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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8:1-8 2010.8.8(일) 낙심하지 말라

18:1-8 2010.8.8()

낙심하지 말라

더운 여름 한복판에 잘 지내십니까? 어떤 가정의 며느리가 믿지 않는 시어머니 때문에 매우 힘들게 삽니다. 시어머니가 늘 교회가지 말라”, “예수 믿어도 별 것 없데하면서 며느리를 핍박합니다. 그래서 며느리는 시어머니 위해서 늘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며 위로를 받는 데 어느 날 교회 식구들이 그것을 알고 시어머니에게 전도를 갔습니다. “할머니, 예수님 믿으시고 교회 나오세요. 며느님께서 할머니를 위해 늘 눈물로 기도하고 있어요”.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말합니다. “, 그것 다 내숭떠는 거예요. 나도 며느리가 노래부를 때 가만히 들어 봤는 데요 늘 시어미를 이겨 먹자는 노래만 해요”. 전도대원들이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아니, 무슨 노래를 부르는데요?” 시어머니가 말합니다. “, 뭐라더라너 시어밀 당해 범죄치 말고 너 용기를 다해 늘 물리쳐라. 너 시어밀 이겨 새 힘을 얻고, 이런 노래예요”. 며느리가 불렀던 것은 342, “너 시험을 당해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더운 여름을 지내면서 시험들지 않았습니까? 시험을 다른 말로 슬럼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도 슬럼프에 빠질까요? 두말할 것 없습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결국 모세는 슬럼프를 이겨내지 못하고 백성들을 향하여 분노를 퍼붓고 반석을 두 번 막대기로 쳤습니다. 그로 인해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엘리야도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갈멜산의 승리를 만끽하고 있던 엘리야에게 아합과 이세벨이 군대를 풀어 추격해 오자 자살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급히 천사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큰 일 날뻔 했습니다.

 

그렇게 기도많이 하던 사람들도이,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들도 슬럼프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는 데 우리인들 오죽 하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같이 약한 자들이 한번도 시험에 들지 않고 100% 성공적인 신앙생활만 하겠습니까? 어떻게 어릴 때부터 한번도 슬럼프에 빠지지 않고 죽는 날까지 아름답게 신앙생활을 하겠습니까? 어떻게 처음 믿었던 그 순수하고도 열심있는 믿음이 10, 20, 30년 지나도 변치 않고 가겠습니까? 문제는 시험이 올 때 어떻게 이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시험이 오고 슬럼프에 빠지면 반드시 우리가 낙심에 빠집니다. 문제는 시험이 오고 슬럼프에 빠질 때 우리가 낙심치 않고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성도들을 기도하면서 신앙인이 낙심하는 세 가지 이유를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는 일이 잘 안 풀릴 때 낙심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과부입니다. 과부가 오늘날 흔하고 문제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과부는 2천년전의 과부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과부가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시대는 힘있는 남자가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당시는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남자가 없이는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당시는 먹고 사는 수단이 오로지 농사 아니면 목축입니다. 어떤 일이나 힘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남자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이러다 보니 여자는 자연스럽게 남자에게 종속됩니다. 여자는 아기낳고 남자에게 복종하고 그러다가 조금 잘못하면 하갈처럼 쫓겨나기도 합니다. 그나마 남편이 있을 때는 법적인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없으면 여자는 살아갈 길이 막막합니다. 그래서 고대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이 부모없는 고아, 집없는 나그네, 그리고 남편없는 과부였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그래서 한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남편이 죽은 후부터 그에게 불어온 인생의 고된 바람을 온 몸으로 맞고 살아야 했습니다. 아마도 자식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뭔가 인생이 잘못 풀린 것입니다. 가끔 남편 잘 만나 호강하며 사는 다른 여자들을 보면 속이 상합니다. 가끔 혼자 앉아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나 생각하면 화가 납니다. 이래 저래 낙심천만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가끔 인생이 안풀린다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기대하고 시작했던 사업이 생각대로 잘 안 풀립니까? 빚을 얻어 시작한 사업이 경기침체로 깊은 늪에 빠졌습니까? 그렇게도 바라던 승진, 이직, 시험은 안되고, 직장 생활도 재미가 없습니까? 자녀들 결혼문제로 걱정은 태산같은데 어디 마음에 드는 아가씨, 남자가 없습니까? 집을 담보로 판교로 입주했는 데 집이 안 팔려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그럴 때 사람들이 하는 세 가지 해결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남들 다 그래하면서 마음 편하게 사는 것입니다. 좋은 말로 운명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계속 편하지는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은 다 그러고 살아. 고생끝에 낙이 오겠지하고 마음을 달래보는 것입니다. 중세의 스토아 철학이 그랬습니다. 문제는 생각은 괜찮은 데 해결책은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해결책이 있지 않겠습니까? 신앙적 해결책입니다. 신앙적 해결책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제가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발견하는 참 신기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누구나 잘 나갈 때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행복할 때는 아예 하나님에 대해서 묻지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갑자기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 하나님이 어디 있지? 왜 하나님이 나를 돕지 않지? 하나님이 나를 버렸나?” 하나님을 그렇게 잊고 사는 것도 이상하지만 어려울 때 하나님을 그렇게 잘 생각해 내는 것도 기적입니다. 문제는 하나님도 평소에 친했어야 어려울 때 나타나는 데 평소에는 잊고 있다가 갑자기 찾으니까 하나님이 멀리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인과 신앙인이 아닌 사람의 차이는 시험은 신앙없는 사람만 당하고 신앙인에게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안 풀리는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안풀릴 때도 많은 데 그것에 대한 해석이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하나님의 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럴 때 낙심하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병들었습니다. 간절히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간 후부터 교회를 안 나옵니다. 아내가 큰 병에 걸렸습니다. 온 교회가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자신도 할 줄 모르는 기도지만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돌아갔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으면 어떻게 그렇게 착한 아내를 데려 갈 수 있습니까?“

