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이 죽어야 에서를 이길 수 있다/창32:1-32
글/옥한흠 목사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누군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 자기 생명이 위협받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처자가 안전하지 못하고 어떤 위기를 만나지 않을까 하는 것과 자신이 지금까지 애써 쌓아온 재산이나 소유물을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 다음으로 두려워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보면 어떤 사람은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처자에게 어려움이 생기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재산이 갑자기 날라 가기도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이 세 가지가 동시에 다 날라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들 세상 살기가 참 힘들다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번 가정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이 질문을 드릴 때는 한가지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믿음의 사람입니다. 영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위기를 대처하는 방법도 세상에 속한 육의 사람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처자와 재산에 대한 위협이 닥쳐올 때 그 위기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자녀다운 대답이 나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대답일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해 배우려고 하는 교훈입니다.
1.야곱이 처한 위기 창세기 32장을 보면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수천 년 전에 있었던 하나의 에피소드와 같은 이야기지만 그 속에는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값진 진리와 지혜가 담겨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의 불안으로 시달리는 분이 있습니까? 가정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이시간 야곱을 통해서 배우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잘한 점과 야곱의 잘못한 점을 분명히 살펴봄으로써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먼저 야곱이라는 인물에 대해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을 잘 모르시는 분들께는 참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관계로 여러분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일대기를 세세하게 설명 드리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설교를 들으시는 중에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싶으면 집에 가셔서 창세기를 차근차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야곱 하면 승부 욕이 강한 사람의 심벌로 통합니다. 그는 태어나면서, 아니 태어나기 이전 태 속에 있을 때부터 쌍둥이인 자기 형과 주도권을 놓고 씨름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형이 먼저 나오니까 그것이 못마땅해서 형 발목을 잡고 뒤따라서 나온 아주 이상한 아이입니다. 꾀 많고 욕심 많고 악착같고 승부 욕이 강한 성격 때문에 그는 나중에는 형의 장자권도 교묘하게 빼앗았으며, 아버지의 축복까지도 가로채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서 형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니까 부모 곁을 떠나서 외삼촌에게 도망가서 20년의 세월을 보내지 아니하면 안 되는, 어떤 면에서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외삼촌에게 가서도 그는 자기의 성격을 어쩌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악착같이 노력을 했습니다.
그는 외삼촌의 재산을 야금야금 삼켜 거부가 되는데 성공을 했고 자기 외삼촌의 두 딸을 자기 아내로 삼는데도 성공을 했습니다. 대단한 인물입니다. 마음만 먹었다 하면 못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입니다. 욕심과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는 사람입니다. 야곱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지금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20년의 더부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신다면 만나야 하고, 또 이제는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가나안 땅에서 터전도 잡아야겠기에 처자와 재산을 끌고 돌아오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으로서는 형 에서가 몹시 마음에 걸렸습니다.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형과는 아직 원수지간이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도 보면 먼 사람끼리 원수가 되기보다 가까운 사람끼리 원수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지 않습니까? 형제지간에, 심지어 부모자식간에 원수가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인생 역사에서 너무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년 지났다고는 하지만 형의 마음의 원한이 풀렸을 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형을 피해서 살그머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형은 이미 상당한 갑부가 되어서 기반을 닦고 가나안 땅에서 실력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형을 만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 에서가 그 동안 얼마나 변했는지, 자기에게 대한 감정이 아직도 변치 않고 남아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사자를 먼저 보내어 자기가 돌아온다는 것을 전갈하게 했습니다. 드디어 사자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와서 알려준 정보는 그야말로 기겁하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형이 장정 400명을 거느리고 자기를 맞이하러 온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진정으로 용서하고 영접하기를 원하면 한 십여 명의 사람만 데리고 와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기 밑에 있는 부하들을 다 끌고 나온다는 것은 전투부대가 동원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 형이 아직도 마음이 안 풀렸구나,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야곱은 밀려드는 공포감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결코 형과 대적할 만한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형이 칼을 빼든다면 상대해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고작 자기와 아들 10여명과 자기가 부리는 종들 몇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이 칼을 빼들고 달려들 경우 그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20년 동안 피 땀흘려 모은 재산과 처자들이 결단 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 문제였던 것입니다. 