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막2:13~17)
막2: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막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막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막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지난 주일에 우리는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권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는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온 한 중풍병자의 죄를 예수님 자신의 권세로 사하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 하는 자로 여겼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이 명하는 바에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그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에 반역을 꾀하는 것처럼 꾸며서, 로마인들의 손을 빌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이적들을 백성들에게 설명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힘입어서 이적을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와 같이 주장했던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마11:19과 눅7:34에 의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몹시도 경멸하면서, 아주 심하게 예수님을 낮추어서 불렀던 말입니다.
그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사탄의 무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탄의 무리들과 어울리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의 의나 거룩이 자기들보다도 훨씬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결론은 뻔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무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도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라고 그들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도 사탄을 힘입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면 왜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셔서, 그들과 함께 하셨는가를 우리에게 밝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오늘 본문은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과연 어떠한 사람의 죄를 사하여주시는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네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며,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며, 나 같은 죄인을 부르셔서 귀하게 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뜻깊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크게 감사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인 줄 알고, 내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하나님께 늘 헌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입니다(13~14절).
막2: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예수님은 다시 바닷가에 나가셨습니다. 막1:16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또다시 바닷가에 나가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디에서 나가셨습니까?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있는 집에서 나가셨습니다. 아마도 그 집은 시몬의 집이었을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그 곳에서 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주셨으며, 아울러 그의 병도 고쳐주셨습니다.
그 때 시몬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은 지붕을 뚫고서, 그를 침상에 누운 채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려야만 했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가르치심을 중단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 중풍병자가 나음을 받고 그의 집으로 돌아간 후에, 예수님은 시몬의 집에서 바닷가로 나가셨습니다. 자연히 그 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도 예수님과 함께 바닷가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아울러 그 모습을 보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닷가로 나가신 목적은 무엇이었니까?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중풍병자로 인해서 중단되었던 말씀을 그 곳에서 계속하여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탁 트인 곳에서,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실 수 있으셨습니다.
막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드디어 예수님은 그 날의 가르치심을 끝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바닷가를 떠나서, 큰길로 올라오셨습니다. 가버나움은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북쪽의 다메섹이나 동쪽의 데가볼리 지방에서 갈릴리나 유대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이 길을 지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의 큰길에는 지나가는 행인들에게서 관세, 곧 세금을 거두는 세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곳 가버나움의 세관에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눅5:27 말씀과 같이, 그는 세관에서 세금을 징수하던 세리였습니다.
예수님은 레위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 당시에 세리들은 사탄의 무리로 여겨졌습니다. 바로 그러할 때 세리를 제자로 삼는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인들은 세금을 징수하는 권리를 입찰에 부쳤습니다. 그래서 가장 많은 액수를 적어내는 사람이 세금 징수권을 땄습니다. 그러나 보니까 세리가 된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금을 많이 거둬들여야만 했습니다.
세관에 앉은 세리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든 물품들을 면밀히 조사했습니다. 그리고는 돈이 될만한 물품에는 빠짐 없이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만일 제 때에 세금을 내지 못하면, 비싼 이자를 물게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고리대금업까지 곁들여 했던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세금을 내야 할 사람이 세금을 내지 않으면, 그들은 주먹을 쓰는 폭력배를 시켜서라도 꼭 받아내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의 세리들은 그야말로 피눈물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럽고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은 말할 것도 없고, 각 마을에 있는 회당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세리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그저 멀리 서서 기도해야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법정에서 증인으로 세움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누가복음 3장을 보면, 세리들이 세례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고자 했습니다. 그 때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부과된 것 이외는 거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레위는 바로 이와 같은 세리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그 당시 죄인 중의 죄인, 곧 가장 질이 나쁜 죄인으로 취급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레위를 향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니 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왜 예수님이 레위를 부르셨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2:25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사람 속에 있는 생각을 다 아십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레위의 마음을 보시고, 그를 불러서 제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설명하면 이와 같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본 동네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사시면서, 그 곳을 중심으로 갈릴리 사역을 펼치셨습니다. 아울러 레위도 가버나움에 살면서, 그 곳에 있는 세관에 앉아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미 레위는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이적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으며, 또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더러운 귀신을 내쫓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레위는 예수님이 전파하시는 복음에 대해서도 다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막1:15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면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치셨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레위의 마음에는 깊은 번민이 자리잡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는 돈에 자신의 영혼을 팔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돈 때문에, 자기의 동족을 배반했습니다. 