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5:1 2010.8.15(일)
자유로 종노릇하지 말라
오늘은 광복 60년, 뜻깊은 평화통일 주일입니다. 이 날을 위해서 우리 민족이 얼마나 많은 고난의 대가를 지불했는지. 그 결과 우리가 얼마나 자유롭게 사는지. 자유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자유롭게 산다는 것을 아십니까? 길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길을 잃어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유를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유를 잃어보는 것입니다.
2007년,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샘물교회 사건이 있었습니다. 23명의 단기선교사가 약 20일간 예정으로 아프간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귀국을 4일 앞두고 탈레반 반군에게 피납되었습니다. 그로부터 42일, 탈레반에게 끌려 다니면서 온갖 죽음의 공포속에 헤매다가 결국 두 명이 죽고 21명이 살아 돌아온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한국교회가 많은 어려움을 당했으나 두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들이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선교에 임했다는 것과 그리고 그 긴 억류 생활을 통해 자유의 소중함을 경험한 것입니다.
대원들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유경식장로가 쓴 간증에 의하면 그들은 선교 16일만인 7월 19일, 탈레반에게 납치되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데 갑자기 총을 든 남자들이 가로 막았습니다. 그리고 차를 끌고 비포장도로를 통해 탈레반 마을로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씩 비디오를 찍었습니다. 그때 대원들은 “이제 죽나보다” 생각했답니다. 일부 자매들은 훌쩍 훌쩍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선교팀을 이끌던 배형규 목사님이 일어나 말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전 세계의 성도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협상을 유리하게 끌기 위하여 우리 중에 한 두명을 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들의 선전 효과를 위하여 비디오를 찍으면서 총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제가 제일 먼저 앞장을 서겠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그때 나이가 많은 유경식장로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순서를 바꾸시지요. 저는 이제 나이도 많고 살 만큼 살았습니다. 목사님은 나이도 젊으시고, 나가서 할 일도 많으시고, 우리 팀원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셔야 하니 제가 먼저 나가겠습니다.” 그때 배목사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전부터 저는 나이가 들면 선교지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때가 좀 빠르게 온 것 뿐입니다”. 유장로가 또 말했습니다. “목사님, 정 그러시면 공평하게 제비를 뽑지요” 그때 배목사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장로님, 저는 목사입니다. 제 자리 넘보지 마십시오”. 얼마후 배목사는 탈레반에게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이에 12번이나 집을 바꾸면서 끌려다니다가 드디어 42일 만인 8월 29일, 석방되었습니다. 그 지긋 지긋 지긋한 악마의 소굴에서 풀려나면서 유경식 장로는 이렇게 소감을 말했습니다. “아, 나는 그때 자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자유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내가 얼마나 목숨을 걸고 이 자유를 지켜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한국 외교부의 직원들을 만나면서 또 생각했습니다. ”아, 조국이 얼마나 나에게 귀한지. 사지에 빠진 국민들을 구하기 위하여 조국이 목숨걸고 수고하는구나. 나에게 조국이 있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그렇습니다. 자유는 빼앗겨 봐야 그 소중함을 알고 조국은 떠나 보아야 조국의 고마움을 압니다. 그래서 오랜 경험속에서 인간이 발견한 몇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첫째. 악마도 병이 들면 수도사가 된다. 둘째. 방공호속에 있는 사람중에는 무신론자가 없다. 그리고 셋째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 오늘 우리는 60주년 광복을 맞아 우리가 누리는 있는 자유를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는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누리고 지켜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참 자유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옵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한 말입니다. 갈라디아는 지금의 터키 중부지역에 위치한 곳으로 바울은 일찍이 이곳에 가서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갈라디아의 중심지는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입니다. 저도 그곳에 방문한 적이 있는 데 그 중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은 아주 큰 도시입니다(사진). 주전 25년 로마의 시이저 황제가 세운 이 도시는 로마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도시였습니다. 로마시대의 주요 건물을 거기서 다 볼 수 있습니다. 신전, 특히 황제 신전이 있습니다. 