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시작이라 (막1:1)
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삶을 체계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뜻을 정했습니다. 예수님을 보다 깊이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온전하게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그 첫걸음으로, 마가복음의 기록자와 마가복음의 주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마가복음은 마가에 의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의 곁에는 마가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마가는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자세하고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마가복음을 가리켜서 “로마인을 위한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마가복음이 로마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가복음이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을 읽어보면, 이와 같은 사실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예컨대 마가복음은 유대인들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할 경우, 반드시 그 말을 번역하거나 따로 설명을 더합니다. 가령 “보아너게”는 “우레의 아들,” “달리다굼”은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등입니다.
또한 마가복음은 유대인들의 관습, 가령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일이나 밖에 나갔다 오면 물을 뿌리는 일, 또는 유월절이면 양을 잡는 일 등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로마에 사는 이들은 유대인들의 언어나 관습에 생소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마가복음에는 로마의 화폐인 “고드란트”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또한 로마의 직명인 “시위병”이라는 단어도 나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마가복음이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로마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면 마가복음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마가복음의 첫 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마가복음의 주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중앙에는 “주는 그리스도”시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나옵니다. 이 고백을 중심으로 마가복음의 전반부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을 통해서, 그리고 후반부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입증되고 있습니다.
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Mk1:1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the Son of God.
우리말 성경과 헬라어 원어 성경은 단어들의 순서가 다르게 배열되었습니다. 영어 성경이 헬라어 원어 성경과 같게 되어있습니다. 맨 앞에 시작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복음, 그 뒤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맨 끝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는 헬라어 원어 성경의 순서에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복음의 시작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복음의 시작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헬라어로 마가복음의 첫 단어는 “시작”입니다. 이는 창1:1의 첫 단어인 “태초”와 또한 요1:1의 첫 단어인 “태초”와 실상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마가는 시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이제 새로운 시대가 활짝 열렸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새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시작이라.” 바로 복음입니다. 말하자면 고통과 슬픔의 시대가 새롭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좋은 시대 곧 기쁨과 즐거움의 시대가 새롭게 열렸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복음을 “유앙겔리온”이라고 합니다. 이는 “좋다”를 뜻하는 “유”와 “소식”을 뜻하는 “앙겔리온”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좋은 소식, 기쁜 소식, 복된 소식,” 말하자면 영어의 “good news”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복음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 당시 사람들이 이미 복음이라는 단어를 잘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가는 우선 여기서 복음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복음, 곧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도 사용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는 고대의 문학작품이나 이방인들의 비문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은 다른 자료를 통해서 이미 복음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오늘 본문에서 구태여 복음의 의미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복음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복음이라는 단어가 어떠한 의미로 쓰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후에 우리는 그 당시 이방인들은 복음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른바 칠십인경이라고 부릅니다. 이 칠십인경에도 복음을 뜻하는 “유앙겔리온”과 연관된 단어들이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복음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은 이사야서입니다. 그러기에 흔히들 이사야를 가리켜 “복음의 선지자”라고 부르며, 또한 이사야서를 “제5복음서”라고 부르기까지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사야서를 통해서, 잠시 복음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서가 기록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 나라에서 고통의 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이제 곧 그들에게 회복의 역사가 있을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사40: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여기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다”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칠십인경은 이것을 한 단어로 번역해서, 헬라어 “유앙겔리온”의 동사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소식”이 바로 “유앙겔리온,” 곧 복음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운 소식,” 곧 복음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말씀의 끝 부분에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하나님을 보는 것이 그들에게는 복음이 됩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절에서 나타납니다.
사40: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사40:11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아름다운 소식, 곧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은 하나님이 임하셔서, 친히 그의 팔로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임하셔서 다스리시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복음이 됩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임하시면, 그들에게는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고국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 될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보좌에 앉으셔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자와 같이 그들을 먹이시며,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의 걸음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임하시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바로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5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여기에도 “좋은 소식”이라는 표현이 두 번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앙겔리온,” 곧 복음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복음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스리시면, 평화와 복과 구원이 자동적으로 따라 오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이 임하셔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새 시대가 열립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축복이 임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임하셔서 다스리시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당시 이방인들은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906년 소아시아의 프리에네(Priene)에서, 헬라어로 쓰여진 비문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주전 9년, 그러니까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이전에 쓰여진 비문이었습니다.
