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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난한 과부의 헌신(막12장41-44)

가난한 과부의 헌신(1241-44)

 

41.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쌔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고후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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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동원 목사

 

제가 오늘은 돈 얘기를 할려고 합니다. 교회 가니까 돈 얘기 하더라. 돈 소리만 나오면 신경이 날카로와지시는 분이 있는데 마음 놓으시고 들으십시오.

 

오래 전에 종교개 혁자인 캘빈은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우리 교회의 문제는 돈에 대해서 너무 많은 얘기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돈에 대하여 바른 얘 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요한 웨슬레 선생도 비슷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회개를 신용할 수가 없다.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구원을 체험했다고 하십시다.

그가 정말 새 사람이 되었다면 저는 먼저 현저한 변화를 가져와야 할 삶의 영역 중에 하나가 돈 씀씀이의 변화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헌금에 반영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회심, 그 사람의 구원, 그 사람의 신앙, 그 사람의 변화를 신용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금은 헌신의 상징입니다.

헌금행위 야말로 헌신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영어에 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Money talks 라는 말이 있습니다.

Money talks. 돈이 말해 준다. 돈이 그 사람의 사람됨됨이를 말해 준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지출 명세서를 저에게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여러분들에게 인생관이 어떤 것인가를 진단해 드릴 수가 있습니다.

우 리가 돈을 소모하는 모습을 보면 거기서 그 사람의 인생관, 그 사람의 가치관, 그 사람의 세계관을 뚜렷하게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평범한, 지극히 평범한 여인의,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비범한 헌신의 스토리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42절에 보시면 본문에 나타난 주인공의 정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한 가난한 과부는. 그녀는 가난했습니다.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성경은 그녀가 과부였다고 말합니다. 외로운 여자였습니 . 정서적 고통을 안고 있었던 사 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이중의 고통을 받고 있었던 여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귀감이 되었던 여인의 모습을 우리는 본문에서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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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주님은 이제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시다가 예루살렘성전 제일 바깥에 있는 것이, 소위 이방인이 거기 까지 올 수 있었던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이방인의 뜰이 있고 조금 더 안으로 들어오면 이제 여인들의 뜨락이 있습니다.

여인들은 거기까지 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의 뜨락 바로 그 맞은편에 보면 거기 미문이라는 문이 하나 있었어요. 아름다운 문, 미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문 곁에 아마 예수님은 그 어느 곳에 걸터 앉아서 성전 입구에 있는 헌금함에 헌금을 드리고 그 안에 까지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예수께서 지켜보고 계셨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자 여러 사람들 이 이제 헌금을 내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본문 41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 을 보실새 하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우리가 헌금대를 돌리는 대신에 평소에는 주로 주일날은 헌금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이 헌금함에다가 연 보궤에다가 헌금을 넣는 모습을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보실새라는 단어가 사용 되고 있습니다.

보실새라는 단어가 희랍어에서는 미완료시제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희랍어에서 미완료시제라는 것은 계속적인 의미가 있어요. 주님이 그냥 그 헌금궤에 헌금내고 들어가는 람들을 어쩌다 한번 슬쩍 보신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속 예수님이 보셨다. 원색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이 째려보고 계셨다 이 말입니다.

헌금을 넣는 광경들을 주님이 계속해서 보고계셨다 이 말입니다.

, 여러분 헌금궤에다가 헌금을 넣고 들어오신 분이 상당히 계실 줄로 압니다.

반대편 앞에 예수님이 만약 서계셔서 여러분이 헌금함에 헌금하는 모습들을 보고 계셨더라면 아마 헌금하는 모습이나 표정이 좀 달라지지 않으셨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께서 그것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특별히 예수님의 시선은 한 여인에게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슴은 아마 뛰고 계셨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바로 이 여인에게서 예수님은 그 시대의 참된 헌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헌신의 한 샘플을 주께서 발견하셨기 때문이셨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보여준 그 헌신의 본질, 헌신의 진정한 본질, 거기서 우리는 참된 헌신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혹은 참된 헌금정신 이 무엇이냐라는 것을 우리는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에 나타난 이 여인이 보여준 참된 헌금의 정신, 도대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로, 그것은 참된 헌금은 우리의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만을 의식한 결과이여야 한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정신은 참된, 살아계신 하나님,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한 결과가 되어야 한다라는 사실입니다.

