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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경, 어떻게 대할 것인가? (벧후 1:19-21)

성경, 어떻게 대할 것인가? (벧후 1:19-21)

 

  오래 전 한 선교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공산권 어느 나라를 여행 중에 공항에서 성경을 압수당한 일이 있었답니다.

  공항에 도착하자 공항 보안요원이 이렇게 묻더랍니다. “혹 총이나 마약이나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맡겨 두었다가 귀국할 때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놀랄만한 말을 덧붙이더랍니다. “이런 것들은 너무 위험한 물건들이라서 우리나라에서는 개인이 소지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더랍니다. ‘도대체 왜 성경이 총이나 마약처럼 위험한 물건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되더랍니다. 총은 사람을 죽일 수 있으니 위험한 물건이겠고, 마약은 사람을 황폐화시키니 위험한 물건이겠고, 성경은 사람을 변화시키니 위험한 물건이겠구나!

  그러면서 한 가지 깨닫게 되었답니다. ‘공산주의자들이야 말로 성경이 어떤 책인가를 제대로 알고 있구나! 성경을 읽으면 사람들이 새롭게 변화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구나!’

 

   그렇습니다. 성경은 정말 놀라운 책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책과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책입니다. 그 어떤 책과 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가진 책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깊어질수록 성경을 더 가까이 하게 되고, 또 마음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을 더 가까이 하고 사랑하게 되면, 또 믿음이 더 깊어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소아시아 여러 교회 성도들에게 성경에 대해 교훈하는 내용입니다. 이 교훈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성경을 가까이 하며 사랑하기 위해서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더 확실한 예언으로 믿어야 한다.

   1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베드로 사도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확실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확실한 이유로 드는 첫 번째 증거는 자신의 체험입니다. 마 17장에 나오는 대로, 베드로는 오래 전에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변화하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모습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6절에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베드로는 이 때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7절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들었던 말씀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놀라운 체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귀와 영광을 받으신 성자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자 하나님께서 직접 재림하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확실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체험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성경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재림하실 때까지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재림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밝혀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의 체험보다 더 확실한 예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체험보다 성경 말씀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지금 변화산 체험을 한 지 30여년을 지냈습니다. 당시 기억이 나름대로 생생하긴 하지만 그 기억 중에 희미해진 것도 있고, 알쏭달쏭한 것도 있고, 확실히 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음을 알게 됐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체험도 중요한 증거가 되긴 하지만 이것보다 기록된 성경말씀이 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억은 한계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시간의 한계가 있습니다. 체험한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집니다. 때로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저는 지금 초등학교 이전의 일들은 거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처음 교회 나갈 때 상황도 가물가물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셨던 놀라운 은혜의 체험들도 점점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갑니다. 아마도 더 나이 들어 80, 90이 되면 더욱더 희미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런 실상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이런 체험에 대한 기억 위에 세워 놓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을 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성경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내가 체험한 것보다 성경을 더 확실한 예언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이 성경 말씀 위에 굳건히 세워야 합니다.

 

  한 자매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성경 한 번 제대로 읽어보지 못해서 늘 마음속에 콤플렉스로 남아있었답니다. 그런데 교회가 통독 사경회를 한다고 해서 작심하고 참석했답니다. 무사히 1독을 했답니다. 그 후 자기 혼자서 한 달 안에 1독을 하기로 작심하고 어렵지만 하루에 39장씩 성경을 읽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동안 자기 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더랍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을 강하게 느낄 수 있더랍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려는 마음이 들더랍니다. 또한 왜 그런지 그렇게 눈물이 많아지더랍니다. 1독을 마치는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1사람을 전도하여 같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지켜줍니다. 우리의 믿음을 더욱 생생하게 살려냅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더욱 귀히 여기고 더욱 사랑하며 더욱 열심히 읽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

   본문 20절을 보면 “성경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믿고 의지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경을 개인적인 의도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는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풀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단들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의 이단들 대부분이 성경에 나오는 ‘동방’이라는 지명을 우리나라 곧 한국이라고 해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교, 천부교, 하나님의 교회, 영생교, 그리고 최근의 신천지 등입니다. 그 이유는 사 41:2과 46:11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동방에서 구원자가 나타난다는 말씀이 바로 자신들을 지칭한다고 풀이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아전인수격인 성경해석입니다. 사실 성경 어느 곳에도 동방이 한국을 지칭한다는 표현이 없을 뿐 아니라 당시 성경 저자들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성경에서 동방이라는 지칭은 말하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기가 있는 곳의 동쪽 지역을 가리킬 때 동방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창 29에 나오는 동방은 밧단아람 지역을 가리킵니다. 삿 6:3에서 언급하는 동방은 미디안과 아말렉을 가리킵니다. 사 11장에 나오는 동방은 에돔, 모압, 암몬 지역을 가리킵니다.

