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17:1-7 2010.8.1(일)
그릿 시냇가의 은혜
일년중 가장 무더운 때입니다. 이런 때 시원한 시냇가로 간다면 얼마나 시원할까요? 오늘 저는 여러분을 시원한 이스라엘의 그릿 시냇가로 모시겠습니다. 그릿 시냇가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보통은 여리고 근처에 있는 와디 켈트라는 골짜기로 봅니다(그림 1-2). 와디 켈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움푹 꺼진 골짜기입니다. 사방이 기암절벽으로 막히고 한번 들어가면 밖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곳,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이스라엘의 그랜드 캐년이라고 부릅니다. 이 골짜기는 일년 열 두달 물이 흐릅니다. 이 골짜기의 상류에 커다란 샘이 있고 그 샘에서 사시사철 물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이 물로 예수님 시대 여리고에 겨울 별장을 짓고 살았던 헤롯 대왕이 자기 별장으로 물을 끌어 들였던 수로의 흔적이 지금도 선명한(그림 3) 이 골짜기를 사람들은 그릿시냇가라 말합니다.
그런데 그 시냇가는 깊고 험해서 아무나 가지 않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순례객들은 이곳을 가지 않습니다. 이곳은 하이킹하는 사람들, 모험심이 특별히 강한 사람들, 그리고 거기 있는 수도원에 사는 사람들만 들어 갑니다. 다만 멀리 바라보는 데 바라 보기만 해도 무섭습니다. 그런데 그 험한 골짜기에 사람 하나가 보입니다. 도대체 사람 하나 없고 하늘만 뾰족이 보이는 그 외딴 골짜기에 누가 있는 것일까요? 오늘의 주인공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왜 거기 있는 것일까요? 스스로 간 것입니까? 누가 보낸 것입니까? 오늘 말씀 2-4절을 봅시다. 왕상17:2-4, “여호아의 말씀이 엘리야에에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스스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누가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보냈습니다.
왜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보냈을까요? 왜 아무도 가지 않은 험한 골짜기로 엘리야를 보낸 것일까요? 1절에 보면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보내기 전에 그를 불렀습니다. 왕상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하나님이 엘리야를 부를 때 엘리야의 프로필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 훗날 바알과의 싸움에서 하나님이 크게 쓰신 엘리야가 이 정도의 사람밖에 안된다니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부를 때 어떤 어떤 룰이 있나 보면 없습니다. 출신지나 부모를 소개하는 경우도 있지만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울은 기스의 아들이고 베냐민 지파 기브온 사람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아들이고 유다 지파 베들레헴 사람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출신도 없고 부모도 없습니다. “디셉”에서 태어나 “길르앗”을 떠돌았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평생 성경만 연구하는 학자들도 “디셉”이 어딘지 아직까지도 모릅니다. 요르단 북쪽 어느 산골마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를 때는 이렇게 다양하게 부릅니다. 좋은 가문에서도 부르지만 그렇지 않는 가문에서도 부릅니다. 레위지파의 사람 모세도 불렀지만 가난한 과부의 아들 사무엘도 불렀습니다. 양 부모가 제사장인 세례요한도 불렀지만 갈릴리의 가난한 어부 베드로도 불렀습니다. 공식이 없습니다. 그래도 공식이 하나 있다면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이 큰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부른 다음에는 반드시 공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른 사람을 훈련시킨다는 공식입니다. 은혜로 사람을 부르지만 사람을 그냥 사용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다듬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알맞게 리모델링합니다. 마치 도자기 만드는 도공과 같습니다. 도공은 아무 진흙이나 손에 넣지만 반드시 그 진흙을 그대로 쓰지 않습니다. 도공의 손에 들어간 진흙은 선택되는 은혜를 받았지만 동시에 훈련받는 은혜도 받아야 합니다. 도공은 흙을 반죽해서 도자기틀에 넣고 돌려 자기가 원하는 모양을 만들고 5천도, 6천도 되는 불에 넣어 굽고 니스칠 하고 말려서 그릇으로 내 놓습니다. 이 모든 과정중 하나라도 잘못되면 도자기를 깨뜨려 밖으로 던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쓰시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훈련시키는 방법중의 하나가 따로 떼어놓는 것입니다. 고립이라고 합니다. 고립이란 어떤 목적을 위하여 어떤 곳에 일정기간 떨어져 있게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부르신 후 그릿 시냇가로 보냅니다. “그릿”이란 “단절시킨다”는 뜻입니다. 