, 다시 한번 본문의 상황을, 정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41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다같이 41절 읽어요. 다 같이 시작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 데

우리말 성경으로 보시면 그냥 연보궤가 하나만 있었던 것처럼 생각이 되지만 사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 입구에는 연보궤가 13개나 있었어요.

13개가 쭈욱 나란히 놓여 있었어요. 그리고 이 헌금함은 놋쇠로 만들어졌습니다. 놋쇠로 만들어진 헌금함. 흔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당시에 이것을 가르켜서 나팔궤 라 이렇게 불렀습니다.

나팔궤라고 왜 불렸느냐 하면 헌금함의 그 입구, 화폐를 떨어뜨리는 그 부근의 입구가 주둥이가 나팔처럼 생겼어요.

 

아마 헌금함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것 같은데 최근에 저희 교회에 서도 헌금함의 사고가 날 뻔 했어요.

어떤 친구가 뭘 이렇게 집어 넣어서 꺼내고 있더래요. 그걸 누가 포착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헌금함을 이렇게 나팔 그래서 바꿨어요.

우리가 안전한 것으로 바꿨는데 헌금함을 나팔궤 모양으로 나팔 모양으로 주둥이가 형성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나팔궤라 이렇게 부르기도 했습니다.

 

13개의 헌금함 박스는 각기 다양한 헌금의 용도들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제사용으로 대부분 많이 쓰여졌고 한 9개 정도는 여러가지 다양한 제사에 따라서

 

그때그때 드려지는 제물헌금 들이었고 한 4개 정도는 특수한 용도였습니다.

성전유지용, 성전보수용, 혹은 구제를 위해서 쓰여지기도 했고, 어떤 것은 제목을 지정하지 않은 자유헌금함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헌금이라는 것은 지폐가 아니라 동전이었기 때문에 더군다나 놋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러분이 헌금을 딱 집어넣으면 떨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그런 데 아마도 그 당시에 자세히는 몰라도 성전을 관리하던 관리자 측에서는 이 헌금을 증가 시키려던 어떤 순수하지 못한 의도를 가지고 아마 놋쇠로 제작했을 가능성도 좀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좀 많이 넣는 것, 적게 넣는 것 하는 것을 돈 이 떨어지는 소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구별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좀 많이 가치가 높은 것을 집어넣으면 쟁그렁 하고서 인제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집니다.

그러나 좀 시원찮게 내시면 그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쟁하고 조금밖에 나지 않는단 말이죠.

 

오늘 본문의 정황을 보시면 41절에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들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 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아마 부자들이 먼저 앞서서 연보궤에 헌금을 넣고 들어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부자들이 다 그랬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진 않아요.

어떤 부자는, 아마도 어떤 부자는 순전히 헌금의 동기가 show up 의 동기로 자기 과시의 동기로 이제 아주 가치가 높은 그러한 양의 화폐를 딱 떨어트리면 소리를 냅니 다. 쟁그렁 그러면 어깨에 힘을 주고 아마 이렇게 하면서 내가 돈 많이 냈다. 누구 나 쳐다보는 사람 없나? 한번 확인 한 다음에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아마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 이렇게 여러 사람 들이 집어넣고 간 다음에 42절에 보시면 본문에 한 가난한 과부는 과부 차례가 됐어요.

이 과부가 얼마를 넣었다구요? 42절에 보시면 두 개의 렙돈 혹은 한 고트란트. 렙돈이라는 것은 유대 사람의 화폐 단위가 이것을 렙돈이라고 불렀고 그 당시 로마 사람들의 화폐 단위 가운데에서 최소 단위가 고트란트입니다.

