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을 옹호하신 예수님! (막2:18~22)
막2: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막2: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막2: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막2: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막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 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주시고, 그의 병도 고쳐주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로 가셔서, 계속해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가르치심을 다하신 후에,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큰길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세관에 레위 곧 마태가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보시고, 그에게 명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레위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그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를 제자로 삼아주셨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를 표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레위는 그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큰 잔치를 했습니다.
그 날 레위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우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아울러 그 잔치에는 레위와 함께 일하는 그의 동료들도 많이 참석했습니다. 레위는 그들 모두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레위의 집밖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웃거리면서 집안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죄할 단서들을 찾기 위해서, 예수님을 끈질기게 미행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만찬이 끝난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레위의 집에서 나오셨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예수님이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막2:17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예수님은 죄의 병을 고치는 의사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여기서의 의인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를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바리새인의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뜻은 이와 같습니다.
“너희는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구나.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노라. 그러나 저들은 자기들이 죄인인 줄 알고서,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저들의 죄를 사하여, 나 있는 곳에 저들도 있게 할 것이노라.”
결국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어떻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까? 그들이 내세우는 그들의 인간적인 의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의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죄 사함을 받지 못하여,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는 갈 수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처럼 우리를 높이지 맙시다. 그리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받을 길이 없습니다. 레위처럼 언제나 우리를 낮춥시다. 그리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면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본문은 그 때 레위의 집밖에서 일어난 일의 연속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레위의 집밖에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만찬이 끝났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비방하는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곳에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들에게 속하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들과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이들 모두가 합세해서 예수님께 나아와서 물었습니다. 우리는 금식하고 있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눅18:12 말씀과 같이,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날은 그들이 금식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규례에 따라서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기는커녕, 먹고 마시면서 만찬을 즐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짢은 기색으로 예수님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시면서, 그의 제자들을 옹호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의 놀라운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복음의 독특성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복음의 특이성과 유일성을 분명하게 깨닫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예수님의 복음 이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음을 깨닫고, 오로지 예수님의 복음 위에 굳게 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18절).
막2: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9:14에 의하면, 이 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눅5:33에 의하면, 이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질문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때 그들은 합세해서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물었던 것입니다.
눅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눅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이와 같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이틀, 곧 월요일과 목요일은 금식하는 날로 정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이틀 동안은 하루 온 종일 아무 것도 입에 대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이 규정하고 있는 사항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성경이 공식적으로 규정하는 금식일은 일년에 단 하루였습니다.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속죄일입니다. 그 날 하루만큼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금식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속죄일이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는 언제든지 금식할 수 있었습니다. 예컨대 에스더서에서 유다인들은 사흘을 금식했습니다. 또한 다니엘은 삼 주를 금식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사십 일을 금식했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들은 다 자발적인 금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자발적으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한 이유는 이러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기 위해서 시내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 때 모세는 시내 산에서 사십 일을 금식했습니다.
그들의 전통에 의하면, 모세가 금식을 하기 위하여 시내 산으로 올라간 날이 목요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금식을 끝내고 시내 산에서 내려온 날이 월요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두 날을 기념하면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참 마음으로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마6:16에서 예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금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외식으로 슬픈 기색을 하며, 일부러 얼굴도 흉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문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때 바리새인들만 금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 곧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역시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마4:12에 의하면, 그 때 세례 요한은 이미 옥에 갇혀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요한의 제자들은 절실한 마음으로 금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하는 식으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고 적고 있습니다.
물론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바가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신성 모독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제자들은 그와 같이 악독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 날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금식하고 있었고, 바리새인들도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날은 월요일이든지 목요일이든지 둘 중의 하루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과는 달리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레위의 집에서 잔치한 만찬을 즐겼습니다. 그것도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래서 그 날 금식하고 있던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다 함께 예수님에게 몰려와서 물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무슨 뜻입니까? 도대체 당신은 당신의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쳤나이까? 어찌 그들이 금식하는 날에 금식하지는 않고, 도리어 먹기를 탐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말았나이까? 분명 당신의 가르침에는 문제가 있나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을 비방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금식하며, 기도하며, 찬양하며, 헌금하며, 예배를 드리는 등, 우리의 모든 신앙 생활은 오로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에게는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을 바라보면, 우리에게는 불평이나 원망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에게 명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 때 레위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예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감사한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베드로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명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베드로가 요한을 뒤돌아보면서, 예수님에게 이와 같이 물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그 때부터 베드로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우리도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바랍니다.