로마사람들은 황제를 신처럼 섬겼습니다. 다음은 극장이 있습니다. 극장은 시민들이 모여 연극이나 음악을 공연했고 때로는 검투사들이 맹수와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공중 목욕탕, 로마시대의 공중목욕탕은 온탕, 열탕, 사우나 시설까지 다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좌우로 늘어선 기둥, 상점, 그리고 수로, 비시디아 안디옥은 모든 것을 다 갖춘 로마식의 도시였습니다. 이곳이 바로 갈라디아, 그래서 갈라디아 사람들은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곳에 복음을 전한 이후에 문제가 하나 생겨났습니다. 곧 자유의 문제입니다. 로마 황제를 신으로 사회에 예수믿는 사람이 생기자 로마는 신자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핍박을 받자 옛날 종교로 돌아가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힘들게 신앙생활 해야만 했습니다. 자유가 훼손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예수를 잘 믿으려면 율법과 함께 믿어야 한다. 율법도 성경이 아니냐?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게 그 많은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를 믿습니까? 구약에 나오는 율법이 모두 613개입니다. “하지 말라”는 율법이 365개, “하라”는 율법이 248개, 그 많은 율법들을 지키며 예수믿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율법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안 지키면 구원받지 못한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초신자인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 안지키면 구원 못받는다” 하니까 그들의 신앙의 자유, 마음의 자유가 사라졌습니다. 한편으로는 로마로부터 정치적 핍박을 받고, 또 한편으로 유대인들 때문에 율법의 압박을 받으니까 갈라디아 교인들은 안팎으로 자유에 대한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 힘들어 하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 예수믿음로 얻는 진정한 자유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자유”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갈라디아 교인들이 멘 멍에가 어떤 멍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1절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13절에 또 나옵니다. 갈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여기에도 자유가 나옵니다. “너희가 자유를 위해 부름받았으니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 공동번역은 더 쉽게 번역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분명합니까? 그렇습니다. 신앙의 문제는 자유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자유케 되려고 예수님 믿고 예수님 믿음으로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자유를 얻어야 합니까? 13절에 해답이 나옵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다같이 “오직 사랑으로”. 사도 바울이 말한 자유의 해법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자유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 원리가 모든 사랑에 적용되지만 특히 나라 사랑, 민족 사랑에도 적용됩니다. 이 나라가 진정으로 자유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 나라를 사랑합니까? 나라를 사랑하는 것을 “애국”이라고 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것을 “애족”이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애국자였습니다. 모세, 애국자였습니다. 애굽에서 종이 된 민족과 함께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무엘, 애국자였습니다. 불레셋의 공격으로 도탄에 빠진 민족을 건져 사울, 다윗을 통해 나라를 세웠습니다. 느헤미아, 애국자였습니다. 페르시야에 살면서 오매불망, 나라를 생각, 드디어 예루살렘에 와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재건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애국자였습니다. 그는 평생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았고 미구에 로마에 의해 멸망할 조국을 보며 우셨습니다. 애국은 나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자유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랑이냐가 문제입니다. 사랑은 좋은 것이지만 모든 사랑이 다 사람을 자유케 할까요? 이번에 일본총리가 “총리담화”를 발표했습니다. 을사조약 100년을 맞이하여 우리 민족에게 준 상처를 사과한 것입니다. 그는 일본이 우리 민족의 의사에 반하여 우리를 강제 지배했다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 우리 민족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시인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일본이 보인 태도중에서 가장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이 사과하지만 절대 그 이상을 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일본 사람들보면 답답합니다. "왜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할까? 이미 지나간 것이고 자신의 선조들이 한 일을 가지고 왜 무조건 덮으려고만 할까? 왜 항상 일본은 진실하지 못할까?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말하면 훨씬 진솔하고 가까워질텐데“.