최소 단위. 유대 사람들의 화폐단위가치 가운데서 제일 싸구려가 렙돈이였어요.

렙돈이 얼마나 되느냐. 한 렙돈 이 달러로 환산하면 8분의 1센트예요. 8분의 1센트. 그러니까 돈도 아니죠. 그러니까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10원도 안돼요. 10원도 안돼요.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렙돈이라는 말의 뜻 그 자체가 얇다 그런 뜻입니다.

 

얇다. 그러니까 아주 얇은 동전. 그래서 렙돈을 집어 넣으면 퉁소리도 별로 안나요. 소리도 안나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내는지를 알 수 있었던 그 놋쇠 헌금함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서 아마 이 여인은 이 장면에 와서 굉장히 주눅이 들고 또 자기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충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자기 보다 앞서서 그리고 상당한 양들의 돈을 집어넣고 당당하게 행진해 들어가던 부자들의 모습 쟁그렁 그리고 또 한사람이 집어넣고 쟁그렁 두 세개 재러러렁 그러면서 들어갔다 말이죠.

 

다음에 이 여자 차례가 되었을 거란 말이죠. 두 개의 렙돈 중 하나를 집어 넣었습니다. 쟁소 리가 안나요. 누가 나를 보지 않을까 이 순간 자기를 의식하면서 상당히 부끄러워질 수도 있었고 상당히 무안해질 수도 있었던 이런 결정적인 이런 순간에 나라면 어떻게 행동 했을까.

나 같으면 아예 헌금을 안했을거예요. 창피 당할려고 뭐하러 헌금을 하겠어요.

 

그러나 저는 이 순간 이 장면 속에서 이 여인의 하나님만을 의식했던 어떤 태도. 그것이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양이 얼마나 많으냐 적으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최선이다.

오직 하나님을, 하나님만을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한 이 여인의 당당한 태도가 이 헌금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던 원인이라는 점을 우리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헌금은 하나님을 향한 드림이라고 믿으십니까?

정말 믿으세요?

요기 몇 사람 밖에 안 믿는 것 같은데. 저기 뒤에 있는 사람들 헌금은 하나님을 향한 드림이라고 믿으십니까?

 

별로 안들리네요.

아침 식사를 다 안드시고 온 것 같아요.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정말 그 대상이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그 하나님을 향한 드림이라고 믿으십니까?

 

그 정도는 되야지. 그 정도는. 정말 하나님을 향한 드림이다. 그러면 다른 것 의식할 필요 없어요. 하나님만 의식하면 돼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 하느냐. 그것은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나의 삶의 주인 되신 그 하나님, 그 분의 사랑, 그 분의 도우심, 그 분의 인도하심이 오늘 나의 삶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나는 그 은혜에 빚지고 있다, 그 은혜로 구원받고, 그 은혜로 지금 여기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 나는 다만 그 분의 은혜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몫을 내가 주께 드린다. 저는 이것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내가 얼마를 드리느냐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당당하게 만들었던 헌금의 태도와 정신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참된 헌금은 내 삶의 주인 되신 살아계신 하나님, 오직 하나님, 그 분만을 의식한 결정이 바로 헌금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믿습니다.

 

두번 째로 참된 헌금은 희생의 정신이 깃들여져 있어야 합니다.

참된 헌금은 희생의 정신이 깃들여져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제물을 가르쳐서 그 제물을 영어로는 sacrifice라고 그래요. Sacrifice.

아마 이 sacrifice 라는 단어가 다른 말로 번역하면 뭡니까?

이게 바로 희생이예요.

Sacrifice. 다른 말로 말하면 그것은 희생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물은 곧 희생입니다.