때에 따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가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비판하지 맙시다. 우리 눈 속에는 들보가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의 눈 속에 티가 있다고 투덜대지 말고, 우리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는 일에 늘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제자들을 옹호하시는 예수님(19~20절).
막2: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옹호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그런 후에 예수님은 친히 그 질문에 대해 답변하셨습니다.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한 주간씩 혼인 잔치를 했습니다. 따라서 잔치 중에 월요일과 목요일이 끼일 수 있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 때는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라도 잔치에 참여하는 동안은 금식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전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초상집에서는 울며 슬퍼해야 합니다. 그러나 잔칫집에서는 웃으며 춤을 추어야 합니다. 지금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습니다. 이는 잔치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모두가 기뻐하며 즐거워할 때입니다. 결코 금식하면서 슬퍼할 때가 아닙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신랑은 물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혼인 집 손님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습니다.
그 동안 모든 사람들이 메시야를 기다려왔습니다. 이제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고도 은혜로운 말씀을 항시 듣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이 놀라운 이적들을 행하시는 능력도 직접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들은 모든 죄를 다 사함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기에 지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면서 슬퍼할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춤을 추면서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할 때입니다.
막2: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는 참으로 뜻밖의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한 주간의 혼인 잔치가 끝이 납니다. 그러면 혼인 집 손님들은 각자의 집으로 되돌아갑니다. 신랑과 신부만 그대로 남아서, 그 곳에 자기들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삽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장차 신랑을 빼앗길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여기에서의 신랑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여기서 장차 신랑을 빼앗긴다는 말씀의 뜻은 예수님이 앞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지금은 제자들이 금식할 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연히 금식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때에 제자들이 하는 금식은 바리새인들이 월요일과 목요일에 하는 금식과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인 금식을 습관적으로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가슴을 찢는 슬픔의 표시로 참된 금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과연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랑을 빼앗겼을 때 금식했습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과연 그들은 슬퍼하며 금식했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누가복음 24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눅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그들의 얼굴에 슬픈 빛을 띠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들은 그 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동행하시면서,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제 그들의 목적지 엠마오에 이르렀습니다.
눅24: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눅24: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눅24: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여기에 “음식 잡수시다”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헬라어의 원 뜻은 “기대어 눕다”입니다. 유대인들은 만찬을 들 때, 기대어 눕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만찬을 들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아마도 이 때는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 기대어 누웠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슬픈 빛을 띠었습니다. 따라서 분명 그들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그 이전부터 금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도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잠자리에 들고자 했을 것입니다.
이 집은 두 제자의 집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부부였든지, 또는 부자지간이었을 것입니다. 어떻든지 간에 예수님은 그들의 손님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떡을 가지사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떡을 떼어서 두 제자에게 주셨습니다.
이는 대단히 의미가 깊은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신랑을 빼앗겼을 때는 그들이 금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빼앗겼던 신랑을 되찾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제는 신랑과 함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금식할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신 것입니다. 그 순간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제야 그들은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 즉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제자들이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전해주었습니다. 그들도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을 다른 제자들에게 소상하게 일러주었습니다.
눅24: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이와 같이 두 제자는 예수님이 떡을 떼셨다는 사실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떡을 떼심으로, 그들이 금식하며 슬퍼해야 할 때가 지나갔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면서 즐거워해야 마땅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제자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면서, 놀라며 무서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셨습니다.
눅24: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눅24: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눅24: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은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셨습니다. 생선 한 토막은 얼마 되지 않는 양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어떠한 의미입니까? 이제 금식은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시 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 금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이 이제는 먹고 마셔도 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슬퍼하며 금식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이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물론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금식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과 14장을 보면, 초대 교회 성도들도 필요할 때는 금식을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자발적으로 얼마든지 금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의무적으로 금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으로 인해서 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예수님으로 인해서 감사와 행복이 넘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혼인 집 비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금식하지 않는다고 비난받던 그의 제자들을 옹호하셨습니다. 곧이어 예수님은 두 개의 비유를 더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비유들을 통해서는, 복음의 특이성을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로, 복음의 특이성을 말씀하신 예수님(21~22절).