그러다가 프랑스의 현대 작가 “드니 드 루즈몽”이 했다는 말이 저에게 해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신이기를 그칠 때 비로소 악마이기를 그친다”. 이 말을 다시 말하면 “사랑은 신이 되기 시작하는 순간, 악마가 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자기의 사랑을 절대화하고 교조화하면 그때부터 그 사랑은 다른 사람을 죽이는 악마가 된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그렇습니다. 그들도 결국 자기 나라를 사랑한 것입니다. 자기 나라를 사랑했기때문에 조선을 침략했고 자기 나라를 사랑했기에 조선 황제의 도장도 없이 국권을 찬탈했고 자기 나라를 사랑했기 때문에 목숨걸고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사랑이었습니다. 잘못된 사랑이 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의 비밀은 사랑이 신이 되면 악마적이 된다는 데 있습니다. 신이 된 사랑이 곧 일본 제국주의입니다. 제국주의는 신으로 왜곡된 극단적인 애국주의입니다. 자기 나라 사랑을 절대적 가치에 넣자 일본은 조선이든 중국이든 아무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1932년부터 시작된 정신대 여성을 다 합치면 20만 가량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 조선 여성이 80%입니다. 가난하지만 순수하게 살던 주선 소녀들에게 "마음껏 흰밥도 먹고 돈도 번다"고 속여 중국으로, 하와이로, 괌으로, 인도차이나로 데려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생시켰습니다. 그 대부분은 낯선 땅에서 “어머니”를 부르며 병든채 죽어갔고 그나마 소수가 남아 일본 대사관앞에서 피맺힌 절규를 해도 그들은 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나라를 잘못 사랑해서 그 사랑이 악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사랑은 악마가 됩니다. 역사를 보세요. 나라와 민족을 망쳐놓은 사람중에 자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독일의 히틀러, 게르만족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그 결과 무고한 유대인 600만을 죽였습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온, 자기 조국 프랑스를 너무 너무 사랑했습니다. 그 결과 수 백만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보냈습니다. 캄보디아의 폴포트, 자기 조국을 농민이 지배하는 유토피아의 나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자기 동족 200만을 죽였습니다. 스탈린은 자기 조국 러시아를 위해 1300만, 모택동은 자기 나라 중국을 위하여 650만을 살해했습니다. 미국을 보세요. 세계적인 민주주의 국가 미국도 자기나라를 위하여 많은 악을 저질렀습니다. 인디언들을 수없이 죽이고 고립시켜 인디언 보호구역이란 것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인디언 보호구역은 미국 전역에 310개가 있고 그 면적만 해도 한반도보다 큽니다. 거기 사는 인디언들은 대부분 정부의 혜택으로 살아가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마약이나 알콜중독, 사냥등으로 무의미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월드컵이 열린 남아공, 유명한 아파르헤이트 정책을 아십니까? 인종차별정책입니다. 백인, 흑인, 유색인, 인도인등으로 구분하여 거주지를 분리시키고, 통혼금지, 출입구역분리하는 정책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다 자기 나라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사랑은 좋은 것이지만 사랑이 절대화되면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나라를 사랑하지만 국수주의, 배타주의, 수구주의, 제국주의로 가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악마적 사랑입니다. “사랑도 신이 되면 악마적이 된다”. 이것은 우리의 삶 어디서나 적용됩니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되 자녀를 신으로 삼으면 그 사랑 때문에 자녀가 악마적이 됩니다. 우리가 일을 사랑하되 일을 신으로 삼으면 그 일이 악마적이 되어 우리를 병들게 하고 죽입니다. 하나님외에 어떤 것을 더 하나님보다 사랑하면 결국 그 사랑이 우리를 해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 절대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지나치게 보수화시키는 경향에서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보수주의는 자기를 절대화할 가능성이 디른 무엇보다 높습니다. 자기를 절대화하고, 자기 생각을 사람들의 판단밖에 두기 시작하면 그때는 보수주의든 진보주의든 심지어 민주주의까지도 악마적이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절대화하십시오. 나라를 사랑하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마십시오. 또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제대로 나라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국경은 없지만 그리스도인은 조국을 사랑합니다. 이 나라를 지켜온 수많은 애국자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이 나라를 진정으로 자유케 합니다.
자유는 자유를 얻은 자만 누릴 수 있습니다.