부르신 시점과 보낸 시점이 별 차이가 없습니다. 1절에서 부르고 2절에서 보냅니다. 1절에서 하나님은 “앞으로 이스라엘에 비뿐아니라 이슬도 내리지 않으리라” 선포하게 했습니다. 엘리야는 명령대로 그렇게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포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그를 그릿시냇가로 보냈습니다. 엘리야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부를 때는 언제고 보낼 때는 언제입니까?“. ”오랜 무명에서 벗어나 이제 막 무대에 올랐는 데 하나님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제가 잘되는 것 그렇게 보기 싫습니까?“ 그는 아마 투덜대며 그릿 시냇가로 들어갔는지 모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볼 때도 원치 않은 고립 때문에 고독하게 산 적이 있습니까? 처음부터 잘 안나갔으면 말도 안합니다. 처음엔 잘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불렀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날 하나님이 나를 그릿 시냇가로 집어 넣습니다. 사람들속에서 대우도 받고 인정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그릿시냇가로 내쫓겼습니다. 나를 돌봐주는 사람도 없고 내가 바라볼 사람도 없습니다. 참으로 외롭습니다. 지독하게 고독합니다. 욱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마음대로 안됩니다. 사면초가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니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성경의 사람들은 자주 고립속에서 살았습니다
먼저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도 갑작스런 고립속에서 극심한 고독을 느끼며 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다가 어느날 형들에게 밀쳐 광야 구덩이에 빠집니다. 광야의 구덩이는 한번 빠지면 쉽게 나오기 어려운 곳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요셉은 구덩이서 살려달라 아우성치고 있는 형들은 그 옆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창37:25, “그들이 앉아서 음식을 먹다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다 애굽에 가서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몇 년동안 아무 죄없이 고립당했습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두 사람을 죽인 후 미디안광야에 들어가 40년을 외롭게 살았습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아무 죄없이 사울에게 쫓겨 젊은 날을 광야에서 숨어 살았습니다. 고립은 지리적으로만 격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고독한 것입니다.
그런데 강제적인 고립도 있지만 자발적 고립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선택하기 위해 하룻동안 광야에 들어갔습니다.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마14장에서 5병2어로 5천명을 먹이신 다음 “저희를 떠나서 따로 빈들로” 나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눅5장에는 나병환자를 고쳤습니다.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 왔습니다. 1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눅5:16, “예수께서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예수님은 스스로 고립되셨습니다. 자신이 드러난 것을 피하여, 기도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대면하려고 스스로 고립되셨습니다. 세례요한도 그랬고 바울도 그랬습니다. 세례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스스로 고립되었습니다. 강제적인 고립보다 자발적인 고립이 낫습니다. 그러나 어떤 고립이든 고통과 고독을 수반합니다. 왜 하나님은 왜 우리를 부르신 후 고립을 허락하실까요? 왜 하나님은 강제적이든 자발적이든 우리를 가끔 고립되게 하실까요? 그 결과 어떤 유익을 주실까요?
고립은 교만을 꺽고 겸손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립시키는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교만을 꺽고 겸손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 지금 하나님이 막 엘리야를 불렀습니다. 비록 무명이지만 하나님은 엘리야가 큰 사람이 될 것을 알아 보셨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는 위험도 아셨습니다. 교만의 위험입니다. 겁없이 아합과 이세벨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할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영웅심이나 공명심에서 해서는 안될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사람이 받을 가장 큰 은혜는 겸손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가 큰 일하기 전에 그릿시냇가로 보냈습니다. 그나마 시냇가 저 낮은 곳, 골짜기로 보냈습니다.