 

최근에 한 영성학자의 책을 읽었습니다. ”헤아려 본 슬픔이란 책입니다. 영국의 c.s. 루이스라는 사람인데 그는 59세까지 혼자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59세때, 죠이란 여자와 결혼했는 데 그 여자는 이미 암으로 여러 해 동안 투병생활을 해 온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루이스는 아내가 죽을지 알고 결혼한 것입니다. 결국 아내는 짧은 결혼생활을 마치고 3년만에 죽었습니다. ”헤아려 본 슬픔은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쓴 책입니다. 여기서 그는 많은 아픔과 고통을 토로합니다. 그리고 격정의 시간이 지난 후 루이스는 조용히 이렇게 씁니다. “사별이란 결혼한 두 사람의 사랑의 단절이 아니다. 사별도 결혼생활의 정상적인 단계다. 사별해서 두 사람이 헤어진 것이 아니라 사별까지가 두 사람의 만남이다. 사별의 아픔까지가 결혼이다”. 그것을 깨닫자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쉬운 말씀은 아니지만 부부 여러분에게 드립니다. 우리가 부부로 만난 이상 누군가 먼저 갈 것입니다. 똑같은 시간에 가더라도 이별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누군가 먼저 갑니다. 먼저 가리라고 여기고 사십시오. 그래도 슬프겠지만 먼저 가리라고 여기면 조금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까지가 우리의 만남인 것을 아십시오. 죽어서 끝이 아니라 죽은 후 슬픔을 감당하는 것 까지가 우리가 만난 이유입니다. 부부는 살아서 기쁨을 나누지만 누군가 먼저 죽어 슬픔을 남깁니다. 그것을 가슴에 안고 사는 것이 부부입니다. 가기까지가 우리가 부부로 만난 이유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시험을 만다고 고통을 만나고 안풀리는 일을 만날 때 신앙인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이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생생한 예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자기를 추격해 오는 이세벨 때문에 로뎀나무에 숨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처한 안되는 상황에 온통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안 좋은 결과 세 가지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비교의식입니다. “하나님, 저를 데려 가세요. 저는 제 조상보다 못한 놈입니다”. 어떻게 한 가지 일로 조상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 자기를 바라보면 늘 남과 비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바라보면 두 번째로 감정이 예민해집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아여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지금 엘리야 근처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세벨은 처음부터 그 먼 광야까지 올 마음이 없었습니다. 상황을 보면 간단할 것을 엘리야는 너무 자기 감정에 몰두하다 보니까 극단적인 생각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안되는 상황을 극단화합니다. “하나님, 이제 다 떠났습니다. 나만 홀로 남았습니다. 보십시오. 나는 외롭습니다”. 사실입니까?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는 사람 수천명을 남겨 두었습니다. 엘리야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알브레이트 뒤러가 쓴 작은 동화 하나를 좋아합니다. 이 동화는 이런 내용입니다. 잘 조련된 힘센 말을 탄 기사가 어느날 어둡고 거친 골짜기를 올라갑니다. 그는 왕궁에 사는 공주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그때 갑자기 무시무시한 노인 하나가 나타나 말합니다. “흘러가는 시간속에서 모든 것은 소멸한다. 우리 모두는 다 늙어간다. 허무하지 않나?” 그래도 기사는 앞으로 달렸습니다. 한참 가다가 또 사람이 나타나더니 말했습니다. ”나를 잊지 말라. 나는 너의 미래다“. 힐끝보니 죽음이었습니다. 또 지나갔습니다. 이번엔 마지막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나를 잊지 말라. 나는 너의 죽지 않은 과거다“. 흘끝보니까 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기사는 듣는 둥 마는둥 하고 앞만 향해 달렸습니다.