이 비문은 그 당시에 소아시아를 통치하던 로마의 총독 Paulus Fabius Maximus가 그 곳 사람들에게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숭배할 것을 촉구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문에 복음이라는 단어와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비문에서 Maximus는 로마의 가이사, 곧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를 가리켜서 신이 이 세상에 보낸 구세주라고 칭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가이사 아구스도의 생일을 가리켜서, 이 세상을 위한 “복음의 시작”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이 땅에서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주었으며, 이 세상의 질서를 확립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은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를 신으로 숭배해야만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로마인들에게는 복음, 곧 “유앙겔리온”이 가이사 아구스도가 임하여 그들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가이사 아구스도가 그들을 위하여 새 시대를 열고서, 그들에게 구원과 평화와 질서를 주었다고 여겼습니다.
이와 같이 그 당시 사람들은 유대인이든지 로마인이든지 간에, 그들 모두가 복음이라는 단어와 친숙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는 복음은 한 마디로 새로운 통치자에 의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도 오늘 본문에서 똑같은 의미로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마가는 로마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복음이 시작되었다는 사실, 곧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사실을 힘차게 선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당시의 상황을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는 로마의 황제를 숭배해야 한다는 사상이 팽배했습니다. 그래서 곳곳에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이와 같은 고백을 해야만 했습니다.
“신의 아들 가이사 아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바로 이와 같은 때에, 마가는 그가 기록한 마가복음의 첫 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고도 담대하게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바로 이 신앙 때문에,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또한 바로 이 신앙 때문에, 바울도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마가도 로마에서 순교할 각오를 하고서, 그가 기록한 복음서의 가장 첫 머리에서 자신의 신앙을 분명하고도 담대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분명하고도 확신에 찬 신앙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새 시대를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평화와 축복을 풍성하게 내리실 것입니다.
마가복음과 더불어서,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새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활짝 열리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교회적으로 희년을 맞이하는 우리 승동교회에, 마가복음과 더불어서 새로운 승동의 시대가 활짝 열리는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복음의 시작이라.” 이와 같이 오늘 본문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먼저 힘있게 선포했습니다. 곧 이어서 오늘 본문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신 통치자, 곧 왕의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는 무엇이고, 그리스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는 성이고, 그리스도는 이름입니까? 아니면 예수가 first name이고, 그리스도는 last name입니까? 그와 같은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는 인명을 가리키고, 그리스도는 직명을 가리킵니다.
예컨대 우리 나라 이씨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태조는 왕명입니다. 그리고 이성계는 인명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예수는 예수님의 인명에 해당하고,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왕명에 해당합니다.
(1) 예수
누가 예수님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까?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가 지어주었습니까? 아니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지어주었습니까?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라는 인명은 예수님에게만 사용되었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을 차례대로 살펴봅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천사가 요셉에게)
눅1: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천사가 마리아에게)
이와 같이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에, 천사는 요셉에게도 또한 마리아에게도 각기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도록 일러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라는 인명은 예수님이 나시기 전에, 이미 지어진 이름으로서 천사에 의해서 그 이름이 요셉과 마리아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그와 같은 이름이 주어진 것은 예수님의 사명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인명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여호수아라는 인명과 똑같은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라는 히브리식 이름을 헬라식으로 표기한 것이 바로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또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입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인명이 예수님에게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도 같은 이름이 나오고, 신약 성경에도 같은 이름이 나옵니다. 구약 성경에서 모세의 후계자도 같은 이름인 여호수아였고, 스룹바벨 당시의 대제사장도 같은 이름인 여호수아였습니다.