정말 위기 중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7절은 그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또 11절을 보면 야곱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속마음을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내가 주께 간구 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아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 야곱이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만났다는 것을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위기관리의 문제점 이와 같은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했을 때 야곱이 이 위기를 어떻게 대처했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굉장히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또 야곱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위기를 관리하는데 있어서도 세상 사람에게는 통할 수 있는 방법이 야곱에게는 통하지 아니 할 수가 있습니다. 또 세상 사람에게는 너무 어리석게 보이는 방법이 야곱에게는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꼭 마음에 명심하셔야 됩니다. 이것은 비단 야곱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형이 400명을 데리고 자기를 향해서 온다는 말을 듣고 야곱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자기 소유물을 두 떼로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수천 마리의 가축을 두 떼로 나누어 그 사이를 아주 멀리 떼어놓는 것입니다. 형이 칼을 빼들고 치고 들어온다 해도 두 떼를 동시에 치지는 못할 테니까 한 떼를 치면 다른 한 떼는 도망 갈 수 있을 것이라 계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라도 건지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가끔 보면 사업을 하다 부도가 난다든지 회사에 어떤 집이 담보가 되어 있는데 그 회사가 넘어갈 때쯤 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집 하나라도 건져보려고 자기 집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등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곱도 아마 이런 사람들과 비슷한 심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야곱으로서는 두 떼로 나눔으로써 하나라도 건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의 이런 행동을 보고 잘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잘못했다고 그를 비판할 수 없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가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집에 불이 났을 때 중요한 서류나 패물을 먼저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 누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야곱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이러한 행동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것은 불신앙의 행동이지 신앙의 행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은 자기가 오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 명령에 따라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1장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는 지금 함께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까지 받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야곱은 이 말씀을 잊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32장 9절 중간을 보면 야곱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그는 자기와 함께 하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약속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약속을 의지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 이기에 형이 400명을 이끌고 온다고 해서 겁을 집어먹고 재산을 둘로 나누고 법석을 떨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믿음으로 사리를 판단했더라면 허둥지둥하면서 수천 마리의 소떼와 양떼를 갈라놓느라 진땀을 빼는 그런 짓을 안 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야곱처럼 믿는다고 하면서 신앙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할 때가 가끔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절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진정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의 행동도 믿음에 일치시켜야 합니다. 야곱이 그 다음에 한 일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일단 재산을 두 떼로 나누어 놓아 자기 나름대로 안전 대책을 세워놓은 후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 없지만 제가 볼 때 그의 기도는 순서상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창세기에 기록된 순서를 액면 그대로 받는다면 순서상 문제가 있습니다. 기도하고 행동해야지 행동하고 기도하면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놓고 기도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자기가 머리 굴려서 할 짓을 다 해 놓고 그 다음에 엎드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보다 자기 자신을 더 믿고 있다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도는 급하니까 하는 기도이지 참으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구 하는 기도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야곱이 한 기도 내용을 봐도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의 기도를 보십시오. 얼마나 유창한 기도입니까? 나무랄 데가 거의 없는 완벽에 가까운 기도입니다. 9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돌아가라고 하셨고 내게 은혜를 베풀리라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가장 클래식에 속하는 기도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 아닙니까? 정확합니다. 누가 이 기도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10절에서는 20년 동안 외삼촌 집에 있을 때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너무 크다는 것을 고백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기도에서 감사가 빠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빠지면 그것은 기도라기보다 넋두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기도가 진짜 기도입니다. 지금 야곱이 그렇게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얼마나 멋있습니까?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너무너무 많이 주신 은혜 때문에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외삼촌 집에 갈 때에는 내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이 요단강 건넜는데 지금은 두 떼나 이루어서 거부가 되어 돌아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소이다."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얼마나 완벽한 기도입니까?