 

그때 그를 기다리는 공주가 멀리서 보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세 사람은 끊임없이 쫓아오면서 말합니다. 늙은이가 말합니다. ”너는 지금 늙어간다“. 죽음이 소리쳤습니다. ”나는 너의 확실한 미래다“. 죄가 소리쳤습니다. ”나는 너의 죽지 않은 과거다“. 그래도 기사는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마침내 왕궁에 도착했습니다. 기사는 공주와 함께 왕궁으로 들어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안되는 일, 속상한 일, 시험든 일, 안풀린 일들이 많습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자기만 바라보라고 자기 말만 들으라고 쫓아옵니다. 그러나 거기에 붙잡혀서는 안됩니다. 앞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안 좋은 것에 붙잡히지 말고 왕궁에 있는 공주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뒤에 것을 잊어버리고 푯대를 행해 달려야 합니다.

 

여러분, 죄를 지으셨습니까? 회개하고 잊고 하나님 바라보셔야 합니다. 여러분, 실수했습니까? 잘못을 인정하고 앞을 향해 달리셔야 합니다. 혹시 상처를 받았습니까? 상처보다 더 큰 문제는 거기 머무르는 것입니다. 혹시 자녀 때문에 속상합니까? 자녀의 문제에 몰두하여 일희일비하는 한 자녀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고 잊어 버려야 합니다. 혹시 용서못할 사람있습니까? 빨리 잊고 하나님 바라보아야 합니다.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하나님께 맡기고 병을 잊엊버려야 합니다. 안되는 일 때문에 속상합니까? 안되는 일에 몰두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신앙의 원리는 항상 이것입니다. “안되는 나를 바라보지 말고 되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이것이 낙심을 막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기도한 후 응답이 없을 때 낙심합니다.

그래도 다행히 이 여인은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여인의 기도는 재판장에게 하소연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남편이 없어서 법적으로 많은 손해를 본 것 같습니다. 전답을 잃었는지 소유를 빼앗겼는지 둘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재판정에 나가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재판은 열리지 않고 해결책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몇 번을 더 호소했습니다. 그래도 재판장이 시간만 끌지 속시원한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쳤습니다. 재판장까지 무시하니 무슨 재미로 살겠습니까? 그래서 낙심에 빠졌습니다.

 