제가 지난 한 주간 금식하고 돌아왔습니다. 물론 완전금식은 못했습니다. 저녁에 죽 한 끼는 먹었습니다. 다음 한 주도 그렇게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운 여름에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온 몸은 축 쳐지고 입에서 연신 단내가 났습니다. 금식을 통해 받은 가장 큰 은혜는 겸손의 은혜였습니다. 평소에 교만이 그렇게 큰 죄인 것을 몰랐습니다. 살인, 정욕, 미움, 탐욕이 큰 죄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장 본질적인 죄는 교만인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죄가 나의 약함 때문에 오는 죄라면 교만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나의 의지적 부패에서 옵니다. 다른 죄가 실수로 오기도 하지만 교만은 절대 실수에서 나오는 죄가 아닙니다. 우리의 악한 본성에서 나오고 의도적인 반항에서 나옵니다. 다른 죄가 다른 사람 때문에 일어나는 죄라면 교만은 나 때문에 일어나는 죄입니다. 살인, 다른 사람이 미워서 죽입니다. 탐욕, 다른 사람이 가진 것에 욕심이 납니다. 정욕, 다른 사람이 나에게 성적 자극을 일으켜서 생깁니다. 그런데 교만은 순전히 나 때문에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이 없어도, 다른 사람이 자극하기 전에도 이미 내 속에 있는 본성에서 죄가 나옵니다. 그래서 시. 에스.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두 가지 죄를 말했습니다. 동물적 본성에서 나온 죄, 마귀가 직접 사주한 죄, “다른 나쁜 죄, 곧 시기, 술취함, 정욕, 미움, 탐욕등은 사탄이 우리의 동물적 본성을 이용해서 생긴 죄다. 그러나 교만은 동물적 본성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 곧장 올라온 마귀자신의 죄다. 다른 죄가 도덕적 죄라면 교만은 영적인 죄다” 했습니다.
모든 교만속에는 “내”가 있습니다. 한번 묻겠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거나 알아주지 않고 쓸데없이 간섭합니다. 어떻습니까? 싫습니까? 싫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 속에 있는 “나” 때문입니다. 남의 간섭을 받기 싫어하는 “나”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어떤 모임에서 한 사람이 거물급처럼 거들먹거립니다. 싫습니다. 왜 싫은지 아십니까? 내가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바로 거물급 인사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을 그가 되었으니 싫은 것입니다. 남이 잘하고 칭찬받는 것 보면 싫습니까? 왜 싫습니까? 그 사람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내가 그 사람처럼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싫습니다. 교만은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으로 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만은 단순히 상대적으로 나아야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압도하고 내가 나타나야 만족합니다. 교만은 끝까지 남과 비교하여 내가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죄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우월하지 못하면 기분이 나쁩니다. 남이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우월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내 속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앤드류 머레이가 말했습니다. 겸손이란 “자아가 비켜나고 하나님을 왕위에 모시는 것이다”. 내 속에 있는 내가 문제입니다. 크리프트라는 사람이 좋은 말을 했습니다. “겸손이란 내가 못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났든 못났든 내 생각을 덜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나는 부족하고, 나는 못났고, 나는 못배웠고” 라고 말하면 그것이 겸손인 줄 압니다. 아닙니다. 그것도 교만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있지만 여전히 자기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잘해요” 하는 것도 교만이지만 “나는 못해요” 하는 것도 교만입니다. 자기가 잘한 것을 자랑하는 것은 드러난 교만입니다. 그러나 자기 잘못한 것에 집착한 것은 숨겨진 교만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교만이 있습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교만하고 신자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교만합니다. 목사에게는 목사의 교만이 있고, 장로에게는 장로의 교만이 있습니다. 모태신앙은 오래 믿었다고 교만하고, 기도많이 하는 사람은 기도많이 한다고 교만, 봉사많이 하는 사람은 봉사한다고 교만, 전도 많이 한 사람은 전도 많이 한다고 교만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경계할 것이 “교만”입니다. 모든 죄와 다툼과 갈등이 이 교만에서 나옵니다. 다툼은 말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왜 말을 하는가 보았더니 상대방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려고 말합니다. 내 말과 내 생각에서 “내”가 쑥 빠져야 합니다.
평생 사막에서 기도만 하고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사막교부”라고 부릅니다. 이들의 영적 훈련의 최고 목표는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수도사에게 마귀가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하고 나타났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보냄받은 가브리엘 천사다”. 이 말을 들은 수도자가 그 자리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나는 미천한 종이라 천사의 방문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 순간 마귀가 사라졌습니다. 기도의 능력보다 겸손의 능력이 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기도 못하고 응답받은 세리가 기도 많이 하고 응답받지 못한 바리새인보다 나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겸손이 곧 응답의 비결입니다.