그 다음에 11절에서는 자기 마음에 있는 고통을 하나님 앞에 아룁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그는 "내가 주께 간구 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지시옵소서. 내가 그를 지금 두려워합니다."하고 간구 합니다. 얼마나 멋진 기도입니까? 마음에 있는 것들을 숨기지 않고 다 내어놓습니다. 그리고 12절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하나님이여 도우셔야 합니다. 약속대로 나를 도와주옵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도무지 흠잡을 데가 없는 기도입니다. 저는 이 기도문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자주 생각하고 어떤 때는 암송도 합니다. 그 만큼 훌륭한 기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기도는 문제가 있는 기도였습니다. 그것은 기도는 너무도 완벽하고 청산유수 같게 하는데 그 다음에 따라오는 야곱의 행동을 보면 전혀 그런 기도를 한 사람 답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혹은 우리 자신에게서 비슷한 사례를 많이 봅니다. 기도할 때 가만히 들어보면 얼마나 기도를 잘합니까? 성경을 줄줄 외워가면서 얼마나 청산유수같이 기도를 잘합니까?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한번 시켜 놓으면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요한 계시록까지 갑니다.
얼마나 대단한 지식입니까? 완벽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입담 좋은 사람들이나 문학적인 소질이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기도 문장 하나 하나가 사람을 녹일 정도로 얼마나 멋지게 기도합니까? 그렇게 멋진 기도를 한 사람이 그 다음에 그 기도를 한 사람답게 살면 그 기도가 살아나고 향기가 나고 능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멋진 기도를 하고 나서 전혀 그런 기도를 한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하면 멋지고 유창하고 성경지식이 화려한 그런 기도일수록 고약한 냄새가 납니다. 야곱의 기도에서 그런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야곱의 기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13절 이하에 나오는 야곱의 행동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야곱이 드디어 기도를 끝냈습니다. 그 정도로 멋지게 기도했으면 "하나님 믿습니다."하고는 "에서야 오라."하고 담대하게 행동하면 얼마나 보기가 좋겠습니까? 우리가 "야, 믿음의 사람이다."하고 존경을 하겠는데 야곱은 눈을 뜨자마자 다시금 야곱다운 교활함을 발휘했습니다. 소 떼와 양떼, 나귀 중에서 얼마를 떼어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물로 준비한 것이 도합 약 550마리나 되었습니다. 550마리면 대단한 것입니다. 돈으로 따지면 1억쯤 되나요? 사과상자에 한 상자 갖다 놓으면 될 만 합니까? 그 당시로 550마리면 엄청난 재산입니다.
물론 짐승 550마리를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선물로 보내겠다는 것이 나쁜 생각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선물을 준비하면서도 온갖 잔꾀를 부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릴까? 한 번에 550마리를 다 보내 가지고도 형의 마음이 누그러지지 않으면 그 때는 속수 무책이니까 그러지 말고 세 떼로 나누자. 제 1단계 뇌물을 보내서 안되면 제2차 뇌물로, 그래도 또 안되면 제3차 뇌물을 먹여가면서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자.' 이렇게 계산을 한 것입니다. 꼭 요즘의 누구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저는 얼마 전에 수서 택지 분양 업무를 몇 년 전에 총괄했던 어떤 공무원이 일년 동안 한보그룹의 누구로부터 얼마나 뇌물공세를 받고 시달렸는가 하는 것을 털어놓은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실토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얼마나 교활하고 부도덕하고 못 땠는지 100만원 주어서 안되면 그 다음에 제2차로 천 만원을 주고, 천 만원 주어서 안되면 1억을 주고, 1억을 줘도 안되면 3억을 준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을 삶아서 자기의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머리를 굴리고 교활하게 꾀를 부리는데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 같습니다. 그는 지금 '백 번 찍어서 안 넘어갈 나무가 있냐? 형이 아무리 원한의 골이 깊어도 내가 이 정도 하면 풀어질게다. 이렇게 돈을 가지고 입에 쳐 넣는데 지가 어떻게 할거나?'하는 식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멋진 기도를 한 사람 치고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바로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선물을 보내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기 보다 자기 지혜를 지나치게 의지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말입니다.
만일 교회가 건축을 한다든지 어떤 큰 프로젝트를 놓고 기도 중에 있는데 서류를 제출했더니 담당 공무원이 도무지 허락을 안 해준다고 해 봅시다. 그래서 한두 달 씨름하면서 모든 성도들이 전심으로 이 일을 위해 기도하는데, 어느 기도모임에서 "주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우리는 하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공무원이 말을 안 듣습니다. 담당 직원의 마음을 감동해 주십시오."하고 한참 기도한 다음에 눈을 뜨고 나서, 또 서로가 의논을 할 때에 "그 공무원 얼마 정도 먹이면 될 것 같애?" 하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다면 자기들의 기도와 얼마나 큰 괴리가 생기겠습니까?
