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 (막1:40~45)
막1: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막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막1: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막1:43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막1: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막1: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의 각종 병을 고치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더러운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이와 같은 이적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밝히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같은 내용이 마태복음 8장과 누가복음 5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외에도 누가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동시에 깨끗하게 하신 적도 있으셨습니다.
나병은 문둥병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또한 1870년대 나병의 병원체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한센병(Hansen's disease)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나병은 고대 이집트의 미라에서도 발견될 만큼,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된 질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을 때, 어쩌면 나병도 그들을 따라서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을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땅에는 나병환자가 많았습니다.
눅4: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구약시대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내용이 복음서에 자세하게 기록된 두 경우 이외에도, 예수님은 분명 수많은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 한 가지 예를 들어봅니다.
막14: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베다니 시몬은 본시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이상 나병환자가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가 나병을 앓고 있으면서, 그의 집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식사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그를 깨끗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나병은 아주 무섭고도 치명적입니다. 나병은 몸의 감각을 마비시켜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나병에 걸린 사람은 손으로 뜨거운 것이나 찬 것을 만져도, 그것이 뜨겁다든지 차다든지 하는 사실을 전혀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나병이 심해지면, 눈썹이 빠집니다. 손톱과 발톱도 빠집니다. 이빨도 빠집니다. 더 심해지면 손가락과 발가락이 오그라듭니다. 코가 문드러지고, 귀가 문드러집니다. 눈알도 문드러져서 앞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목소리도 쉰 소리로 변해버립니다.
레13:45 나병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레13: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이와 같이 나병환자는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감염되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성한 사람이 가까이 오면, 나병환자는 그의 옷을 찢고 그의 머리를 풀어야 했습니다. 자기가 나병환자인 것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성한 사람을 향하여 윗입술을 가리고 외쳐야 했습니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성한 사람이 자기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나병은 가족도, 일터도, 사회도, 소망도 다 잃어버리고 마는 아주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의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나병은 완전히 고칠 수가 없습니다. 나병으로 한번 문드러진 신체의 부위는 결코 다시금 원상태로 회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나병은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많은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몸을 나병이 들기 이전의 건강한 상태로 완전하게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이적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네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더욱 분명하게 알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가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며, 더욱 높이고, 더욱 본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님에게 나아온 나병환자입니다(40절).
막1: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병환자는 나병의 초기 단계를 앓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눅5:12에 의하면, 그는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좀더 자세하고도 정확하게 그의 상태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나병환자는 그의 병을 남들에게 숨길 수 없을 만큼 중한 환자였습니다. 이미 그의 눈썹은 빠졌을 것입니다. 얼굴도 흉하게 일그러졌을 것입니다. 몸에서 나는 냄새도 심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는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나병환자들이 격리되어 사는 곳에만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결코 성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병환자는 놀랍게도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열 명의 나병환자들처럼, 그가 멀리 서서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에게 나아온 나병환자가 보여준 자세에서 몇 가지의 두드러진 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점들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바람직한 자세일 것입니다. 그가 보여준 자세를 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께 와서”: 그는 필사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서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는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건강을 잃었습니다. 가족들도 잃었습니다. 친구들도 잃었습니다. 사회 생활도 잃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의 각종 질병을 다 고쳐주신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그에게 단 한 가지 희망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그를 깨끗하게 해주시는 길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2) “꿇어 엎드려”: 그는 예수님에게 경배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에게 와서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자기의 얼굴을 땅바닥에 대었습니다. 그리고서 마8:2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그는 예수님에게 절을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꿇어 엎드려 절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께 경배할 때만 취하는 자세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나병환자의 태도를 통해서, 우리는 그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 “간구하여 이르되”: 그는 예수님에게 긍휼을 구했습니다.
아마도 이 때 그는 흐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나병을 앓아왔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온 몸에 나병이 퍼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오랫동안 나병을 앓아왔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그 동안에 그가 받은 서러움과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기에 그는 이 때에 애통하는 심정으로 흐느끼면서, 아니 엉엉 울면서, 예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자기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구했을 것입니다.
(4) “원하시면”: 그는 예수님의 뜻에 맡겼습니다.
“왜 내가 이와 같이 몹쓸 병에 걸려야만 합니까?” 그는 예수님에게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그는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에게 자기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을 요구하거나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원하시면.” 말하자면 그는 예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면서, 예수님의 뜻에 맡긴 것입니다. 그러기에 설령 예수님이 원하시지 아니하시더라도,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에게 떼를 쓰지도 아니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대로, 진정 그는 복이 있는 사람의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주리고 목마른 심정으로 깨끗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애통하는 심정으로 예수님에게 간구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가난하고, 온유하며, 청결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5)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믿음으로 나아왔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 나아올 때, 예수님이 원하시면 얼마든지 자기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아왔습니다.