히브리어로도 같은 뜻이예요. 제물이 바로 희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종종 매우 아주 열려진 자리, 그리고 열린 마음의 토론이 있는 곳에서 종종 교우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사님 헌금을 할 때 어디에 가이드 라인을 두고 헌금을 해야 옳습니까?

제가 그럴 때 마다 두가지 얘기를 합니다.

하나는 십일조의 정신 좋은 헌금의 가이드라인입니다.

10분의 1,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또 그 이유는하고 제가 설명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우리가 일반적 헌금의 액수를 결정하지 못할 때 저는 이런게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이게 조금은, 이 정도는 내가 희생이 된다. 그 정도라면 좋을 것이다. 희생이 된다.

왜냐하면 헌금정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 편에서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어떤 응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여인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두 개의 렙돈 저는 두렙돈 중에서 한 렙돈만 드려도 하나님이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또 그 정도도 굉장한 헌신입니다.

왜냐 하면 두개의 렙돈은 오늘 본문에 보면 그녀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그랬어요?

두 개의 렙돈이 생활비 전부다라고 그랬어요. 생활비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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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개의 렙돈을 드렸으면 그녀의 생활비의 절반이란 말이죠. 그 정도만 해도 굉장한 희생이죠. 이 여인의 경우에는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했어요.

하나의 렙 돈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두개의 렙돈을 다 드렸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향한 이 여인의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희생이었습니다.

온전한 희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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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선배들의, 믿음의 사람들의 전통이었습니다. 헌금 정신은 희생의 정신을 기초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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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다윗왕의 케이스가 생각이 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윗왕,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보다 존경했던 왕이죠.

그러나 그 젊은 시절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왕에게 추적당하고 쫓겨다니면서 많은 생명의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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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다윗왕이 아리우나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예루살렘의 높은 언덕에 있는 타작마당에 도달하게 되었어요.

, 타작마당에 딱 올라가서 보니까 예루살렘의 시내의 전경이 한 눈에 다 내려다보입니다. 아주 전망이 좋은 곳이었어요.

다윗은 기분도 좋았습니다.

자기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 좋은 곳, 전망도 좋은 곳,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싶다. 이런 멋있 는 경치를 보았을 때, 아름다운 자연을 보았을 때, 마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야! 내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싶다, 찬양하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드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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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마음이 그런 마음 이었을거예요.

타작마당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졌어요.

제사를 드릴려면 구약시대에는 제물이 있어야 한다 말이죠.

, 그런데 다윗왕이 이제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그러니까 주인편에서는 왕이 자기 집에 찾아오신 것만으로도 영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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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사실은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이 그 장소가 바로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는 그 자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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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러분들이 이스라엘의 성지를 방문하면 예루살렘 한 복판에 있는 예루살렘 시내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소위 dome of the rock 바위 성전 모슬람 모스코가 있는 곳이 그 장소예요. 바로 그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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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딱 서보니 까 자기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동으로 충만하고, 그리고 주님을 예배하고 싶고, 찬양하고 싶고, 그런 감동으로 꽉 찼단 말이죠.

하나님앞에 내가 제물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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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제물이 없었어요.

그걸 알아 채린 그 주인 아리우나가 왕이시여 걱정하지 마십시요. 여기에 제물이 있습니다. 소와 양들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제물로 제공할려고 했단 말 이죠.

그러니까 그때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양하면서 그러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사무엘하 2424절에 보면. 따라서 하세요.

내가 값을 주고,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이런 응답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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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나는 공짜로 주는 그것으로 바치지 않겠다. 제물에는 내 정성이 있어야 되고, 내 땀흘림이 있어야 되고, 내 희생이 있어야 한다. 내가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겠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응답이었어요.

다윗의 희생의 정신입니다.

여기 아름다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보여준 헌금 정신의 소중한 전통을 볼 수가 있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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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역사를 통해서 그대로 계승됩니다.