골4: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와 같이 신약 성경에도, 예수라는 인명을 가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분명 이외에도 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때로는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며,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나 그리스도 예수라고 부릅니다.
(2)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헬라어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메시야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말이나 메시야라는 말이나 실상은 똑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이고, 메시야는 히브리어일 뿐입니다.
요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요4: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이와 같이 메시야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본시 이 말은 “기름을 붓다”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는 그 수동형으로, 그리고 명사형으로 쓰였습니다. 아울러 사람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메시야의 종합적인 의미는 “기름 부음 받은 자”입니다.
삼하23:1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여기에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어로는 메시야이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왜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십니까?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 사람이 어떤 특정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를 위임하신다는 뜻이었습니다.
레4:3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왕상19: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이와 같이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에게 기름이 부어졌습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왕의 역할은 하나님의 뜻대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메시야가 강림하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대로, 예수님은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신약 성경은 예수님이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의 직분을 동시에 가지신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오셨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히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1:1~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마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선지자이십니다. 예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은 그 자체가 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되셔서, 영원토록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제사장이시며, 선지자이시며, 왕이시기에, 예수님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제사장으로 묘사되는 경우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선지자로 묘사되는 경우에도, 그저 간접적으로만 묘사될 뿐입니다.
막6: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여기서 선지자는 예수님 자신을 간접적으로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 또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모두 여섯 번 등장합니다. 그 여섯 번 모두가 마가복음 15장에 등장합니다.
막15: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9, 12, 18, 26)
막15: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이와 같이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제사장이나 선지자로 묘사하기보다는,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왕으로 오셔서, 새로운 시대를 여셨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예수님에 의해서 복음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인명과 예수님의 직명이 합쳐진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시는 제사장이시며, 선지자이시며,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서 마가복음은 왕으로서의 직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임하셔서, 새 시대를 여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사용된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왕명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예수님이 바로 왕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우리의 왕으로 임하셔서, 지금도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새 시대를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구원과 평화와 복을 풍성하게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왕이신 예수님께 기쁨으로 나아가, 감사함으로 그를 경배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그의 다스리심을 받읍시다. 그리해서 왕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사하시는 구원과 평화와 축복을 날마다 풍성하게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오늘 본문의 논리적인 순서는 이러합니다. “복음의 시작이라.” 이 땅에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열렸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강림하셔서, 이 땅을 다스리시게 되셨습니다. 그 결과 이 땅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느 계통의 왕이십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의 왕들처럼, 선대로부터 왕권을 세습하신 것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이 세상에 그리스도로, 곧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는 왕으로 하늘에서 강림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는 세상 임금들이 다스리는 나라와 질적으로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결코 쇠하거나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영원무궁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 복음, 곧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항상 단수로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참된 복음의 시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의미의 새 시대를 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유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낳으셨다는 뜻입니까? 그 결과 그 때부터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이와 같은 개념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신 적이 단 한번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이 말하는 아들의 개념과 우리가 생각하는 아들의 개념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아들이라고 할 때, “낳다, 출생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때때로 아들이라는 단어를 “동등하다, 같다”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막3: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예수님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더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우레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성질이 바로 우레와 같다는 뜻입니다.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사도들이 요셉을 바나바라고 불렀습니다. 그 뜻은 “위로의 아들”입니다. 이는 요셉의 부모가 “위로”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요셉 자신이 “위로”의 대명사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만큼 다른 사람들을 잘 위로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아들”이라는 말의 개념이 출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아들”이라는 단어가 “동등하다, 똑같은 수준이다”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도 바로 이와 같은 경우입니다.
요5: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이와 같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을 붙여서, 로마인들의 손을 빌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님의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막1:1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누구이시며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강림하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해서, 이 사실을 더욱 자세하게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우리는 어디까지나 복음의 시작만 접했을 뿐입니다. 복음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이 열어주신 새 시대도 우리에게 더욱 분명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가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더 깊이 묵상하며, 예수님을 더욱 본받아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열어주신 새 시대의 축복을 날마다 풍성히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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