한 수도사가 70년동안 금식하며 성경을 읽었는 데 어느날 부터 성경이 깨달아지지 않았습니다. 답답해 하다가 하루는 수도원에 처음 들어온 신참 수도사를 보았습니다. “아, 그래, 그에게 찾아가 물어 봐야지” 하는 순간 천사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70년이나 금식하며 성경을 읽은 네가 오늘 갖 들어온 신참 수도자에게 물으려 가니 하나님이 네 겸손을 보시고 네가 깨닫지 못한 말씀을 깨닫게 하려고 나를 보냈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보다 겸손하게 읽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유창하게 설교하는 것보다 겸손하게 설교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한 젊은 수도자가 늘 교만 때문에 고생했습니다. 그래서 평생 수도만 하고 산 노인에게 찾아가 물었습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에 관심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 속에 있는 “내”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가끔 내 속에 있는 “나”를 낮추려고 나를 사람들에게 떼어 놓기도 하고 굴욕을 당하게도 하고 왕따당하게도 합니다. 교만을 벗어나 겸손하기 위함입니다.
고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따로 떼어 놓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사람과 함께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못합니다. 우리가 바쁘게 일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종종 하나님의 음성만 듣게 하려고 우리를 고립시킵니다.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엘리야는 이제 막 나타난 혜성같은 존재였습니다. 그가 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에게는 청중을 제압하는 영적 카리스마와 폭발력이 있었습니다. 바알이 권력과 야합하여 백성을 오도하는 시대에 하나님은 그런 인물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잘 말하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합니다. 선지자는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먼저 들어야 합니다. 겔3:17이 중요합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하기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목사는 목숨걸고 말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목회자는 많은 말을 합니다. 목회자는 할 말이 많은 사람입니다. 목회자가 생각해도 그렇게도 말을 많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말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잘 말하기 위하여 목숨걸고 말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겠고”. 그러나 동시에 듣는 기도도 원하십니다. 금식은 듣는 기도입니다. 힘이 없어 듣고 낮아져서 듣고 자기를 죽여서 듣습니다. 금식을 통하여 발견하는 것은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하나님께 쏘아대면서 정작 하나님의 음성은 잘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잘 들어야 잘 말합니다.
어떤 시어머니가 믿음이 없는 며느리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며느리에게 말했습니다. "애, 별 수 없다. 목사님에게 기도받으러 가자. 목사님이 아이를 위해 기도하시면 아멘, 아멘 하고 크게 대답해라“. 그런데 막상 며느리가 목사님의 기도를 받자 아멘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급해진 시어머니가 옆에서 크게 아멘 아멘 했습니다. 1년 후 아이를 낳았습니다. 누가 낳았을까요? 며느리가 아니라 시어머니였습니다. 믿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아멘대로 되는 것입니다. 들어야 합니다. 듣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우리의 평소 언어 생활도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을 줄이고 마음으로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미국의 엘톤 트루브러드란 사람이 예수님의 언어를 연구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언어을 연구해보니까 예수님은 네 가지 형태로 말씀했다고 합니다. 첫째 낮은 톤으로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소리지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웬만하면 소리지르지 말기 바랍니다. 소리지르다 보면 다음에는 더 큰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조용 조용히 말하는 훈련을 하십시요. 일반적으로 높은 톤으로 말하는 것보다 낮은 톤으로 말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둘째는 눈으로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입으로 말할 뿐아니라 눈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눈으로 말할 때 사람들이 마음으로 듣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짧은 말을 사용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을 보면 모두 단문입니다. 두 문장으로 길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내 양을 먹이라”. 짧게 말해야 호소력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눈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언어는 눈물의 언어입니다. 100마디 말보다 한번 울면서 말하면 그것이 더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말을 줄이고 눈으로 말하며 마음으로 말하고 침묵으로 말하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마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시원한 데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 듣습니까? 하나님도 내 말을 들었으니 나도 하나님의 말을 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사막교부들이 일생을 통해 훈련했던 것이 이 듣는 기도였습니다. 그들은 작은 기도실에 앉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소리를 낮춰야 합니다. 잘 듣기 위해서는 침묵해야 합니다. 한 젊은 수도자가 노인을 찾아왔습니다. “기도에 대하여 배우러 왔습니다”. 노인이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기도하나?” 그랬더니 젊은이가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길게 이야기하는지, 자기 경험담, 자기 무용담, 자기 자랑 다 나옵니다. 그때 노인이 말없이 잔에 차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차를 따르는 바람에 차가 잔에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젊은이가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차가 넘칩니다. 그만 따르세요”. 그때 노인이 말했습니다. “이것이 자네의 기도네. 자네는 자네로 너무 가득차서 도무지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네. 자네를 비워야 하네. 자네를 빈 잔으로 만들어야 하나님이 채우지 않겠는가?” 침묵의 기도는 자기를 비우는 기도입니다. 자기를 비워 하나님으로 채우는 기도입니다.
