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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너를 위한 징조

너를 위한 징조
본문 - 이사야 38장 1 - 8절

본문 - 이사야 38장 1 - 8절(개역개정)

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2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3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
4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6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7 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너를 위한 징조이니 곧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그가 이루신다는 증거이니라
8 보라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음도 받아드려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죽음도 거절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몸이 아파서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습니다. 의사가 진단하더니 “당신은 암에 걸렸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워낙 술을 좋아하여 아들에게 “아들아,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우리 술이나 한잔 하자.” 아들은 싫었지만 아버지의 말씀이라 거역할 수 없어 따라 갔습니다. 아버지는 술집에서 친구를 만나 “여보게 나는 지금 AIDS로 죽어가고 있다네.”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이 깜짝 놀라 아버지의 소매 자락을 잡아당기며 “아버지, AIDS가 아니고 암이에요. 왜 거짓말을 하세요?”, “임마, 내가 죽은 다음에 니 엄마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좋겠냐?”
   오늘 설교는 유다의 13대 왕이었던 히스기야가 경험한 기적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죽을 병에 걸렸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를 받았습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를 찾아와서 죽음을 준비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죽음을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그는 이사야의 예언을 듣자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는 심히 통곡하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행했던 것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눈물을 보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응답하십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의 생명을 15년 연장해 주리라”
   히스기야가 죽음을 받아드렸다면 그는 그 때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죽음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그 믿음으로 기도했고 기도의 응답으로 생명을 15년 연장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참으로 다양한 영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주시는 깨달음은 하나님의 말씀은 받는 사람의 반응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으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긍정적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절).
   1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가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는 1절과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네 수한에 15년을 더하고”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기에 늘 동일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진리만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1절에서는 죽을 것이라고 하셔놓고 5절에서는 15년을 더 살 것을 말씀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2절과 3절에서 보인 히스기야의 반응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들은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심히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반응을 보시고 마을을 돌이켜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우리의 반응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축복의 말씀도 나오고 저주의 말씀도 나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경의 말씀대로 축복을 받는데 어떤 사람은 저주를 받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반응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로 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두 아들이 낮에 엄마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엄마가 두 아들을 불러놓고 “오늘 저녁 식사 후에 혼날 줄 알아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큰 아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엄마에게 “엄마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을께요.”라고 말하고는 저녁시간까지 엄마가 기뻐할 일만 했습니다. 반대로 작은 아들은 ‘어차피 혼날 건데 하고 싶은 대로 하자’라고 생각하고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습니다. 저녁식사 후에 엄마가 두 아들과 계산을 할 때 어떻게 할까요? 두 아들을 동일하게 대할까요? 제 생각에는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엄마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했던 큰 아들은 매를 맞지는 않을 것입니다. 훈계로 끝날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어차피 혼날 건데 하고 싶은 대로 하자’고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시간을 보낸 작은 아들은 훈계로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 많이 혼날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으로, 설교로,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믿음과 순종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격려의 말씀을 듣든지 책망의 말씀을 듣든지 여러분은 믿음으로 순종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가 히스기야의 치료 사건을 통해서 받는 또 다른 교훈은 하나님은 다양하게 응답하시지만 주의 종을 통해서 응답하실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1, 5-8절).
   1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죽음을 준비해야 함을 하나님께서 직접 히스기야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라는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5-8절을 보면 히스기야의 기도가 응답되어 하나님께서 그의 병을 고쳐주시고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하실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곳곳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의 입에 말씀을 주셔서 그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게 하셨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입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살전 2:13절에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이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특히 설교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설교자를 하나님의 입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도 설교를 많이 들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의식이 부족한 듯합니다. 우리가 설교 시간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감히 졸거나 딴 짓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설교 시간에 조는 것은 누구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까? 설교자의 책임일까요 아니면 회중의 책임일까요?
   거룩한 주일, 어느 교회에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고, 설교 시간이 되었습니다. 목사가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는데 좌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한 집사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당장 불러 세워 혼을 내고 싶었지만, 얼마나 피곤했으면 그럴까하는 심정으로 설교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 그는 목사님과 악수를 하며 미안해했습니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집사님, 아무리 피곤하셔도 그렇지 설교 시간 30분 정도도 못 깨어 있습니까?” 집사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30분 정도도 저를 못 깨어 있고 졸게 만드십니까?”