여러분, 이 여인이 기도를 시작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사실 이 여인은 기도밖에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관한 가장 좋은 말이 있습니다. 미국의 윌리엄 제임스가 한 말입니다. "우리는 기도 밖에 할 수 없어서 기도한다“. 기도는 기도밖에 할 수 없을 때 제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있는 데 시간은 남고 하니까 기도라도 해볼까해서는 좋은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다같이 하겠습니다. ”나는 기도 밖에 할 수 없어서 기도합니다“. 기도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제가 세계에 가보니까 민족에 따라 교회에 따라 기도하는 방법과 자세가 다릅니다. 그리스에 가면 정교회가 있습니다. 이들은 기도문을 읽으며 기도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춤추며 기도합니다. 중국의 지하교회 성도들은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너무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간절히 기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한국인은 어디 가나 주여삼창하고 기도합니다. “주여, 주여, 주여”. 미국에 있는 한인들도 주여삼창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보고 배워 영어로 로드, 로드, 로드했습니다. 그랬더니 한국사람은 그렇게 하면 기도할 맛이 안 난다고 다시 주여, 주여, 주여합니다. 기도하는 자세도 다릅니다. 성경에 보면 베드로는 무릎꿇고 기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일어나서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땅에 엎드려져 기도했습니다. 엘리야는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습니다. 마리아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해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은 눈뜨고 일어나서 기도했습니다. 세리는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기도하든 기도에서 두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는 간절히 기도할 것과 또 하나는 기도는 우리가 하지만 응답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간절히 기도합니까? 기도밖에 할 것이 없어 기도합니까? 어느 교회에 결혼 적령기에 있는 아가씨가 자기의 결혼문제로 기도했습니다.“하나님, 제가 혼기가 꽉 찼습니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해주세요”. 그랬더니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친구가 말합니다. “기도할 때 자기만 위해서 기도하면 응답이 적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면 응답이 많단다”. 그래서 아가씨가 기도를 바꿨습니다. “하나님, 우리 엄마가 딸을 시집보내야 하거든요. 엄마에게 사윗감을 허락해 주옵소서”. 결국 아가씨는 좋은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잘못 기도했든지 하나님의 때가 아니든지.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만 하면 좋은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마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기도를 방해합니다. 앞에서 말한 영국의 c.s. 루이스가 참 좋은 책을 썻습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입니다.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책에서 마귀가 신자를 유혹하는 많은 방법이 있는 데 그 중에 기도를 못하게 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처음부터 기도할 마음을 막는 것입니다. 기도의 원천봉쇄입니다. 기도하고 싶은 데 마음이 안 생깁니다. 마귀가 주는 첫 번째 방해입니다. 다음은 기도를 하되 앵무새처럼 하는 기도입니다. 의무감으로 하고 정신통일, 마인드 콘트롤, 명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은 수준높은 기도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 배후에서 마귀가 기도를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기도하다가도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고 있으면 뭘해. 열심히 믿음으로 살면 되지”. 그러면 믿음으로도 못살고 기도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기도를 하되 굳이 소리낼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다 아시지 않느냐? 식으로 유혹해서 기도하다 자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이런 생각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기도많이 한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게 뭐냐?”. 실제로 기도많이 한 사람중에 평판이 좋지 못한 사람을 떠오르게 하면서 그럴 바에는 기도하지 말자 하고 중단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해서 설령 이루어졌다고 해도 꼭 기도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느냐고 의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해서 병이 나았습니다. "꼭 기도해서 나았나? 약으로 나았지“. 하면 점점 기도를 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나쁜 유혹이 있습니다. 응답에 따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기도할 때 늘 응답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기도해서 응답이 있으면 하나님 있고 응답없으면 하나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응답도 자기가 정한 시한에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와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면 마귀가 속삭입니다. “봐라. 하나님이 응답한다고? 다 들어주신다고? 무엇을 다 들어주시느냐? 없지 않느냐?”하고 의심하게 합니다. 그러면 몇 번 기도해보다 낙심하고 기도를 중단합니다. 여러분, 기도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선물보다 선물을 주시는 분이 더 중요합니다. 선물은 가장 좋은 때, 가장 좋은 것으로 줄 것이요 더 중요한 것은 선물을 주시는 분입니다.

 

왜 기도하면서 낙심합니까? 하나님보다 선물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게 하신 분보다 내 기도를 더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과정보다 기도의 결과를 더 중요시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라면 그가 응답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가 우리 삶의 통치자라면 그 분에게 우리가 결과를 강제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 편에서는 언제나 응답합니다. “지금 주겠다”. “기다려라”. “안돼”. 셋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기다리는 것도 응답이고 안되는 것도 응답입니다. 지금 안준다고 응답이 없다는 것이지 하나님 입장에서는 다 응답한 것입니다. 응답보다 하나님을 더 믿어야 합니다. 그 분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것도 응답으로 받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기도하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셋째로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때 낙심합니다.

