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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모스(박상훈)

[스크랩] 아모스서/제36강 이스라엘의 군사적 안전감에 대한 책망(6:1-3)

제36강 이스라엘의 군사적 안전감에 대한 책망(6:1-3)

 

6:1-3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열국 중 우승하여 유명하므로 이스라엘 족속이 따르는 자들이여 너희는 갈레에 건너가고 거기서 대 하맛으로 가고 또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 보라 그곳들이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그 토지가 너희 토지보다 넓으냐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강포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아모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가지 사항에 대해서 잘못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기대감에 대해서 하나하나 저들의 잘못을 지적해주면서 얼마나 저들의 기대가 부질없는 짓인지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잘못된 기대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5:18∼20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도 하나님이 자신들의 편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그날은 빛이요, 구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아모스는 그날은 빛이 아니라 어두움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기대가 부질없는 것이라고 질책했습니다.
두번째 잘못된 기대는 저들의 의식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종교 행위였습니다. 5:21∼27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겉으로 보이는 제사 행위 등 외적인 의식에 열심이 있었기에 자기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아모스는 분명히 외쳤습니다. 그러한 외식적인 제물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잘못된 기대는 이스라엘의 군사적이고 경제적인 부강으로 인한 현실적인 만족입니다. 이것이 오늘부터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6장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했습니다. "보라. 우리는 이처럼 강대한 나라가 아니냐? 물질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말이 웬 말이냐?" 여기에 대해서 아모스는 외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너희의 안전함이 얼마나 갈 것 같으냐? 너희는 곧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대적의 손에 의해 멸망하고 말 것이다." 이것이 6장의 내용입니다.
6장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우선 6장 전체의 개요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1) 1∼3절: 이스라엘의 군사적 안전감에 대한 질책입니다.
 1) 1절: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입니다. 특히 저들의 지도자들에게 공격의 화살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2) 2절: 여기서는 우리가 다시 자세히 공부를 하겠습니다만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지도층의 거만스런 말을 그대로 인용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 3절: 심판의 날이 멀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아모스가 책망하고 있습니다.
(2) 4∼7절: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의 물질적 부유와 그 속에서 앞으로 임하게 될 환난에 전연 무관심함과 그 결과로 인한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4∼6절ab: 한 마디로 대단한 과소비입니다.
 2) 6절c: 요셉의 환난, 즉 앞으로 여호와의 날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전연 관심이 없습니다.
 3) 7절: 그 결과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앞에 있는 용어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1절에 있는 "우승"이라는 말과 4절에 있는 "기지개 켜며"라는 말이 7절에 다시 한번 반복되었습니다.  
(3) 8∼11절: 심판에 대한 여호와의 맹세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1) 8절상: 맹세의 권위
 2) 8절하: 맹세의 내용
 3) 9∼10절: 예증
 4) 11절: 심판의 확실성
(4) 12∼14절: 이스라엘의 군사적 교만과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입니다.
 1) 12∼13절: 여기에서는 자연을 통해서, 공법을 통해서, 전쟁을 통해서 어리석은 일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 14절: 이스라엘이 어떻게 심판을 받을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요를 염두에 두고 오늘은 우리가 1∼3절의 말씀을 잠시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6:1)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열국 중 우승하여 유명하므로 이스라엘 족속이 따르는 자들이여
