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 (사 35:1-4)
우리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근본적인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믿는 반면에, 다른 종교들은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차이점은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고 믿는 반면에, 다른 종교들은 인간이 신을 찾는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은 물론이고 우리 인간을 친히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가 믿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오늘 본문 사 35: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이요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이 말씀은 ‘이미’ 이루어졌고, 또한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성탄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사건으로 이 말씀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재림 사건으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이기에 이 말씀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오심을 말할 때 ‘이미’와 ‘아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 땅에는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에 아직 구원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시인 박노해의 시 가운데 [아직과 이미 사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아직에 절망할 때
이미를 보아
문제 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굽혀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나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시인은 우리 인생의 본질을 ‘이미’와 ‘아직’ 사이의 역동적 관계로 풀이하고자 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미’를 소중하게 품고, 장차 다가 올 ‘아직’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이 이와 같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아직 오시지 않은 다시 오실 하나님을 소망 중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시작된 구원을 이루며, 아직 오시지 않은 하나님께서 다시 오셔서 완성하실 구원을 대망하는 것입니다.
이미 오신 하나님
하나님은 이미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은 하나님은 아기예수 탄생사건을 통해 2000년 전 저 이스라엘 땅에 오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 이 사건을 비유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빛이 어둠 가운데 비취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태초에 흑암 속에 하나님께서 빛을 보내셔서 창조가 시작되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이 어둠으로 뒤덮인 세상에 오셔서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 이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막 1:1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복음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비로소 ‘복음’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시면서 이 세상에는 진정한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시작된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바울은 이 복음을 깊이 있게 우리들에게 설명해 줍니다. 복음이란 글자 그대로 좋은 소식이요 그래서 듣는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이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라고 잘라서 말합니다. 다른 여러 복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비교할 수 없는 복음 중의 복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을 보다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구세주가 되신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 이 세상의 구세주시다’라는 소식이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복음이 가지는 놀라운 능력까지 설명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그리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그러니까 이 복음은 단순히 전해지는 소식 곧 메시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복음은 이 복음을 “아멘”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우선 이 복음을 듣고 그 심령 속에 아멘으로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구원을 이루게 해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건강한 편이어서 평소에 약을 많이 먹지 않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본 일도 없어서 약물치료도 받아본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악발’이 잘 듣는 편입니다. 소화제나 두통약 같은 것을 먹으면 바로바로 약효가 나타납니다. 어려서부터 술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성만찬 포도주 한 잔에도 얼굴이 붉어지기도 합니다. 약물이나 술이 우리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어 우리의 심령 속에 간직해 두면 우리 심령 속에서 그 복음이 능력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구원을 이루어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다르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죄인이지만 복음을 믿는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셔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사면제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KAL기 폭파범 김현희는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참회하고 유족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국가에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국가가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죄를 사면했습니다. 석방됐고 지금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잘 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죄인이었지만 복음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사면해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놀라운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 복음으로 이 세상에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미 오신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때야 할까요?
우선 믿음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믿어야 합니다. 예수가 나의 주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또한 나를 위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믿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예수는 나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는 나를 의롭다 여겨주시고 하나님이 자녀 삼아주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 찬양이 입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더 나아가 영혼으로 부를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뜨거운 감사와 감격으로 부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오실 하나님
하나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성경에는 재림에 관한 약속에 정말 많이 나옵니다. 성서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보면 구약성경에는 17권의 책들 속에 1845번이 나오고, 신약성경에는 23권의 책들 속에 318번이나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행 1:11에 이렇게 약속되어있습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지켜보았던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 1:7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사도 요한이 계시로 받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초림 때 하나님의 오심은 예수 탄생사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재림 때 하나님의 오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다시 오실까요? 초림 때 시작된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복음으로 구원이 시작되었고, 이제 다시 오셔서 구원을 마무리 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구원을 마무리하시고 완성하시기 위해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심판입니다. 마 16:2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깊으리라”
우선 믿음을 지킨 사람들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심판대에 세우신 뒤 이들에게는 상을 주십니다. 계 22:12을 보면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에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 상이란 저 천국으로 인도하셔서 예비하신 처소에 들게 하시고 영원 복락을 누리게 하실 뿐 아니라 행한대로 면류관을 씌워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계 22:7)
다음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계 20:12 이하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들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한 마디로 지옥의 심판을 말합니다.
그러면 다시 오실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때야 할까요?
계 22:20은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태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아멘’의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에 대해 아멘으로 받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의 역사를 끝내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펼치실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천국이 있음을 믿고 우리가 장차 저 천국에 들어갈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에 대해 믿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온 모든 것이 다 물거품이 됩니다. 구원의 시작은 믿지만 구원의 완성을 믿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마라나타’의 태도입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간절한 기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루하루 믿음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정말 큰 고난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고난 앞에 무릎 꿇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약속하신 저 천국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고난 가운데 믿음을 지키고 있는 성도들이 이 마라나타의 신앙을 지키며 인내하고 때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또한 평안한 가운데 부족함이 없는 중에 믿음을 지켜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천국 부럽지 않은 이 세상의 복을 누리는 중에 믿음을 지키는 일 역시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을 끊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마라나타의 신앙을 지키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이 대림절입니다. 이 대림절에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이미’와 ‘아직’ 사이의 올바른 믿음입니다.
우선 이미 오신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는 아직 오지 않으셨지만 다시 오실 하나님 즉 재림하실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먼저 ‘아멘’의 신앙을 굳건히 세워야 합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고 이 세상은 끝이 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라나타’의 신앙을 굳건히 세워야 합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간절한 기원을 가지고 살아가야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견디기 힘든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 안일한 일상 속에서도 천국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올바른 대림절 신앙 가운데 굳게 서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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