 부르는 것이라고 의심할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름 부르는 것이 바로 자기 생명을 살려 주는 호명인 줄 철석같이 믿고 정말 꿈같은 감격에 떨면서 한발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 틀림없는 죽음에서 기적같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명,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이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죄로 인하여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처지에서 우리 편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내 아이큐 아니라, 세상에서 최고 석학의 지혜를 동원한다 해도 아무 방도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내 능력 가지고 어림도 없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에서 최고 강한 것, 높은 것, 부한 것 다 모아서 맞바꾼다 해도 도무지 거래가 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하나님 편에서 먼저 다 해결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로써 우리 생명에 대한 값을 이미 다 치루어 놓으신 후에, 우리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하여 우리가 더 이상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다 이루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하여 우리가 더 이상 ‘알아내어야 할 것’조차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성령께서 감화감동해 주시는대로 믿기만 하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는 소명은 어떤 추가 수속이 필요한 복잡한 초청이나, 부름 받은 쪽에서 뭔가 재고해 보아야 할만한 소지가 남아 있는 초청이 결코 아닙니다. 제 발로 하나님께 나아올 지혜도 능력도 없던 우리들을 위하여 먼저 모든 것 다 해결해 놓으시고 택자를 불러 주시는 이 하나님의 완벽한 초청에 오직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오로지 감사 감격에 떨면서 그 꿈같은 구원의 자리를 함께 누리는 경향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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