만일 그런 소리를 했다고 할 때는 기도를 열심히 유창하게 했을수록 오히려 더 역겨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야곱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참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이면 위기를 타개할 때 약간 우직한 데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간사한 지혜를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소리치고 기도했으면 믿는 사람답게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 김수용 선교사라고 하는 귀한 분이 오셔서 간증 설교를 했습니다. 해양대학 출신의 1등 항해사로서 지금까지 10년이 넘도록 가족과 함께 오엠 선교회의 둘로스와 로고스 배를 타고 다니면서 선교하는 참으로 기가 막힌 분입니다. 지금은 로고스호를 타고 있는데 그가 간증하는 가운데 참 인상적인 이야기를 한마디 했습니다.
그가 둘로스호를 타고 다닐 때의 일인데, 당시 둘로스호는 동남아를 돌고 있었습니다. 둘로스호는 각 나라의 중요한 항구마다 입항을 합니다. 일단 어느 항구든지 입항을 하면 300명의 선교사들이 쏟아져 내려와서 선교도 하고 사람들을 배에 불러서 복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굉장한 사역입니다. 그런데 말레이지아는 모슬렘 국가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감정이 있어요. 둘로스호가 말레이지아에 입항하기로 예정한 날짜 보다 6개월 앞서 준비하는 팀이 그 나라에 들어가서 모든 준비를 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것이 입항 허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허가를 내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6개월 동안 준비하는 선교사팀이 기도하고 사방 팔방 노력을 해도 허가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내일 입항을 해야 하는데 아직 허가가 안 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선교사들이 뇌물을 들고 가겠습니까? 봉투를 들고 가겠습니까? 그저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할 도리밖에 없지 않습니까? 기도하다가 너무 답답해 가지고 준비하는 팀의 책임자인 스탠리 톰슨이라는 선교사가 이제는 마지막으로 총리를 직접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전 약속 없이 총리를 만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찾아갈 때 제일 걱정스러운 것은 경비실 수위를 어떻게 통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당신 누구요?' 할 때 '선교사'라고 솔직하게 대답해야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선교사'라고 대답하면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도 선교사님은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총리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둘로스와 로고스호를 타고 있는 오엠 선교사들은 배지 하나를 달고 다닙니다. 그 배지에는 GBA라는 글자가 씌여 있습니다. 이것은 'Good Books for All'의 약자입니다. '만민을 위한 양서'라는 뜻입니다. 사실 둘로스호는 백만 권 가까운 책을 가지고 있는데 가는 곳마다 성경을 위시하여 많은 기독교 서적과 좋은 서적을 전시도 하고 팔기도 합니다. 그래서 둘로스호 굴뚝에도 GBA라는 큰 글자가 있습니다.
힌두교 같은 나라에 들어갈 때 둘로스호는 '책을 가지고 전시하면서 다니는 배'로 입항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스탠리 톰슨이라는 선교사님 역시 GBA라는 배지를 달고 있었는데, 수위가 당신이 누구냐고 질문하다가 이 배지를 한참 보더니 선교사님을 무조건 통과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는 배지에 적혀있는 GBA라는 말을 Great Britain Ambassador의 약자, 다시 말해 '대영제국의 대사'라는 말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은 극적으로 총리를 만날 수 있었고,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입항 허가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보기에는 얼마나 우직한 방법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우직한 면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질 못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도한 다음에는 "주여 믿습니다." 하고 그저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짜야 합니다. 사람들을 만나야 할 때는 만나야 합니다. 부지런히 다니면서 문을 두드려야 할 때는 두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 믿음으로 기도한 사람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잠언 3장 5-7절을 여러분이 기억할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지어다." 야곱이 이런 말씀에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답게 행동하지 못했다는 것, 이것이 야곱의 기도까지도 문제가 있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결점이 없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 있습니다. 뉴욕 타임즈 기자가 한국은 지금 모든 사람들이 위기감에 쌓여있다고 표현한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위기라고 하는 말을 새삼스럽게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만약에 잘못해서 은행이 다 부도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은행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날리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암담한 상황은 언제든지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과연 기도한 사람답게 행동하느냐 하는 문제를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는 기도고 행동은 행동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위기를 바로 타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되어야 위기를 이길 수 있다 야곱이 계속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자 이제 드디어 하나님이 간섭하시기 시작했습니다. 