신약시대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신약에 들어와서 고린도후서 8장에 보시면 소위 마케도니아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드렸던 헌금의 아름다운 케이스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마케도니아가 신문에서 여러분이 날마다 보시는 유고사태가 일어나고 있는 그 주변 변두리 현장중에 하나죠.

이 마케도니아 교회, 이 교회의 헌신에 관해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때 예 루살렘 성도들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이 헌금을 했어요.

그런데 얼만큼 헌금을 했느냐. 고린도후서 82절에 보시면 그들 자신도 환란 속에 있었습니다. 그들 자신도 많은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 자신의 경제적인 형편도 극한 가난에 시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환란과 시련과 많은 극한 가난 중에서도 그 들은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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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로 그 다음 절에 고린도후서 83절에 보시면 바울 사도는 그들의 헌금의 태도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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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한 번 읽어 보세요.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드렸느니라

저들이 힘대로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힘을 다하였을 뿐만 아니라. 뭐라고 그랬어요?

힘에 지나도록 이것이 바로 희생이죠.

Sacrifice 희생의 정신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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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너무나 감사합니다. 날 살려주시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다윗의 입장에서는 하나님 내가 많은 시련이 있지만 오늘까지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 대한 기대를 놓치지 않고 내 인생의 계획을 갖고 승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님 너무 감사해요. 그는 자기의 희생을 담아 주앞에 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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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헌신의 정신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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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는 참된 헌금은 바로 희생이 들어 있는 정신이다라는 모본을 발견합니다. 이 여인은, 이 가난한 과부는 이러한 헌신의 모본을 저와 여러분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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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세번 째로 참된 헌금이라는 것은 전체를 드릴 수 있는 정신 이어야 합니다.

참된 헌금은 전체를 드리는 정신에 근거한 것이다. 전체를 드린다.

진정한 헌금은요 다 드리는 것이예요. 다 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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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은 쇼크를 받아 가지고 전재산 다 바쳐라하는 모양이다.

이제 이동원 목사가 교주가 되지 않았나, 재산헌납을 요구하는가 긴장이 돼 갖고 저를 안쳐다보고 다른데 쳐다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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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바로 쳐다봐요.

괜찮아요.

헌금 정신은 전체를 드리는 정신에 근거한 것이어야한다. 정신이라는 말에 위로가 되죠? 다 드려라. 그러 면 굉장히 긴장이 될텐데 전체를 드리는 정신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전부를 드리는 정신. 제가 늘 십일조에 대해서 강조할 때, 제가 늘 그 얘기를 드립니다만 한국교회 교인들이 십일조에 관해서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오해는 이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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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분의 일을 왜 드리는가?

십분의 일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맞습니까?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요.

십분의 일도 주님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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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십분의 일만 주님의 것입니까?

십분의 십 전체가 다 주님의 것이예요.

그런데 왜 십분의 일을 드려요?

십 분의 십 전체가 다 주님의 것인데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또 하나님이 주신 그 능력과 건강과 또 노력을 가지고 내가 이것을 벌었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내 존재의 원천 내 삶의 이유 내가 여기 서 있을 수가 있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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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인정하는 것 아니예요?

전체가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구체적으로 주님의 것으로 이 모든 것을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인정하기를 원합니다.

그게 바로 십일조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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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내가 십분의 일을 드렸어요. 내가 진정한 십일조를 드렸다면 십일조 정신에 근거하여 드렸다면 어떻게 되냐하면 십분의 일을 드린 후에 십분의 구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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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분의 일 드렸으니까 다했다. 끝이 아니라 나머지 십분의 구도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십분의 구를 어떻게 사용할까 여러분 기도하고 쇼핑 하십니까?

기도하고 쇼핑하세요?

내가 십분의 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인도하심 따라 내가 이렇게 쓸 때 하 나님이 기뻐하실까?

십분의 구도 마땅히 그 분의 것이라면 나에게 맡겨 주신 것에 불과하고 그 분이 주님이 시라면 그 분의 뜻에 맞도록 내가 십분의 구도 관리하는가?