낙심하는 이유는 또 하나 있습니다. 일이 안 풀릴 때 낙심하고 응답이 없어서 낙심하지만 이 과정을 다 거쳤다 해도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1절 보십시오. 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중요한 단어가 항상입니다. 7절을 또 보세요. 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신앙의 세 번째 단계는 지속성입니다. 이 단계가 진짜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 의지하고자 교회 나오고 당장 응답이 없어도 하나님 믿는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가 연속적이어야 합니다. 한 가지 방향으로 꾸준히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1, “항상입니다. 그것이 7, “밤낮 부르짖는 것입니다. 8절 뒷부분을 보십시오. 18:8,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주님께서 염려하신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어쩌다 예수믿어 구원받는 믿음입니까? 한번 쯤 눈물흘리고 기도하는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지속하는 믿음입니다. 끝까지 가는 믿음입니다.

 

세상 일도 지속해야 성공합니다. 얼마전에 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 일에 만 시간을 투자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만 시간은 하루 세 시간씩 10년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세상 일도 만 시간을 투자해야 성공하는 데 하물며 믿음입니까? 하물며 영적 생활입니까? 오늘 말씀에 나오는 과부도 결국 재판장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문제도 해결되고 가정도 평화를 회복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고 거기서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한번의 목숨건 기도로 원하던 응답을 받을 수 있지만 그 응답이 계속되지 않으면 계속적인 승리는 없습니다. 재판장이 선물 한번 주었다고 그것으로 기도를 쉰다면 여인에게 지속적인 영적 승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권면합니다. 이것은 어려운 권면이지만 제가 오랫동안 목회하면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 스쿠르테이프에 나온 마귀의 유혹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교회를 정하지 않았다면 더 이상 교회를 찾지 마십시오. 세상에 나에게 맞는 교회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맞기 때문에 교회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나옵니다. 나무도 자주 옮겨심으면 열매맺지 못합니다. 방황하다가 듣는 한번의 명설교보다 본교회에서 듣는 평범한 설교가 나를 살립니다. 교회를 정해야 마음도 정하고 지속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정하고 나왔습니다. 다음 여러분은 지루함을 이겨내셔야 합니다. 어떤 때 설교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어떤 때 설교내용이 내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즉각적인 반응은 보이지 마십시오. 좀 더 참고 기다려 보십시오. 초기에는 반드시 부적응할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초기에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다가 1, 2, 3년이 됩니다. 그때 한번 더 유혹이 옵니다. 교회의 문제점이 보이고 신자와의 갈등도 생깁니다. 이 단계도 이겨내셔야 합니다. 이때 이렇게 하면 됩니다. 논쟁하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승리합니다. 주님이 원하셨던 것은 과부가 한번의 기도로 완전한 승리에 이른 것이 아니라 항상기도하고, “밤낮 부르짖고”, “세상끝날에도 믿음을 볼 수 있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겠습니까? 끝까지 달려 주님앞에 설 때 잘했다. 끝까지 달렸구나. 수고했다". 주님의 말씀을 듣겠습니까? 아브라함도 기다리고 기다리되 이삭을 볼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요셉도 참고 참되 애굽의 총리가 될 때까지 참았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누가 세상에서 안되는 일을 당하더라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낙심치 않겠습니까? 누가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어도 선하신 주님만 바라보고 낙심치 않겠습니까? 누가 이런 저런 방해물을 뚫고 끝까지 달려 세상 끝에 믿음을 보시기 원하시는 주님앞에 서겠습니까? 누구입니까? 아멘 하십시오. 우리 모두 그렇게 되시기 바랍니다.

 

 

 

 

 

 

 

 

 

 

 

 

 

 

 

 

 

 

 

 

18:1-8 2010.8.8()

낙심하지 말라

 

일이 잘 안 풀릴 때 낙심합니다.

 

엘리야가 자기에게 몰두했을 때

- 남과 비교했다

- 감정이 예민해졌다

- 상황을 극단화했다

 

기도 응답이 없을 때 낙심합니다.

 

윌리엄 제임스, "우리는 기도 밖에 할 수 없어서 기도한다“.

 

C.S.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책 표지 소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때 낙심합니다.

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18:8,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