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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있는 삶 빌립보서 3장 12~14절

한 잡지사에서 앙케이트 조사를 위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물었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가장 많은 사람들이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답니다.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살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다.”라고 답한 사람도 많았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사실 오늘 현대인들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묻는 것조차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 안에서 뛰는 것처럼 무엇엔가 쫓기듯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더듬이 잘린 개미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처럼 갈 길을 잃은 채 방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요?


어떤 삶


본문 1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은 지금 자기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푯대를 향해 좇아가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푯대를 향하여 좇아간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말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 경우에 사용하던 말입니다. 하나는 달리기 경주에서 선수들이 골인 지점을 향해서 전력질주 할 때 쓰던 표현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냥꾼이 표적을 정해 놓고 집요하게 추적하며 사냥할 때 쓰던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달리기 선수가 골인 점을 향해서 한 눈 팔지 않고 전력 질주하는 것처럼 목표를 정해 놓고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냥꾼이 표적을 정해 놓고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처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애쓰며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목적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뿐이 아닙니다.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은 모두가 바울처럼 목적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 어부로 살던 사람입니다. 하루하루 고기 잡으며 평범하게 살던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인생의 목표랄 것이 따로 없는 “그럭저럭”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뒤에 그의 삶이 변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라는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세우게 됐습니다. 그 목표를 향해서 전력질주하게 됩니다.

모세는 젊은 시절 인생의 꿈을 다 접고 나이 80에 평범하게 양을 치며 살던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호렙산에서 여호와를 만난 뒤에 변했습니다. 내 백성을 인도하라는 사명을 받고 그 목표를 향해 전력질주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목적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만난 뒤에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이렇게 바꿔주십니다. 인생의 푯대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 푯대를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주 안에서 인생의 푯대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 만난 뒤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의 변화입니다.


연전에 TV 프로 중에 어린 아이를 추적하던 것이 있습니다. 한 번은 유치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아이를 추적했습니다. 그저 걸어서 5분이면 될 거리입니다. 이 아이가 유치원 앞 가게에 들러서 신기한 듯이 이것저것에 한눈을 팝니다. 시장 통에 접어들어서 약장수의 원숭이 쇼를 한참이나 구경합니다. 집에 오는 길에 자기 또래 아이들 노는 것을 또 넋을 잃고 지켜봅니다. 무려 5분 거리를 1시간이 넘게 걸려서 왔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없는 삶이 그렇습니다. 이것저것에 한 눈 팝니다. 그 삶에 초점이 없습니다. 그 삶이 한 없이 늘어지고 권태롭습니다. 인생을 마감할 때가 가까우면서 “나는 뭐하고 살았나?” 자책하게 됩니다. 그 허무함과 쓸쓸함에 힘겨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이 정해진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것저것에 한 눈 팔지 않습니다. 무엇인가에 초점이 맞춰 있습니다. 발걸음이 분주합니다. 인생을 마감할 때가 가까울수록 보람의 열매를 더 풍성하게 맛보게 됩니다. 복된 인생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사 43: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또한 사 43:2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분명한 목적을 정해 놓으시고 창조하셨습니다. 다른 피조물들과 다른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목적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을 우리 삶의 푯대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푯대를 향하여 최선을 다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어떤 목적


본문 1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바울은 자기의 인생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

원래 바울은 나름대로 인생의 목표가 있던 사람입니다. 야심이 대단했던 사람입니다. 일찍이 고향 다소에서 예루살렘으로 청운의 꿈을 안고 유학했습니다. 유대교에 철저히 헌신해서 당시 신흥종교로 골치 아픈 존재였던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그는 유대교에서 촉망받는 차세대 인물이었습니다. 이제 최고의 랍비가 돼서 한 시대를 풍미할 야심 찬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 순간 그는 온전히 그분께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자기를 붙잡으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됐습니다. 이제 그 이유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바울은 그동안 자기가 꿈꾸던 그 모든 것들을 다 오물처럼 버리게 됐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주시는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얻어진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세운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께 잡힌바 된 그것에서 우리의 인생의 목적을 세워야 합니다.

요사이 주목 받기 시작한 우리 사회의 새로운 흐름 가운데 하나가 “웰빙”(well-being)입니다. 말 그대로 “웰”(well) 즉 “건강한, 만족한, 행복한” “빙”(being) “삶”을 살자는 문화적 흐름입니다. 이런 흐름에 편승한 사람들을 웰빙족이라 부른 답니다.

이 웰빙족들은 그야말로 건강한 삶을 추구합니다. 육체적 건강은 물론이고 정신적 사회적 건강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를 추구합니다. 이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 유기농 야채와 곡식으로 만들어진 신선한 건강식을 먹습니다. 헬스나 요가를 하고 스파 마사지와 아로마테라피를 받습니다. 문화행사를 즐기고 레포츠나 자기만의 여행을 즐깁니다. 시간 나는 대로 건강한 삶을 이루기 위해 자신에 대한 최선의 봉사를 합니다.