침묵의 기도는 또 내려놓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가끔 고통가운데 두는 것은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을 내려놓게 하기 위함입니다. 한 사람이 밧줄을 타고 우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우물속에 중요한 것이 빠져서 건져내려 함입니다. 그런데 한참을 내려갔는 데 밧줄이 끝났습니다. 겉으로 볼 때 이 정도면 되겠다 밧줄을 준비했는 데 밧줄이 짧습니다. 밧줄을 놓고 우물속으로 들어가자니 너무 먼 것 같고 밧줄을 타고 올라가자니 내려온 것이 아깝고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가 “에이, 밑져야 본전이다” 하고 밧줄을 놓았답니다. 그랬더니 밧줄과 우물의 차이는 10센티밖에 안 났답니다. 기도는 내가 붙잡고 있는 밧줄을 놓는 것입니다. 우물에 닿으려면 밧줄을 놓아야 합니다. 놓지 않고 목적지까지 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깊어보이지만 내려놓으면 금방입니다.
여러분, 엘리야가 그릿시냇가에 가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교만이 꺽여 겸손해졌습니다. 말을 줄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붙잡던 것 내려놓고 하나님만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6절 보겠습니까? 왕상17: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내를 마셨으나“. 기도는 이렇게 단순한 사람을 만듭니다. 까마귀가 아침, 저녁으로 공급했습니다. 까마귀가 가져왔다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작은 까마귀에 만족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 왕창 주지 않았습니다. 6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침에도, 저녁에도". 이왕 줄려면 한 번에 왕창 주실 것이지 "아침에도 조금, 저녁에도 조금". 그 작은 일상이 행복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이렇게 됩니다.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가 본 것은 기근의 시대에 까마귀를 통해 공급하시는 풍성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때부터 엘리야가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비우고 겸손히 맡긴 자에게 모든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공급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릿시냇가로 가서 잠시 고생했지만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공급을 확신하게 된 엘리야, 결국 그릿시냇가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습니다. 고립이 하나님의 품이 되었습니다. ”주님, 나와 동행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이 여름에 나도 모르게 사람들에게 멀리 떨어져 고통당하는 성도가 있습니까?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고통당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더 크게 들립니다. 고통의 소리를 듣지 말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세요. 특별히 이 여름에 자발적으로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 이 여름에 그릿시냇가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왕상17:1-7 2010.8.1(일)
그릿 시냇가의 은혜
와디 켈트, 헤롯의 수로 (그림 1-3)
왕상17:2-4, “여호아의 말씀이 엘리야에에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왕상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그릿=단절시키다
성경의 사람들은 자주 고립속에서 살았습니다
창37:25, “그들이 앉아서 음식을 먹다가”.
눅5:16, “예수께서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고립은 교만을 꺽고 겸손하게 합니다.
C.S.루이스, “다른 나쁜 죄, 곧 시기, 술취함, 정욕, 미움, 탐욕등은 사탄이 우리의 동물적 본성을 이용해서 생긴 죄다. 그러나 교만은 동물적 본성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 곧장 올라온 죄다. 다른 죄가 도덕적 죄라면 교만은 영적인 죄다”.
고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겔3: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왕상17: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내를 마셨으나“.
C.S.루이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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