그는 돈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도 버렸습니다. 그는 돈 때문에, 하나님도 경외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난 뒤부터, 그의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가진 권세와 그가 벌어드리는 많은 돈에도 불구하고, 레위는 그 자신이 영적으로는 너무나도 비참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는 자신이 짊어진 무거운 죄의 짐 때문에, 심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죄를 애통히 여기면서, 주리고 목마른 심정으로 자신의 죄를 사함 받기를 바랐습니다. 말하자면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 레위는 복이 있는 사람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와 같은 레위의 마음을 예수님이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레위를 부르시면서, 그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를 자신의 제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레위의 마음이 그와 같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을 때, 그가 취했던 반응을 통해서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일어나 따르니라.”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한 부자 관원이 보여주었던 태도와는 정반대였습니다. 그 부자 관원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또한 그가 영적으로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달았습니다.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눅5:28 말씀과 같이,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는 그가 그 자리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제자가 된 네 명은 어부였습니다. 물론 그들도 배와 그물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다로 되돌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21장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한 때 갈릴리 바다로 되돌아가서 그물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 그 자리를 떠나면, 그는 두 번 다시 되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자리를 탐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위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 즉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지금까지는 돈과 권세가 그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것들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습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그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9:9에서, 우리는 레위의 또 다른 이름이 마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한 사람이 두 개의 이름을 동시에 사용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예컨대 디두모라 하는 도마, 마가라 하는 요한,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 등입니다.
아무튼 레위 곧 마태는 일시적인 것들을 버리고, 영원한 것들을 얻었습니다. 그는 물질을 버렸습니다. 그 대신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는 직업을 버렸습니다. 그 대신 그는 예수님의 사도가 되어 마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영원한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레위는 세리였습니다. 그 당시에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세리는 창녀보다 오히려 더 못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의 죄를 사하시고, 그를 제자로 삼으셔서, 그를 귀하게 쓰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모든 더러운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불러서, 귀하게 쓰임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잊지 않고, 진심으로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레위의 집에서 벌인 큰 잔치입니다(15절).
막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여기서 말하는 “그의 집”은 레위의 집을 가리킵니다. 눅5:29에 의하면, 이 때 레위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의 집에서 큰 잔치를 했습니다. 말하자면 레위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감사가 넘쳐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가 그 동안에 그의 죄를 아주 고통스러워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가 자신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몹시도 목말라했던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그의 죄를 사하여주셨을 때, 그가 너무나도 기뻐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앉다”라고 번역된 동사가 두 번 나옵니다. 그 본래의 뜻은 “기대어 눕다”입니다. 유대인들도 간단한 식사를 들 때는 식탁에 앉아서 먹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찬을 들 때는 좀 독특한 자세를 취합니다. 그 때는 기대어 눕는 자세를 취합니다.
먼저 한 쪽 팔꿈치를 푹신한 베개나 양탄자 위에 고정을 시킵니다. 발은 식탁의 반대쪽으로 편안하게 뻗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쪽 손을 이용해서 음식을 듭니다. 그러면서 서로 간에 환담을 나눕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만찬을 들 때 기대어 눕는 자세입니다.
아무튼 레위의 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기대어 누웠습니다. 그의 집은 큰 잔치를 할 수 있을 만큼 컸습니다. 그만큼 그는 많은 돈을 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서, 아마도 레위가 제일 가는 부자였을 것입니다.
그 날 그 잔치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대어 누웠습니다. 우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기대어 누웠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가리킵니다.
어쩌면 여기에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빌립과 나다나엘, 곧 바돌로매도 포함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울러 이제는 레위도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그 잔치에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만 기대어 누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 이외에도 함께 기대어 누운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함께 기대어 누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이어 그 이유가 나옵니다.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가버나움의 세관에는 레위 이외에도 많은 세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그 곳에는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 예컨대 장부를 기록하는 사람들, 짐을 들고 내리는 사람들, 주먹을 쓰는 사람들 등등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오늘 본문의 죄인들에 해당합니다.
말하자면 이들도 예수님을 따라서 레위의 집으로 왔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레위처럼 그들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온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호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서 그 곳으로 온 것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레위는 그들 모두도 그의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들을 예수님과 함께 기대어 눕게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레위는 자기처럼 그들 모두도 예수님에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가 보여주어야 할 참 모습일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살림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받은 바 예수님의 은혜를 늘 우리의 이웃들과 함께 나누기를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비방하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입니다(16절).
막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크게 네 파로 나누어졌습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파, 그리고 에세네파였습니다. 성경에는 에세네파가 등장하지 않지만, 성경 이외의 문서에는 자주 등장합니다.