여기서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다른 병과는 달리 나병의 경우에, 성경은 “고치다, 또는 낫게 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깨끗하게 하다”라는 표현만 사용합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3장과 14장은 나병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곳에는 나병 이외에 다른 피부병들도 나옵니다. 나병과는 달리, 다른 피부병들은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다른 피부병에 걸리면, 나병환자들처럼 격리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병은 부정하기 때문에, 나병환자는 반드시 격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병이 무서운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함을 얻어야만, 다시금 사회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나병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리켜, 언제나 “깨끗함을 얻다”라고 표현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에게 나아온 자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그는 필사적이었습니다. 둘째, 그는 예수님에게 경배했습니다. 셋째, 그는 예수님에게 긍휼을 구했습니다. 넷째, 그는 예수님의 뜻에 맡겼습니다. 다섯째, 그는 믿음으로 나아왔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도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아온 우리의 자세는 과연 어떠합니까? 만일 우리의 자세에 잘못이 있음을 깨닫는다면, 바르게 고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언제나 바른 자세로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입니다(41~42절).
막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그를 깨끗하게 하신 동기이며 이유입니다. 물론 그는 바람직한 자세로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그를 깨끗하게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각종 병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들은 필사적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경배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긍휼을 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으셨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귀신 들린 사람은 귀신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기에 귀신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귀신을 내쫓아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오는 태도를 보고서, 그들의 병을 고쳐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믿음이 있든지 없든지 구별하지 아니하시고, 그들 모두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아무런 조건 없이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병환자는 아주 바람직한 태도로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와 같은 태도 때문에, 예수님이 그를 깨끗하게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깨끗하게 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시면서, 그가 그 동안에 겪어왔을 고통과 서러움과 외로움을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면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면서, 어떤 식으로 그를 깨끗하게 하셨습니까? 먼저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이는 그 사람에 대한 긍휼의 표시였습니다. 아울러 이는 그를 깨끗하게 하시는 능력의 원천이 예수님이심을 보여주는 표시였습니다.
레5:3에 의하면, 나병환자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아야 합니다. 나병환자는 부정하기 때문에, 그에게 손을 대는 사람도 더러워집니다. 다시 말해서 같이 부정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눅4:40에 의하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 위에 일일이 손을 얹으시며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단 한번도 그들의 병에 감염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에 걸려서 누우신 적도 없으셨고, 몸살을 앓아 누우신 적도 없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평소 목수 일을 통해서, 자신의 신체를 그만큼 튼튼하게 단련하셨기 때문일까요? 물론 예수님은 육체적으로도 아주 강건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는 달리, 예수님의 몸은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유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병자들에게 대시는 그 순간, 그 즉시 모든 병마는 사람들에게서 떠나갑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언제나 건강한 사람 위에 손을 대시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손을 대시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나병환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는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때 예수님은 정한 사람 위에 손을 대신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에게 대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은 무뚝뚝하게 행동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따뜻하게 말씀하시면서, 그의 간구에 그대로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에게 간구했습니다. “원하시면.”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나병환자는 또한 이와 같이 간구했습니다.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깨끗함을 받으라.”
막1: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이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의 결과입니다. 맨 앞에 “곧”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언제나 즉시 병을 낫게 하십니다.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나병은 사람이 고칠 수 없는 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병을 낫게 하십니다.
마지막 부분에 “깨끗하여진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모든 병을 완전히 낫게 하십니다. 따라서 그의 빠졌던 눈썹이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도 곱게 펴졌을 것입니다. 그의 문드러진 코나 귀도 새롭게 돋아났을 것입니다.
그는 나병을 앓기 전의 성한 모습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이제 그는 깨끗하여졌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더 이상 격리되어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동안 나병으로 인해서 잃어야 했던 가족, 친구, 사회 생활을 모두 다시금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예수님이 고쳐주셨을 때, 성경에서 예수님이 병든 자들을 어떻게 고치셨는가를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 때 다섯 가지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도 똑같은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말씀이나 손을 대심으로” 병을 고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즉시” 병을 낫게 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완전히” 병을 낫게 하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모든” 병을 낫게 하셨습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병을 낫게 하신 것과 오늘날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병을 고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점이 있습니까?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의 이름을 팔지 말고, 제발 좀 잠잠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셔서, 그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는 가족들의 품으로 되돌아가서, 이전처럼 사회 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엄한 경고입니다(43~44절).