이 웰빙족들도 뚜렷한 인생의 목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건강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 목표가 자신에게 사로잡힌 것이라는 점입니다. 혹평을 해 보자면 나만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목표를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표를 잘 세워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목표여서는 안 됩니다. 자기 가족들에게 사로잡힌 목표여서도 안 됩니다. 또한 민족주의적으로 자기 사회나 국가에 사로잡혀서도 안 됩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주님께 사로잡힌 것이어야 합니다.

미국 교회 뿐 아니라 한국교회에 널리 알려진 미국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는 우리 인생의 목적과 관련에 귀한 교훈을 주는 책을 썼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인생”(The Purpose Driven Life)입니다. 이 책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의 목적을 잘못 설정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과 무관하게 인생의 목적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우연히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고 힘주어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계획하시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올바른 인생의 목적을 세우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그 목적에 부합한 우리 인생의 목적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제 하에 그가 제시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의 목적은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셋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다. 넷째,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이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다섯째, 우리는 사명을 위해 지음 받았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 목적이 주님께 붙잡힌 것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욕망에 붙잡혀있다든지, 여러분 가족에게 붙잡혀 있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주님께 붙잡혀있어야 합니다.


어떤 태도


본문 1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인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잡힌바 된 그것을 향해 어떻게 최선의 경주를 하고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 가지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2절에도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지금 바울이 이 빌립보서를 쓰고 있을 때는 로마 옥중에 갇혀 있던 나이 65세 전후의 시기 입니다. 이제 인생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입니다. 긴 세월 벅차게 선교사역을 마치고 정리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쯤이면 무엇인가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바울은 아직도 할 일이 남았다고 스스로를 채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땅 끝까지 가지 못했고, 아직도 주변에 잃어버린 영혼들이 있고, 아직도 복음을 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에 그는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은퇴하신 노 목사님 한 분을 뵈었습니다. “그렇게 바쁘시더니 요사이 어떻게 지내십니까?” 여쭈었습니다. 어르신 말씀이 “더 바쁜 것 같아. 전에 한 교회 목회하면서 얽매였던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전적으로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집중해서 기도할 수 있고, 주변에 소외된 사람들 찾아 돌볼 수도 있고...” 그 어른 말씀이 “담임목회에 은퇴는 있어도 신앙생활에는 은퇴가 없어. 목사로서 사역에는 은퇴는 있어도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역에는 은퇴가 없어”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제 와서 쉬라 하실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은퇴를 정하고 자기 스스로 다 이루었다고 물러서면 안 됩니다.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가 이루어 놓은 그 많은 일들을 잊어  버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칫 과거의 업적이 자기의 자랑이 되어 자기 발목을 잡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하면 됐다고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발달심리학에서는 인생을 크게 셋으로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청년시기까지는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시기입니다. 장년기는 현재와 씨름하며 사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노년기는 과거를 회상하며 사는 시기입니다. 많은 노인들이 더 이상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을 갖기 힘든 상황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하고 뒤돌아보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왕년” 이야기하고, 옛날 추억에 잠기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아직 다 이룬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라톤 선수가 골인 지점에 도착도 안했는데 “그동안 절반까지는 내가 1등이었다. 3/4까지는 내가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다”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달려야 할 거리가 남아있기 때문에 옛날이야기에 심취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직도 뛰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앞의 것을 향해 쫓아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앞의 것을 향하여 좇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성경 헬라어 원어는 에펙테이노마이(ejpekteivnomai)입니다. 이 말은 달음질 경주에서 주로 쓰이는 말입니다. 육상선수가 결승점을 향해서 달려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100미터 경기를 보면 선수들은 마지막 순간에 남보다 먼저 결승점에 도착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래서 선수들은 한눈 팔 여유가 없습니다. 뒤를 돌아본다든지 옆을 본다든지 관중석을 본다든지 할 여유가 없습니다. 오직 결승점만 보고 달리고 또 달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결승점에 가까올 수록 더욱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오직 푯대를 바라보고 최선을 다해 달릴 뿐이라는 것입니다.


1994년 4월 20일 미국의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때 괴한들이 캐시버널이라는 한 여학생을 향해 머리에 총을 들이대며 물었습니다. “너 하나님을 믿느냐” 그 때 그녀는 담대하게 답했습니다. “yes” 그 순간 괴한이 총을 난사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 일이 있습니다.

장례식에서 교목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사람들은 4월 20일 캐시버넬의 yes만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매일 매일 주님 앞에서 yes라고 답했던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늘 최선을 다해 달려갈 길을 달릴 때 마지막 골인 점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도 푯대를 바라보며 최선의 경주를 달리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목적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목적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목적을 가졌어도 자기 자신을 위한 목적, 자기 가족들을 위한 목적, 이 세상을 위한 목적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위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그 목적을 향해 오늘도 최선을 다해 달려갈 길을 달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