이것이 저는, 이것이 온전한 십일조정신이라고 생각해요.

온전한 십일조정신.

다 드리는 것입니다.

전체를 드리는 정 신에 근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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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분의 구는 내 것, 십분의 일은 주님의 것이고 십분의 구는 내 것이 아닌가?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마르틴 로이드 존스라는 분이라는 분의 책을 읽다가 이 장면을 보고 내가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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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어떤 농부가 소를 기르는데 그 소가 새끼를 낳았어요.

송아지를 낳았어요. 두 마리를 낳았어요. 농부가 너무너무 기뻐가지고 자기도 모르게 할렐루야 송아지 새끼 두 마리 낳고서 너무 감사해 가지고 자기 부인보고 이 농부가 말하기를 여보 여보 송아지 새끼 두마리야 우리 하나는 주님의 것으로 하고 주께 드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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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도 아멘 동의했습니다.

얼마 후에 송아지 새끼 한 마리가 비실비실 앓더니 돌아가셨어요.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농부가 울상이 돼갖고 방안에 있는 자기 와이프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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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큰일났다고. 뭐가 큰일났어요? 하니까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어. 주께 드린 송아지가 죽었단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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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제 말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신 분이 있어요.

무슨 소리하나. 다 주의 것이예요. 이건 주님의 것, 이것은 내 것이 아니예요. 내 전체가 주님의 것이다 100% 주님의 것이다.

이게 헌신의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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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dication.

주님을 향한 헌신의 정신.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다. 란스 헤브너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헌신의 참된 의미를 얘기하면서 헌신은 85%로 만족할 수가 없다. 이런 광경을 상 상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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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한 여자가 한 남편이나 아내를 향해서 서로를 향해서 자기 남편을 향해서 자기 아내를 향해서 여보 내가 당신에게 적어도 85%는 성실할께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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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아내에게 와서 여보 내가 전체는 못해도 85%는 당신을 향해서 성실할께요. 85% 그 말은 매우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15%는 땡땡이치겠단 말이예요.

만족하시겠어요?

만족, 15%가 문제죠. 15% 15%가 시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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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은 85% 일수가 없습니다.

헌신은 100%입니다.

믿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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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사랑이란 전체와 전체를 바꾸는 것이예요. 100%100%를 바꾸는 것이예요. 85%15%의 결합이 아니예요. 전체와 전체를 맞 꾸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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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랑. 어떻게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다음이 뭐예요. 그 다음도 몰라요?

그 다음에 다시한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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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아들을 주신 사랑.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가장 소중한 것.

더 정확하게 말할까요?

전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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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고대시대에, 옛날 시대에 지금도 그렇지만 외아들을 가지고 있는 부모에 대해서 외아들은 전쳅니다. 그의 생명입니다. 그 전체를 주었단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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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전체를 주었다. 자기 전체를 내어 주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 전체를 내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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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게 피 흘리신 주의 사랑, 그것은 전체를 내어 주신 것이예요.

그의 피 흘리심, 그의 내어주심, 그의 몸이 그의 100%가 십자가에서 깨지고 피 흘려 그 피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 분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여러분 고백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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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100%의 사랑에 빚지고 있는 자, 그 분의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정당한 응답은 어떤 응답이어야 할까요.

100%를 드리는 것이예요. 100%를 드리는 것 이예요.