막1:43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예수님은 깨끗함을 받은 사람을 곧 그 자리에서 떠나 보내셨습니다. 그가 사회로 되돌아가기에 앞서서, 그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엄히 경고하사.” 예수님은 그를 보내시면서, 그를 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예수님은 그에게 어떤 제안이나 조언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시면서, 아주 강하게 명하신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절에서 자세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막1: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깨끗함을 얻은 사람에게 명하신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을 “하지 말라”고 금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명을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이와 같이 명하셨습니다.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예수님은 여기서 삼중으로 강조하셨습니다. “삼가.” Make sure, 곧 확실하게 하라! “아무에게.” Nobody, 곧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 “아무 말도.” Nothing, 곧 아무 것도 말하지 말라!
물론 예수님이 그에게 내리신 명은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님의 명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너무나도 기쁘고 좋은 일이 생겼는데, 입을 꾹 다물고서 침묵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그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그가 사람들에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까? 왜 예수님은 그에게 함구령을 내리셨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오늘 본문 44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 의해서, 그는 완전하게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의하면, 나병의 여부를 진찰하는 것은 제사장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레위기 13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또한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입었다는 사실을 확정짓는 것도 역시 제사장이 책임진 일이었습니다. 레위기 14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깨끗함을 받은 사람에게 먼저 율법에 정해진 규례대로 행하고, 그 뒤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오늘 본문 45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깨끗함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명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이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기 위해 예수님에게 몰려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원하신 바가 아니었습니다.
막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는 갈릴리 여러 마을들에 들어가셔서, 그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깨끗함을 받은 사람이 예수님의 명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예수님은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깨끗함을 입은 사람에게 입을 다물도록 명하신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율법에 정해진 규례를 그가 먼저 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가 입을 벌림으로써 발생하는 역효과가 너무나도 크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계속해서 예수님이 깨끗함을 입은 사람에게 “하라”고 명하신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와 같이 명하셨습니다.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먼저 예수님은 그에게 명하시기를, 가서 그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모세가 레위기 13장에 기록한 대로, 나병의 여부를 진찰해서 판가름하는 일을 제사장이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그에게 명하셨습니다.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나병에서 깨끗함을 받은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는 모세가 레위기 14장에서 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레14:4 제사장은 그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명령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레14:10 여덟째 날에 그는 흠 없는 어린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또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취할 것이요
만일 그 사람이 가난해서 이와 같은 예물을 바치기가 힘들면, 그의 힘이 미치는 대로 다른 예물을 드릴 수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레위기 14장에 기록된 규례를 따라서, 깨끗함을 받은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와 같이 명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입증하라.” 여기의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을 가리킵니다. 깨끗함을 받은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제사장들에게 그의 몸을 보여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정해진 예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은 그의 몸을 살펴보면서, 놀라운 듯이 물어볼 것입니다. “언제 나병을 앓았던 적이나 있었소?” 그는 이와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본시 나는 온 몸에 나병이 들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이처럼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돈을 바꾸는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그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폐한다고 비난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깨끗함을 받은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그 곳 제사장들에게 밝히 보이시기를 바라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이 결코 율법을 무시하거나 폐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보여주시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깨끗함을 입은 사람은 예수님의 명에 순종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바라시는 대로 행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자기가 뜻하는 대로 행했습니다.
행여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예수님이 바라시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는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을 내더라도, 예수님의 뜻이 아니면 예수님은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에 늘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불순종의 결과입니다(45절).
막1: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예수님은 깨끗함을 받은 사람에게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명과는 정반대로 행했습니다. 그는 나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신 일을 전파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를 입증해야 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에도 막대한 지장을 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로 몰려오는 무리로 인해서, 더 이상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습니다. 때로는 바닷가에, 때로는 빈들에, 때로는 산에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나아왔습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에게로 나아온 목적은 복음을 듣고 자신들의 영혼이 구원받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병 낫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기에게 몰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더더욱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들의 병을 다 고쳐주시면,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믿지 않겠느냐고 생각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유대인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만일 깨끗함을 받은 사람이 순종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은 여러 마을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곳에 있는 모든 병자들, 특히 먼 곳까지 이동할 수 없는 중환자들까지도 다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나 순종이 제사보다 더 나은 법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그리해서 예수님의 뜻을 이루어드림으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시 나병환자는 부정했기 때문에, 그는 동네 안에서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동네 안에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동네 밖으로 나가셔야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지신 십자가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 모두는 본시 나병환자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죄로 얼룩진 더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에게 나아왔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저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으셔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또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그리해서 예수님의 뜻을 이루어드림으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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