   성경에 나오는 동방이라는 지역이 우리나라 한국이라면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도 한국사람일까요? 창세기에 바벨탑을 동방에 세웠다고 했는데, 그러면 바벨탑을 한국에 세웠을까요? 욥은 동방의 의인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욥도 한국사람일까요? 에덴동산도 동방에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에덴동산이 우리나라 한국에 있었을까요?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교단은 지금 여성안수를 허용하여 여자 장로와 여자 목사들이 안수 받고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성안수를 논의할 때 기득권을 가진 남성들이 반대했습니다. 반대할 때 당연히 나름대로 성경적 근거를 댔습니다.

   이 때 가장 강력한 증거로 내세웠던 것이 고전 14:34-35입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만일 이 말씀대로라면 여성은 목사나 장로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교회에서는 절대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 올 때 마스크를 쓰던지 해야 합니다. 게다가 교회의 성경공부에 여성은 절대로 참석해서는 안 됩니다. 집에서 개인적으로 남편에게 배워야 합니다.

   이 말씀이 그런 뜻일까요? 고린도라는 아주 특수한 교회의 특수한 때에 교회 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신 특수한 해결책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보편화해서 가져다 붙이면 안 됩니다. 특히 자기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계적인 성경학자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 라는 분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 앞에 서십시오. 성경에서 자기가 듣고 싶은 소리를 들으려 하지 마십시오. 자기에게 유익한 뜻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려 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경 앞에 설 때 가장 중요한 태도는 겸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겸손은 몇 가지 중요한 태도를 뜻합니다.

   하나는 귀 기울여 듣는 태도입니다. “말씀하시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태도를 말합니다.

   둘은 묻는 태도입니다.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고백하면서 그 뜻이 무엇인지를 묻는 태도를 말합니다.

   셋은 순종의 태도입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그 말씀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다짐의 태도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늘 말씀 앞에서 겸손히 서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읽으라

   본문 21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성경은 성경 저자들이 모두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서 기록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서 기록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경 자체가 이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선 성경의 기록 과정을 보겠습니다. 구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주전 1500년경에 기록되었고,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주전 400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 39권이 약 1100년에 걸쳐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은 살전이 가장 먼저인 주후 약 51년경에 기록되었고, 계가 가장 늦은 주후 95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약 27권도 약 50년에 걸쳐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를 보면 약 16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기록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성경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40여명이나 됩니다. 1600년의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살던 사람입니다. 직업도 다양합니다. 왕도 있고, 제사장도 있고, 예언자도 있고, 평범한 여인도 있고, 어부 출신도 있고, 죄수 출신도 있습니다. 물론 저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편집회의를 한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용이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일관성이 있습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에 대한 이야기이고 신약은 오신 메시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에 걸쳐 하나님의 약속과 이것이 이루어진 하나의 줄거리로 되어있습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성경 저자 그 누구도 자기들이 쓴 책이 성경이 되리라 예견하고 쓴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성경이 되어 오늘 우리에게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의 특성을 통해 우리가 결론을 내릴 있는 것은 결국 성경의 저자는 성령이시라는 점입니다. 성령께서 성경 저자들 마음에 기록할 마음을 주시고, 저들에게 기록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또한 기록된 것들을 하나의 책으로 엮여지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말씀에서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으로 된 책이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사실 오늘도 성경을 문학 작품으로 읽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공격할 생각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성령의 감동으로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쓴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쓴 것처럼 우리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요한 칼뱅이 자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칼뱅은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읽는다는 것을 ‘성령의 내적조명’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눈을 조명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칼뱅은 눅 24장 이야기를 구체적인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뒤에 두 제자는 실망하여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저들을 찾으셨습니다. 함께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걸었는데도 저들이 예수님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과 함께 식사하실 때 비로소 저들이 예수님인 줄을 알아보았고, 예수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그 뒤에 저들이 자기들이 예수님을 알아차리게 된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우선 3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주실 때 저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때 성령께서 저들의 마음을 조명해 주셔서 그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31을 보면,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저들의 눈을 조명해 주셔서 저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45절입니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성령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서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감동입니다. 칼뱅의 말로는 성령의 조명입니다. 우리가 어리석습니다. 우리가 우둔합니다. 우리 능력만으로는 성경 말씀을 읽어도 그 뜻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성령께서 감동하시고 성령께서 조명해 주셔야 말씀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을 대할 때 성령의 감동을 구하십시오. 우리의 눈이 열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말씀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정말 놀라운 선물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사랑하고 소중히 대해야 하겠습니다.

   우선 성경을 철저하게 믿고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마치 우리 신앙생활의 네비게이션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사사로이 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성령의 감동으로 읽어야 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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