자유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는 자유를 얻은 자만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실까요?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다” 말합니다. 성경의 자유는 세 가지입니다. “자유를 얻었다”. 얻는 자유입니다. “자유를 누리라”. 누리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자유를 선포하라”. 이루는 자유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가 “얻는 자유”입니다. 자유는 얻었기 때문에 누리고 누리기 위해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 믿을 때 받는 축복을 자주 법적인 용어로 표현합니다. 그것이 “속량”이란 말과 “의로와졌다”하는 말입니다. 가령 롬3:23-2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갚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속량은 “용서”입니다. 보통 재판에서 잘되면 용서받습니다. 용서는 사면입니다. 사면이란 잘못했지만 형집행을 연기하거나 면제해주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대통령이 8.15특사로 많은 분들을 사면했습니다. 사면은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있지만 형을 면제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롭게 되었다”, 어려운 말로 “칭의”란 말은 조금 다릅니다. “대통령이 형을 면제해주었다”. 이것이 사면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형을 면제한 그 사람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함께 식사를 했다“. 이것이 ”의롭게 된" 것입니다. 성경학자 마쿠스 로운의 말을 빌리면 이렇습니다. 사면은 “너는 이제 가도 된다.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내가 면제해주었다” 입니다. 그런데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너는 이제 내게로 오라. 죄를 지은 너와 내가 평생 사랑하며 살리라”. 이것이 “의롭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보여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메리 피츠패트릭”이란 여자를 석방했습니다. 이 여자는 살인죄로 무기형을 받고 있는 죄수였습니다. 그런데 카터는 이 무기수를 석방할 뿐 아니라 그를 백악관으로 불러 자기 딸 에이미의 가정교사가 되게 했습니다. 대통령이 한때 살인자였던 사람과 매일 만나고 식사하고 한 가족이 되게 한 것입니다. 대통령은 그를 석방, 곧 “속량”했을 뿐 아니라 그의 가족이 되게 했습니다. 곧 “의롭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믿는 저와 여러분은 전혀 다른 자유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용서를 받았습니다. 속량받았고 석방되었습니다. 이것이 1차적 자유입니다. 세상 사람은 이것만 자유인 줄로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신 자유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청와대, 백악관에 들어가 대통령과 함께 살게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 날마다 그와 함께 먹고 마시게 했습니다. 간신히 감옥에서 나와 겨우 생존에 도움을 준 자유가 아닙니다. 간신히 용서는 받았으나 동네사람 창피해 밖에는 못나가는 자유가 아닙니다. 용서를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자유입니다. 다시는 죄로 형벌 받지 않을 자유와 함께 뿐 용서하신 하나님과 함께 평생 사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받았을 뿐 아니라 누리게 하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이 넉넉한 자유를 예수믿음으로 얻었습니다. 이것이 롬5:1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우리는 용서받았습니다. 1차적 자유, 우리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2차적 자유, 그래서 평화를 누립니다. 얻었으니 누리고 받았으니 누립니다. 여러분도 이 자유를 받았습니다. 두 가지 다 받았습니다. 이제 화평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자유에 관하여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자유는 누리기 위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지켜야 잘 누릴 수 있습니다. 다시 1절을 보실까요?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기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을 자유를 얻지 못한 이방인에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와 자유를 얻지 못한 불신자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믿고 자유를 얻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한 말입니다. 그러니 잘 들어야 합니다. “멍에”는 안 믿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믿고 자유를 얻은 사람들에게도 있습니다. 물론 멍에의 성격이 다릅니다. 안 믿는 자의 멍에는 순전히 “죄의 멍에”입니다. 그런데 믿는 자에게는 “거룩한 삶의 멍에”가 있습니다. 자유얻었다고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 빼앗길 수 있는 악한 자의 유혹이 있습니다.