이들의 특징을 요약해봅니다. 바리새파는 전통주의자로서, “go back”을 주장했습니다. 사두개파는 현실주의자로서, “go forward”를 주장했습니다. 열심당파는 혁명주의자로서, “go against”를 주장했습니다. 에세네파는 격리주의자로서, “go away”를 주장했습니다.
이들 각 파에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서기관들은 각 교단의 신학교 교수들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성경에서 그들은 때때로 율법사라고 불리기도 하고, 또한 때로는 랍비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바리새파에 속하는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주셨을 때, 속으로 예수님을 신성 모독하는 자로 여겼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끈질기게 예수님을 미행했습니다. 예수님을 고소하고 예수님을 정죄할 단서들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미행해서, 레위의 집 앞까지 왔습니다. 지금 그 곳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만 그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세리들과 이들과 함께 일하는 많은 죄인들이 다 그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레위의 집안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이와 같은 말씀을 따라서, 그들은 죄인들과 함께 먹지 않는 것을 복되게 여겼습니다. 지금 레위의 집에는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와 같은 사람들과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함께 기대어 누우셨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잔치하는 집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이나 그의 제자들에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잔치가 다 끝날 때까지,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집밖에서 계속 기다렸습니다.
한참 후에야 예수님은 식사를 마치시고, 그의 제자들과 함께 밖으로 나오셨을 것입니다. 때를 놓칠 새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이와 같이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여기에 “먹다”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잘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는 이것이 삼인칭 단수형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들이 비방하는 대상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비방하는 대상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와 같이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하여 너희가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지금 그들은 이와 같이 묻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그가, 곧 예수님이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을 비방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주셨을 때, 그들은 속으로만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더니 이제는 말로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들이 예수님에게 직접 따지고 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그들의 기세는 점점 거세어만 갔습니다.
눅18:9 말씀과 같이, 그들은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들만 의롭게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심하게 정죄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는 아예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서 구원받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아 안다면, 우리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쉽게 우리의 이웃을 정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이 바라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원하는 바는 우리의 비방이나 우리의 책망이 아닙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위로와 도움과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심정으로 늘 우리의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십니다(17절).
막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들으셨습니다. 사실 그들의 질문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들으라고 예수님을 비방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아마도 이 때 그들은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높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하는 말을 다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왜 자신이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하며 음식을 먹는지 그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의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의 격언을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의사는 병든 사람에게 가야 합니다. 의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병든 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의사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병든 자들의 곁입니다.
출15:26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몸과 우리 영혼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은 영적으로 병든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영적 의사이신 예수님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스스로 의롭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이 영적으로 건강한 자라고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영적 의사이신 예수님을 전혀 필요로 하지를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영적으로 병들어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정죄만 할뿐, 세리와 죄인들에게 도움이 되어줄 생각은 전혀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너무도 완악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영원토록 천국에 계셔야 하실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디로 부르시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영화롭고도 영원한 천국으로 부르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해주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의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 스스로 높이면서 우리가 의롭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주실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우리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은 나보다 문제가 더 많은 사람이야! 내가 그래도 그 사람보다는 낫지! 이와 같이 우리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낮추면 우리는 그들과 똑같은 태도를 가진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태도를 버립시다. 그들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면서, 레위가 벌인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천국에서 벌어지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영원토록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아야만 했습니다.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후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을 가리켜서, 죄인 중에 괴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현재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지금 현재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바울이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짓고 있단 말인가? 요점은 그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서, 자신의 영적 비참함을 깊이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예수님의 긍휼을 풍성하게 입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는 죄 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한 사람의 죄를 사하십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에, 자기가 죄인인 줄 깨닫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의 태도를 버리고, 항상 사도 바울의 태도를 가집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귀하게 사용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영화롭고도 영원한 천국으로 불러주실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레위는 세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울러 그는 예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이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잠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레위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그는 단 한번도 전면에 나서지를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그가 한 말이 단 한 차례도 나오지를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저 예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조용하게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레위는 늘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말자, 제일 먼저 예수님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뒤에도 레위는 예수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행적을 자세하게 살펴서, 그것을 담은 복음서 곧 마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리함으로써 그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만백성에게 널리 전하고자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죄와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나 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며, 나 같은 죄인의 죄를 사하여주시며,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고, 나 같은 죄인을 귀하게 쓰십니다.
뜻 깊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예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진심으로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도 예수님을 높이며,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늘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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