32장 22절 이하를 보십시오. 야곱은 자기 머리를 짜서 형의 마음을 풀 수 있는 방법을 다 찾아서 대책을 세우고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도 얍복강 개울 물을 건너서 먼저 나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얍복강 나루터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캄캄한 밤에 갑자기 어떤 사람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아마 에서가 보낸 어떤 정탐꾼이라고 착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가지고 두 사람이 싸움이 붙었는데, 날이 샐 때까지 엎치락뒤치락 했습니다. 캄캄할 때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가 드디어 날이 새면서 얼굴의 윤곽이 드러나자 어 이 사람이 보통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야곱이 깨달았습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인지 모르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곱이 왜 혼자 남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왜 처자들을 다 떼어놓고 자기 혼자 얍복 강가에 앉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놓고 어떤 성경학자들은 야곱이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려고 했다고 해석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하면 소나무 뿌리를 잡고 사생결단으로 매달리려고 기회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야곱의 처지는 소나무 뿌리를 붙들고 늘어질 처지가 절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형 에서의 위협을 대처하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을 다 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더 해야 될 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그야말로 이판 사판입니다. 준비할 것은 다했습니다. 이제는 세상 말로 운명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에서가 와서 칼을 빼고 달려들지, 아니면 말에서 내려 자기에게 달려와서 부둥켜안고 울지, 아니면 저 건너편 산에 진을 치고 이쪽과 대결을 하면서 서로 긴장 속에서 보낼 지, 도무지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으로서는 자기가 인간적으로 해야겠다는 모든 준비는 다 끝냈습니다. 이제는 하려고 해도 더 할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할 때면 사람들은 보통 좌불안석이 됩니다.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서 있을 수도 없고, 눈을 붙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까운 가족까지도 귀찮은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좀 떼 놓았다고 봅니다. 그가 얍복강 가에서 과연 기도했을까요? 물론 기도도 하긴 했겠지만 제가 볼 때는 인간적인 심리로 보면 멍청하게 하늘만 쳐다보고 일어났다 앉았다, 왔다 갔다 하며 어찌할 줄을 몰라하는 모습이 바로 혼자 남은 야곱의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 같으면 담배꽁초가 이렇게 쌓일 정도로 피워대면서, 아니면 술을 있는 대로 들이키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것이 혼자 남은 야곱의 처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럴 때 기도가 잘 될까요? 흔히들 "아 그렇게 급하면 기도하면 되지."하고 너무 쉽게 말합니다만 그것은 진짜 막장인생이 어떤 건지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정말 막장으로 떨어져 보십시오. 그 때는 정말 기도가 필요한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 기도가 절실한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기도가 안 됩니다. 기도가 안나오는 것입니다. 절박한 궁지에 몰리면 하나님을 찾을 용기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그래서 멍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 최악의 궁지는 하나님의 해답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인생에 있어서 막장은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곳이라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창세기부터 성경을 계속 읽어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은 그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하나님은 야곱을 찾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는 최선의 길은 먼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눈앞에 임박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먼저 만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먼저 만나서 은혜로 풀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 에서 만나는 일에 더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은혜가 문제를 푸는 열쇠라고 여기지 않고 자기 지혜를 총동원하는 것이 열쇠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방법이 사람의 방법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은혜와 자연이 얼마나 다른가를 눈으로 확인하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에서라는 위기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지 자기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처자를 보호하고 재산을 지키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야곱의 속 사람이 강건하게 되는 것임을 그는 깨달아야 했습니다. 속 사람이 은혜로 강건해지면 에서가 두렵지 않게 될 것이요, 속 사람이 강건해지면 처자나 재산에 대해서 연연하지 않게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배워야 했습니다.
