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박봉수목사

하나님의 설득 예레미야 1: 11~19 절

하나님의 설득 (2/15)
본 문예레미야 1: 11~19 절
설교자박봉수 목사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미지는 상반됩니다. 대개 아버지는 엄격한 권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시하고 문제를 지적하고 야단을 칩니다. 그래서 자녀를 훈육해 갑니다. 반대로 어머니는 자애로운 사랑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해해 주고 기다려주고 설득합니다. 그래서 자녀를 인격체로 빚어갑니다.

성경을 보면 대체로 하나님은 아버지의 이미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두려운 경외의 대상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 반드시 순종해야 하고 만일 순종치 않으면 징계하시는 분으로 비쳐집니다. 죄인을 정죄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미지는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이미지와는 무척 다릅니다. 낯설고 생소한 이미지입니다. 차라리 어머니에 가까운 이미지입니다. 저 여성신학자들이 말하는 ‘하나님 어머니’라는 이미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렘 1장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모습과는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1:5를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나님께서 친히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신다는 사실을 알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응답이 걸작입니다. 그 말씀을 듣자 울기부터 합니다. 그리고 핑계를 댑니다. 6절에 보면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아이처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지자 노릇을 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핑계를 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달래십니다. 7절을 보면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그러니까 “말 잘 못해도 괜찮다. 네가 할 말은 내가 다 일러 줄테니 너는 그것만 가서 전해라”고 설득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꼼짝하지 않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가 겁을 먹고 있음을 아시고 또 달래셨습니다. 8절을 보면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겁을 먹지 말라 내가 함께 갈 것이고 문제가 생기면 너를 지켜줄 것이다”라고 설득하신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 손을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며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말씀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쯤이면 “아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레미야가 아직도 아멘을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1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하나님께서 또 예레미야를 달래시고 설득하셨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1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하나님께서 또 예레미야를 달래시고 설득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를 달래고 설득하는 모습 바로 그 모습입니다. 속이 까맣게 타면서도 참고 견디며 설득하는 바로 그 모습입니다.

저는 사랑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면 늘 고전 13장을 떠 올립니다. 그 중에 7절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참아주셨고, 믿어주셨고, 바라주셨고, 또 견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참아 주고 계십니다. 우리를 믿어주고 계십니다. 우리를 바라주고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견뎌주고 계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이렇게 주님 앞에 나올 수 있고, 오늘도 이렇게 은혜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왜 그렇게도 아멘을 하지 못했을까요? 당시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대였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요시야 왕이 죽은 후에 우상숭배가 극성을 부리고 영적으로 어둠이 너무도 짙게 깔렸던 시대입니다. 국외적으로는 바벨론이 등장해서 당시 근동의 패권을 장악하고 정복의 길에 나서서 지리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던 유다의 멸망은 이제 시간문제로 남았던 절박한 시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되 심판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유다의 죄 때문에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것이라고 선포해야 했습니다. 차라리 바벨론에게 빨리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이라 외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민족주의자들, 국수주의자들에게 매국노라고 비난을 받아야만 될 형편입니다. 자기 백성들의 멸망을 선포해야 하고 나아가 동포들에게 민족의 반역자 소리를 들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아멘하지 못했습니다. 핑계를 대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의 속을 까맣게 타게 하면서도 버티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레미야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쉽게 아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레미야가 절박한 상황 속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했다면 아멘 했어야 합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적 위기 가운데서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방황하는 저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했다면 아멘 했어야 합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면 아멘 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뜨거운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면 아멘 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이 자신에게 정말 영광된 길이요 복된 순교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아멘 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면 아멘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면 아멘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내 입장만 생각하니 아멘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저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이 생각이 되니 아멘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멘 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설득이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오래 참으시면서 예레미야를 또 설득하십니다. 예레미야가 꼭 알아야 할 말씀을 확인시켜주십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한 가지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살구나무 가지의 환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살구나무 가지를 보여주시면서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살구나무 가지를 보여주셨을까요? 팔레스틴 지방에서 살구나무는 우리나라에 매화처럼 아직 추운 겨울인데 흰 꽃을 피우면서 봄을 예고해 줍니다. 다른 모든 나무들은 추위에 죽은 듯이 움츠리고 있을 때 살구나무만 생명력을 자랑하면서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나무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솨케드(dqev;)라고 불렀습니다. 