전체를 드리는 상징 내가 얼마를 드리든지 내가 뭐 100원을 드리든 1000원을 드리든 10000원 드리든 그러나 드릴 때의 심정이 하나님 이것은 나의 전체를 상징합니다. 내 전체를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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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캠브리지대학의 시티 스터드라는 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 했어요. 학교에서도 톱을 달리는 학생이었고 크리캣이라는 운동선수였어요. 그 운동으로서 영국 전체의 골드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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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된 출세의 길이 그 앞에 열려져 있었습니다. 갑자기 캠퍼스집회에 참석했다가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는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가기로 선포했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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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당국자들이 아깝다고 생각 했습니다. 보장된 출세길. 돈과 그리고 명예와 권력과 그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의 길에 나서자 누군가가 와서 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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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이것은 자네에게 지나친 희생이 아닌가 이때 시티 스터드는 모든 시대를 사는 크리스챤 지성들에게 굉장한 챌린지가 되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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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의 길을 선교사로 떠나는 마당에서도 한마디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그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서 바치는 희생은 그 어떤 것도 지나친 희생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이것이 헌신의 정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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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헌신은 그 이하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헌신은 그 이하로 만족해서도 안되고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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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여러분의 기도는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한 평생 내가 정말 그리스도의 제자로 따라 간다면 그 헌신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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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저는 돈문제만 얘기 하는 것이 아니예요.

돈은 헌신의 중요한 한 척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시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십니 까 내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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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라이프. 저는 한 마디로 인생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어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도록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삶의 길이.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 분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맡겨주신 생명의 길이. 라이프예요. 그것이 라이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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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 있는 그 동안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같에요.

그 하나님의 미션을, 그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삶의 길이 그것이 바로 라이프란 말이예요.

 

그 어떤 시간도 단 한 시간도 낭비되어서는 안됩니다. 낭비의 시간이 없어야 돼요. 이 시간 하나님이 요 한순간 one minute 한 시간도 one second 한 초도 낭비될 수 없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지하게 삶을 사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내 육체 내 육체의 주인이 누구예요.

하나님이십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렇습니다.

피 값을 주고 사신 내 몸 내 안에 성령이 거하시다.

 

그렇다면 내 몸둥아리도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나의 달란트, 나의 재능 전능하신 하나님 그의 영광 for the glory of God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 목소리 내 재능도 온전히 드려진다.

 

여러분, 그런 마음으로 찬양해요?

그런 마음으로 헌신하십니까?

이게 헌신의 정신이란 말이죠.

 

헌신의 정신 내 재능 내 재주 하나님이 주셨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드린다. 이것이 헌신이예요

하나님! 나 다른 것 없어요. 내가 가진 전 재산 두 개의 렙돈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렙돈을 제가 주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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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렙돈 그러나 이 두 렙돈이 어떻게 쓰여졌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상상을 해 봤어요.

지금쯤 이 여인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천국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엇보 다도 오늘 아침 제일 아마 천국에 있는 이 가난한 과부가 제일 좋아할 거라 생각합니다.

 

이동원 목사가 자기 얘기 하고 있으니까 너무너무 좋아할 거예요.

아 내 얘기 하고 있구나. 내 얘기 하고 있구나. 내가 주 앞에 그날 드렸었던 내가 부끄러워하면 수줍어하면서 그러나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람의 의식과 시선을 넘어서서 보잘것 없던 두 개의 렙돈을 저 지상에서 계속되고 있구나

 

저만 설교 했을까요?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이 얼마나 많은 목사님 들이 오늘의 이 본문과 텍스트를 가지고 이 여인의 헌신을 주제로 설교 했을까요?

 

바로 이 여인의 헌신의 사실들을 듣는 메시지를 듣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헌신을 배웠을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께 헌신했을까요?

 

이 설교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일생을 주 앞에 바치고 헌신의 길을 떠나갔고 어떤 교회는 바로 이 메세지 때문에 예배당 건축을 할 수가 있었고 이 헌신 때문에 자선 사업들이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면 이 여인의 두 개의 렙돈의 헌신 얼마나 위대하게 쓰임 받는 것이예요?

 

두 개의 렙돈 이것은 결코 작은 헌신이 아니다.

이것은 결코 작은 헌신이 아니다.

 

오늘 여러분의 두 개의 렙돈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두 개의 렙돈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어떻게 주님 앞에 사용되고 있습니까?

 

이동원 목사(용인 지구촌교회)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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