막2: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옛날에는 나일론이나 폴리에스테르와 같은 합성 섬유가 없었습니다. 그 때에는 면이나 털실과 같은 천연 섬유로만 옷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옷을 물에 빨면, 아무래도 옷이 줄어들기 마련이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컨대 낡은 옷에 구멍이 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여서 기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옷을 물에 빨 때, 생베 조각은 오그라들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낡은 옷은 이미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오그라들지를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생베 조각이 오그라들면서, 낡은 옷을 잡아당길 것입니다. 자연히 낡은 옷에 생긴 구멍은 더 커지게 될 것이고, 낡은 옷의 해어짐도 더 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여서 함께 기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의 생베 조각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든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 모든 것들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막1:1에 있는 바와 같이, 복음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의 낡은 옷이란 무엇을 가리키겠습니까? 우선 이것은 구약성경이나 구약의 율법을 가리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오히려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낡은 옷은 그 당시의 유대교를 가리킵니다. 그 당시의 유대교는 외식과 형식에 사로잡혔습니다. 성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전통을 고집하면서, 인간적인 의를 내세우기를 좋아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 당시의 유대교는 거짓 종교였습니다.
반면에 복음은 어떻습니까? 복음은 결코 인간의 의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온전한 의가 은혜로, 은혜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생베 조각, 곧 예수님의 복음을 낡은 옷, 곧 그 당시 유대교의 전통에 붙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막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옛날에는 오늘날처럼 유리병이나 플라스틱 제품의 그릇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염소 가죽으로 부대를 만들어서, 그 속에 포도주를 담아서 보관했습니다. 염소 가죽은 아주 유연하면서도 신축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포도주를 담아두기가 매우 적합했습니다.
먼저 염소의 목을 잘라냅니다. 그리고는 그 밑으로 가죽을 벗겨냅니다. 염소의 가죽은 부드럽고 신축성이 좋아서, 통 채로 잘 벗겨집니다. 네 발 쪽에 있는 구멍은 완전히 꿰매서 봉해버립니다. 그리고 목 부분을 끈으로 매어서, 가죽 부대의 입구로 사용합니다.
아울러 포도주를 만드는 과정은 이와 같았습니다. 먼저 수확한 포도를 큰 통에 넣고서 짓이깁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포도즙이 됩니다. 그것을 가죽 부대에 담아둡니다. 포도즙이 발효하면서, 가스가 나옵니다. 그러다 보면 가죽 부대가 부풀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어느 정도 가죽 부대가 부풀어오르면, 그 속에 있는 포도주를 다른 가죽 부대로 옮깁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합니다. 그러다 보면 밑바닥에 가라앉은 찌꺼기는 다 걸러집니다. 그리고서 아주 질이 좋은 묵은 포도주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 과정에서 반드시 유의해야 할 사항은 무엇입니까? 새 포도주일수록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왕성하게 발효합니다. 그러기에 그만큼 신축성이 좋은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만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낡은 가죽 부대는 이미 늘어날 대로 다 늘어나서, 더 이상의 신축성이 없습니다. 따라서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려 버립니다. 그 결과 포도주도 가죽 부대도 다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앞선 비유와 똑같습니다. 여기서의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아울러 여기서의 낡은 가죽 부대는 외식과 형식과 전통에 사로잡힌 그 당시의 유대교를 가리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고자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유대교의 틀에 넣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과 유대교는 결코 양립할 수 없으며, 결코 조화를 이룰 수도 없습니다.
갈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러니 어찌 예수님을 배척하고 그저 인간의 의만을 내세우는 유대교와 조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복음과 유대교와의 관계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타종교와의 대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도가 지나쳐서 종교다원주의와 종교혼합주의가 대두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이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다른 종교들도 인간의 의를 중요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결코 복음을 타종교의 틀에 집어넣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새 포도주를 버리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타종교의 틀에 끼어 맞추려 하다보면, 복음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복음은 독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누가복음은 오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습니다.
눅5: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유대교라는 묵은 포도주를 너무나도 오래 마셔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인 새 포도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묵은 포도주인 유대교의 전통에 사로잡혀서 멸망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려 들지는 않습니까?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려 들지는 않습니까? 묵은 포도주만 좋다고 하면서, 새 것을 원하지 않는 모습은 아닙니까?
모든 외식과 형식을 다 버립시다. 오로지 믿음으로 예수님만 바라봅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합시다. 그리해서 예수님의 은혜를 듬뿍 받아, 날마다 새 포도주와 같이 생명력이 넘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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