이 솨케드라는 말은 히브리어 동사 솨카드(dq'v)에서 왔습니다. 이 말의 뜻은 “지킨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추운 한 겨울에서도 하나님께서 이 살구나무의 생명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셔서 추위 속에서도 꽃을 피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살구나무를 보게 하셔서 장차 추운 겨울 혹한 속에서도 살구나무를 지켜주신 것처럼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지켜주실 것을 약속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앞에서 약속하신 그 말씀들은 반드시 지킬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레미야가 사역을 해야 할 때는 따뜻한 봄철이 아닙니다. 싱그러운 여름철도 아닙니다. 찬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는 혹독한 겨울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데 아무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말씀하셨는데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그들의 말은 듣지만 예레미야의 말은 듣지 않습니다. 모두가 예레미야의 말이 잘못됐다고 손가락질 합니다.

그 때 예레미야도 자칫 믿음이 흔들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정말 내가 외치는 이 말씀이 옳은 것인가? 모두가 그렇지 않다고 하는데 나만 그렇다고 하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 의심이 들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환상을 다시 기억했을 것입니다. 한 겨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살구나무를 지켜주시고 꽃을 피게 하신다는 것을 저가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 모두가 다 다윗을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시 22:8에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모두가 다윗의 믿음이 잘못됐다고 손가락질했습니다. 말하자면 다윗의 신앙생활 역시 한 겨울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다윗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더욱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 또한 자기 나름대로의 살구나무 환상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때로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한 겨울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모두가 다 손가락질하고 나 자신도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살구나무를 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보았던 그 살구나무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고,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13-1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또 다른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끓는 가마가 북에서부터 기울어져있는 것입니다. 가마가 펄펄 끓고 있는데 그 가마가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그 내용물이 이제 남쪽으로 흘려 넘치기 일보직전입니다.

이것은 당시 저 북쪽에서 일어난 신흥강국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해서 저 펄펄 끓는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참혹한 고통이 임할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급한 재난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살고 있는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감당키 힘든 재난이 임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살자고 대중 인기몰이에 영합하고자 하는 유혹도 받았을 것입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조용히 가족들만 데리고 피난 갈 생각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역자라고 공격을 받으면서도 매국노라고 조롱을 받으면서도 예루살렘 거리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아도 다가오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끓는 가마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남쪽으로 기울어져 흘러내리려 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예루살렘 성에 다니며 임박한 재앙을 전했습니다.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심지어 유대인들에 의해 애급으로 끌려가 처참하게 죽어가면서도 말씀 전하는 일을 그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끓는 가마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렘 4:19을 보면 예레미야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 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 네가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그리고 렘 20:9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왜 이렇게 고백하고 있을까요? 끓는 가마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심령 속에 이런 불붙는 마음이 있습니까?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끓는 가마를 보았습니까? 다급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으로 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뜨거운 눈물로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려야 합니다. 지옥이 있음을 전해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 반드시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17-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시 격려의 말씀으로 저를 설득하십니다. “일어나 고하라, 두려워 말라, 너를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 성벽이 되게 하였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큰 고통 가운데로 가게 될 것이다. 네가 말씀을 선포하지만 저들이 듣지 않고 너를 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고통을 없애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레미야가 고통당할 때 그 고통 속에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와 함께 그 고통을 당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오래 됐습니다. 교인 가운데 한 분이 장례식을 마치고 인사차 들렸습니다. 그분이 뜻밖의 인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 정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이제 막 20이 넘은 아들이 불의의 사고를 변을 당해 죽었습니다. 오랜 세월 독신으로 이 아들 의지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 충격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답니다. 제가 다만 그 아들을 한 두 번 본 일이 있어서 문상만 다녀왔습니다. 너무 슬픔이 크고 기가 막혀서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분 손을 잡고 한 10분 정도 앉아있다 온 것뿐입니다.
그분 말씀이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자기의 고통 속에 함께 참여했고, 자기의 고통을 나누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큰 위로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우리에게 그 고통이 있어야 할 것도 아십니다. 그래서 고통을 없애주시기 보다는 우리의 고통 속에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어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고통 속에서 예레미야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고통 때문에 예레미야가 죽는다든지,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받는다든지, 그리고 절망의 나락을 떨어지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고통을 이기고 승리하도록 이끌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눈물의 골짜기가 다가와도 결국 우리는 그 골짜기를 벗어나오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이 여러분을 뒤 덮고 있을 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그 고난과 역경을 겪고 계시고, 결국 여러분을 그곳에서 건져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설득하시는 분이십니다. 강요하시거나 억지로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깨닫고 순종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설득을 받아들여서 순종하고 담대히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