   설교시간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이기 때문에 목회자는 정성을 다하여 설교를 준비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서 그 시간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중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겸손한 마음과 사모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또 본문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들의 눈물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의 응답을 전달하면서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보시고 기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 기억해 주시는 분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아시는 분입니다. 요 1장에 보면 주님을 만난 빌립이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전도하여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자마자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하십니다. 그리고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다나엘이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라는 말씀이 무슨 뜻이기에 나다나엘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을까요? 나다나엘은 아무도 보지 않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늘 기도생활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은밀하게 기도했는데 주님께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말씀하시므로 주님 자신이 나다나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디서 기도를 하든지 그 기도하는 우리를 보고 계시는 분입니다.
   행 9장에 보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사울이 기도하고 있을 때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주님은 사울이 기도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사울이 기도하는 장소까지도 아셨습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주님에게는 피눈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눈물을 보고 계시며 우리가 흘린 눈물을 잊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눈물을 주의 눈물 병에 담으십니다. 시 56:8에 보면 시편기자가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우리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시고 우리의 눈물을 주의 책에 기록해 주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부르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눈물에 약한 분이십니다.
   저는 지난 며칠 태국 선교사 훈련원에서 강의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숙소는 박요한 선교사님의 집이었습니다. 박선교사님 가족들 모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예찬이는 더욱 안정되어 보였고 예림이는 많이 예뻐졌습니다. 그리고 특이 사항 하나는 그 집에 ‘사랑’이라는 개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마치 토끼처럼 생긴 작은 개인데 얼마나 귀여운지 모릅니다. 제가 그 집에 들어가니 짓지도 않고 제 옆에 와서 앉아서 저를 비비는데 얼마나 귀여운지 ‘이래서 개를 키우는 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에게 좋지 않은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있으면 옆에 와서 음식을 먹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도 사람 먹는 것을 잘 먹어서 그런지 과일이나 야채도 아주 잘 먹습니다. 사랑이는 사람이 먹는 것을 많이 먹다보니 개밥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개밥을 차려주면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식구들은 사랑이의 식습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사료 외에는 먹을 것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사랑이가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는데 그 눈빛을! 보면 먹을 것을 주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의 친아버지이십니다.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시고 보내주신 참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인이 강아지의 애처로운 눈빛에 넘어가는 것보다 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우리의 눈물에 넘어가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시는 또 다른 하나님의 음성은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표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앗수르로부터 보호하시고 히스기야의 병을 치료하신다는 증거로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그냥 역사하시면 되지 이런 표적까지 보일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표적도 보통 표적이 아닙니다. 해 그림자가 10도나 물러가는 표적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 표적이 불필요한 표적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해 그림자가 10도가 물러가는 표적으로 히스기야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에 하나님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 해 그림자가 10도가 움직여지는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해 그림자가 10도나 물러간다는 말은 우주를 움직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통제하시고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바꿔놓으실 정도로 히스기야의 기도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표적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사 7장에 보면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유다인들이 이길 힘이 없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유다의 승리를 약속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아하스 왕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아하스 왕이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기를 거절합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징조를 구하지 않는 아하스 왕의 믿음이 좋아 하나님께 칭찬을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은 징조를 구하지 않는 아하스 왕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징조를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며 ‘임마누엘’을 말씀하십니다. 사 7:14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출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시면서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표적 두 가지를 주십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되고 뱀의 꼬리를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는 표적을 주십니다. 그리고 손을 품에 넣었다 내어보니 나병이 발하였고 다시 품에 넣었다 내어보니 어린아이 살처럼 회복이 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을 말씀합니다. 믿는 자는 구하지 않아도 따르는 표적이 있습니다. 투명한 컵 속에 콜라가 들어가면 그걸 증명하려고 하지 않아도 색깔의 변화로 증명이 되는 것처럼 믿는 자들에게는 표적이 따르는 것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주님이 주님이신 표적을 구하지만 믿음의 세대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표적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대에게 나타내 보여주시는 표적은 주님이 주님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 아닙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나타내주시는 표적인 것입니다.