어떻게 이 값진 진리를 야곱 혼자 터득할 수 있었겠습니까?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며 앉았다 섰다 하는 그가 어떻게 이런 진리를 터득할 수 있었겠습니까?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그와 함께 씨름을 했습니다. 여러 시간 동안 씨름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면서 얼마나 가소롭게 생각했겠습니까? 여전히 자기가 살아있는 야곱입니다. 이름 뜻 그대로 간사한 사람입니다. 자기를 믿고 자신 만만한 사람입니다. 옛사람입니다. 그는 여기서 지면 나는 끝장이다 하는 생각 때문에 사력을 다해서 천사와 씨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눈에는 얼마나 가소로운 존재입니까? 에서를 이기기 위해서는 야곱이 먼저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안 죽겠다고 끝까지 버둥거렸던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그의 환도뼈를 쳤습니다. 엉덩치에 있는 중요한 뼈를 쳤으니 위골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위골이 되어 제대로 뛰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기가 막하지 않습니까? 지금 에서가 달려든다면 처자를 위해서,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제일 선봉에 나가서 싸워야 하는 사람은 야곱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에서와 맞서 싸우려고 하면 무엇보다 야곱 자신이 건강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환도뼈를 쳐서 일어나지도 못하게 만들어버리셨습니다. 야곱이 믿는 구석이 완전히 깡그리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어야 될 건강마저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이제 아무 것도 못하고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그 지경까지 몰아 넣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 심오한 진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자 드디어 야곱은 씨름하는 사람이 아니라 매달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디 누가이기나 보자.'하고 잡고 씨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환도뼈를 치시자 어린애가 아버지 손에 매달리듯이 질질 끌려가면서도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고 하자 그가 어떻게 말합니까?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아무 것도 믿을 구석이 없게되자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축복이 사는 길임을 절실히 깨닫고 "하나님이여 축복하여 주소서."하고 매달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호세아 12장 4절을 보니까 야곱은 천사에게 울며 그에게 간구 했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야곱이 죽은 것입니다. 꾀 많은 야곱이 꺾인 것입니다.
야곱의 자아가 이렇게 완전히 죽은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바꾸어주셨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야곱입니다." "너, 이제부터 야곱이라고 부르지 말라. 이스라엘이라 부르라."(28절)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요, 하나님의 왕자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죽었습니다. 드디어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기 꾀를 의지하는 사람은 꺾이고 오로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야곱이 정말 하나님을 이겼습니까? 저는 이 말을 볼 때마다 얼마나 웃음이 나는지 몰라요. 사실은 야곱이 하나님을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져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 다섯 살 짜리 어린애가 아빠와 씨름하는 장면을 한번 연상해 보십시오. 누가 이길까요? 두 말할 것 없이 아들이 이깁니다. 아빠가 아들을 집어던지겠어요? 조금 씨름을 하다가 아빠가 벌렁 넘어지면서 "아이구, 내가졌다, 졌어. 어쩌면 그렇게 힘이 세니."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린 아들은 입이 이 만큼 찢어져 가지고 제가 힘이 세서 아빠가 넘어진 줄 압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아빠가 져주는 것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져주는 아빠가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은 기가 살아서 눈만 뜨면 아빠하고 씨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야곱하고 씨름해서 질 수 있겠습니까? 야곱에게 져 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져주시는 것을 보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 하나님이 이토록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에서를 두려워할 이유가 뭔가?' 이런 생각을 하게된 것입니다. 이제 옛사람 야곱은 장사되고 새사람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스라엘로 태어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잔꾀 부리면서 있는 재주 다 피워 가지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그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만 에서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는 드디어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드디어 자기에게 일부러 져 주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사람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적, 우리의 위기, 에서를 이길 수 있으려면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이 되어야 합니다. 야곱이 되어서 에서를 만날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이 되어 에서를 만나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누굽니까? 자기가 믿던 것은 다 꺾이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부러 져주시는 은혜 그 놀라운 하나님을 만난 사람,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 이스라엘입니다. 그 사람 앞에는 위기가 위기일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는 믿음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강자입니다. 나중에 보십시오. 에서가 야곱에게 어떻게 나옵니까? 그 모든 감정의 앙금이 다 사라지고 껴안고 감격의 상봉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어떤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로 이 위기를 대처하기를 원하며, 이스라엘로 준비하고 있으면 모든 위기는 위기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은혜를 쏟아 부어주시는 새로운 기회요 새로운 도전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이스라엘이 되는 은혜와 축복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특별히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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