이번 주 국민일보에 한국의 청소년 4명중 1명은 우울증인데 그 이유는 인터넷 중독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국내 청소년들의 우울증이 심각합니다. 네 명중 한 명이면 대단한 것입니다. 미국, 일본 청소년보다 두 배나 높습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학업부진, 비행, 가출, 심하면 약물남용, 자살로 이어집니다. 문제는 그 원인이 인터넷 중독에서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중독은 청소년뿐 아니라 신자를 죄의 포로로 몰고 가는 현대판 노예제도입니다. 누구나 중독에 빠지면 자유를 잃습니다. 악랄한 마귀는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믿어 자유를 얻었다 하면 “그래, 참 잘했네요”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작전을 펼칩니다. 중독작전입니다. 마귀의 중독작전은 세 가지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옵니다. 첫째, 어떤 죄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둘째 그것을 반복하게 해서 습관이 되게 합니다. 셋째 그 결과 죄의 포로가 되게 합니다.
2천년 교회역사에서 가르친 전통적인 “7대 대죄”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자들을 죄로 몰고가는 7가지 죄의 목록입니다. 교만, 분노, 질투, 정욕, 탐욕, 게으름, 탐식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성도들을 죄의 노예로 몰고 가는 주요한 죄의 목록들입니다. 마귀의 작전은 단순합니다. 이미 예수믿음으로 자유를 얻은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이것들을 생각나게 하고 습관들이게 하고 결과적으로 죄의 포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정욕”이 심각합니다. 정욕은 왜곡된 성적 욕망입니다. 단순한 성적 욕구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통제가 불가능한 성적 욕구가 정욕입니다. 이것은 본능에서 나오지만 또한 환경과 습관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은 아예 그렇게 될 환경을 만들지도 말고 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탐식”도 심각합니다. 단순히 잘 먹는 것은 탐식이 아닙니다. 미각적으로 먹거나 먹는 것으로 인생의 행복을 찾는 것이 탐식입니다. 음식을 줄여야 합니다. 먹는 것에 목숨걸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합니다. 영국 속담에 있습니다. “위가 막히면 뇌가 막힌다”. “탐욕”도 문제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버는 것은 탐욕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질자체를 사랑하고 그것에 대해 무모하게 욕심을 갖는 것이 탐욕입니다. 버트란드 럿셀도 말했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 가장 큰 것은 재물욕심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어느 교회에 부동산 투자 전문가인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선교회 회장이기도 한 그가 헌신예배 사회를 맡은 것도 잊어버린 채 발이 닳도록 아파트와 땅을 보러 돌아다녔습니다. 드디어 헌신예배 시간이 되었습니다. 단상에 올라가 신앙고백을 하고 찬송가를 불러야 하는 데 갑자기 메모한 것이 안 보입니다. 그때 집사님이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자, 우리 찬송가 105동 102호를 부르겠습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욕심가진다고 부자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8.15 광복절 65주년을 맞이하여 이 나라가 진정으로 하나님안에서 자유를 누리기를 원합니까? 이 나라를 사랑합시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합시다. 이미 우리가 예수믿음으로 자유얻은 것을 믿습니까? 그 자유를 소중히 지킵시다. 귀중한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맙시다. 이미 자유를 얻었으니 우리와 우리 민족이 다시는 종으로 돌아가지 맙시다. 주여, 우리 자신과 이 나라를 그리스도 예수의 자유로 지켜주옵소서.
갈5:1 2010.8.15(일)
자유로 종노릇하지 말라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사진-성경속 도시여행, 548-549. (1) 지도, “갈라디아” (2)사진-549. 큰 그림 두 장, 548. 큰 그림 두 장-모두 4장 사진)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5:13,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드니 드 루즈몽, “사랑은 신이기를 그칠 때 비로소 악마이기를 그친다”.
자유는 자유를 얻은 자만 누릴 수 있습니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롬3:23-24“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갚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속량(사면)=용서=대통령이 형을 면제해 주는 것
의롭게 되었다=칭의=대통령이 형을 면제한 사람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함께 식사를 하는 것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자유를 누리기 위해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불신자의 멍에=죄의 멍에
신자의 멍에=거룩한 삶의 멍에
마귀의 중독작전
죄에 대한 생각 - 죄의 습관- 죄의 포로(하나씩 네모를 쳐주세요)
교회사의 7대 대죄=교만, 분노, 질투, 정욕, 탐욕, 게으름, 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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