   우리 비전교회에는 선교에 따르는 표적이 있습니다. 무지개 표적입니다. 우리가 선교하는 현장에 어김없이 무지개가 떴습니다. 그것도 쌍무지개입니다. 이번 태국선교에서도 무지개가 떴습니다. 그 표적은 주님이 살아계시거나 능력자이심을 나타내주시는 표적이 아닙니다. 그 표적은 주님이 우리가 하는 선교를 기뻐하시고 선교하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표적입니다.
   무지개를 보는 우리들은 ‘역시 하나님은 살아 계시구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은 우리에게 이미 분명히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보면서 ‘역시 선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구나. 이번 선교도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일이구나’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번에 태국에서 무지개가 뜬 그 순간 박선교사의 딸 예림이를 아는 어린이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 어린이가 “와! 무지개 예쁘다. 나는 무지개를 처음 보는데”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들은 예림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비전교회하고 있으면 무지개가 꼭 뜨는데, 쌍무지개가 뜨는데...”
   저는 사실 이번 선교를 가기 전에 마음에 좀 갈등이 있었습니다. 요즘 교회도 성도들도 경제적으로 좀 어렵습니다. 이번에는 교회에서 선교비를 공급할 수가 없어서 성도들에게 후원을 해달라는 광고까지 했습니다. 제 마음에 ‘이렇게 까지 하면서 선교를 가야 하나’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말씀을 전하다 보니 ‘선교 오기를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뜬 무지개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데 내가 괜한 갈등을 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표적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하는 선교를 기쁘게 받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히스기야왕이 질병으로 사형언도를 받을 때 나이가 39세였습니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죽음이라는 인생의 가장 큰 장애물 앞에 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를 위경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진 문제가 아무리 커도 죽음보다는 작은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가 죽음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기도하니 죽음도 이기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든지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적을 행해 주실 것입니다.
   과거에 기적을 체험했어도 지금의 문제에 눌려 산다면 과거의 체험은 지금 나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믿음의 도전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좀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겠으나... 히스기야가 치료의 기적을 체험했던 때의 나이가 39세라고 했습니다. 그가 치료의 은혜를 받고 15년을 더 살았으니 그의 나이 54세에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39세도 이른 나이이지만 54세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른 나이입니다. 그는 54세 때에도 39살 때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부르짖기보다는 죽음을 받아드린 것 같습니다. 그는 죽음을 받아드렸고 결국 54의 나이에, 죽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중에 많은 분들이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고통 중에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고통 중에 있는 여러분에게는 39세에 기적을 체험한 히스기야의 자리에 설 것인가 아니면 54세에 죽음을 받아드린 히스기야의 자리에 설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습니다.
   저는 욥기의 말씀으로 도전을 주고 싶습니다. 욥 5:8에 보면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고난 중에 있는 욥에게 충고합니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히스기야처럼 눈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와 여러분의 눈물에 감동하시고 여러분의 삶에 기적을 베푸실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뭡니까? 기도는 하나님이 던져주시는 구원의 로프를 잡는 겁니다. 두 사람이 물에 떠내려갑니다. 한 사람은 물 밖에서 던져주는 로프를 잡고 살았어요. 그런데 한 사람은 떠내려가는 나무토막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폭포에서 떨어졌어요. 며칠 후에 그 사람의 시체가 폭포 아래에서 발견되었답니다. 여러분 무엇을 잡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던져주시는 구원의 로프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던져주시는 구원의 로프를 잡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떠내려가는 나무토막 붙잡고 있습니다. 자기 힘, 권력, 돈, 인간적인 방법 등을 의지하는 사람이 나무토막 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문제를 만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닙니다.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력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어느 날 군사들의 막사를 방문했습니다. 군사들이 노끈을 요상하게 묶어놓고 노끈 풀기 내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힘센 자도 풀지 못했습니다. 꾀 많은 병사도 노끈을 풀지 못했습니다. 대왕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부관 내 칼을 가져오너라.” 시퍼런 칼을 높이 치켜들더니 밧줄을 싹뚝싹뚝 잘라 버렸습니다. “나는 문제를 이렇게 푼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문제를 어떻게 풀고 있습니까? 풀 수 없는 문제를 붙잡고 풀 수 있는 능력도 없으면서 고민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서 문제를 싹뚝싹뚝 잘라버리기를 바랍니다.

[비전교회] 경기도 하남시 감이동 361-4
(02) 443-9197
비전교회 : http://www.visionchurch.co.kr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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