여기에 보면 책망하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이런 말이 맨 먼저 나옴으로써 듣는 이들로 하여금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까 하면서 긴장감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책망 받는 당사자가 등장합니다.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당시 북방 이스라엘의 수도는 사마리아였습니다. 남방 유다 왕국의 수도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또 다른 말이 시온입니다. 1:2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암1:2)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시온과 예루살렘이 같은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시온 산을 중심으로 세워진 도시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시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면 왜 아모스가 책망하는 당사자 이름에 시온, 곧 예루살렘이 갑자기 포함되었겠습니까? 지금까지 아모스는 북방 이스라엘에 대해서 공격을 해왔지 남방 유다에 대해서는 공격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온이 등장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 쓰인 시온은 실제적인 지명이 아니라 수도라고 하는 일반적인 명사로 사용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의 시온이라는 말은 꼭 남방 유다 왕국을 가리킨다고 보기보다는 수도라는 말로 쓰여서 사마리아와 동일한 곳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2절 끝 부분에 나오는 "그곳들이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는 말씀에 잘 부합되지 않습니다. 아모스는 여기에서 복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들"이라는 것은 분명히 북방 이스라엘 왕국과 남방 유다 왕국을 함께 칭한 것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아모스는 남방 유다의 드고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죄악상을 이미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북방 이스라엘 왕국과 남방 유다 왕국을 함께 책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남방 유다 왕국이나 북방 이스라엘 왕국이나 다 똑같이 같은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정의가 땅에 떨어지고, 사회적 불의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시온에서 안일한"이라고 했습니다. 안일이라는 말은 편안함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불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뒤에 보니까 "마음이 든든한"이라고 했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편안하게 느끼고 마음이 든든했겠습니까? 세 가지 정도로 그 이유를 들 수가 있습니다.
1) 정치적인 안정감입니다. 예컨대 요즘 우리 나라처럼 노사 분규가 일어난다든지,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데모가 일어난다든지 하면 정치가 불안할 텐데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1절 후반부에 보면 "곧 열국 중 우승하여 유명하므로 이스라엘 족속이 따르는 자들이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들을 따른다고 했습니다. 백성들을 어떻게 잡아놓았든지 간에 정치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2) 저들을 위협할 군사적인 위험도 전혀 없습니다.
(6:2) 너희는 갈레에 건너가고 거기서 대 하맛으로 가고 또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 보라 그곳들이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그 토지가 너희 토지보다 넓으냐
우선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예!"일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아니오!"일 것 같습니까? 대답은 "아니오!"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북쪽에 있는 갈레나 대 하맛이나 또 남쪽에 있는 블레셋 가드도 이스라엘이나 시온보다 낫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혀 군사적으로 걱정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3) 재정적인 어려움도 전혀 없습니다. 아주 풍요롭습니다.
(암6:4∼6)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물질적으로도 남아도니까 걱정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아무 위험이 없으니까 안일하고 마음이 든든한 것도 일리는 있습니다. 참고로 당시 이스라엘의 군대 수가 어느 정도 되었겠습니까? 틀려도 좋으니까 한번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모스가 이 말씀을 할 당시 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2세였습니다. 남방 유다 왕국의 왕은 누구였습니까? 1:1을 보시기 바랍니다.
(암1: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여러분, 대하26:9∼15에 있는 말씀을 한번 찾아보십시다.
(대하26:9∼15) 웃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성 모퉁이 문과 골짜기 문과 성 굽이에 망대를 세워 견고하게 하고 또 거친 땅에 망대를 세우고 물웅덩이를 많이 팠으니 평야와 평지에 육축을 많이 기름이며 또 여러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를 두었으니 농사를 좋아함이더라 웃시야에게 또 싸우는 군사가 있으니 서기관 여이엘과 영장 마아세야의 조사한 수효대로 왕의 장관 하나냐의 수하에 속하여 떼를 지어 나가서 싸우는 자라 족장의 총수가 이천육백 명이니 모두 큰 용사요 그 수하의 군대가 삼십만 칠천오백 명이라 건장하고 싸움에 능하여 왕을 도와 대적을 치는 자며 웃시야가 그 온 군대를 위하여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예비하고 또 예루살렘에서 공교한 공장으로 기계를 창작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살과 큰 돌을 발하게 하였으니 그 이름이 원방에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더라
웃시야의 군대 수가 삼십만 칠천오백 명이라고 했습니다. 대단한 숫자입니다. 그렇다면 북방 이스라엘은 이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군대 수가 60만이라고 하는데 그 당시 상황으로는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 든든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1절 하반부를 봅니다. "곧 열국 중 우승하여 유명하므로 이스라엘 족속이 따르는 자들이여." "열국 중 우승하여"라고 했습니다. 열국이란 여러 나라들이라는 말입니다. "우승하여"라는 말은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본래 원어의 뜻은 최고, 일등이라는 뜻입니다. 우승이라는 것은 일등했다는 말과 상통합니다. 아무튼 "열국 중 우승하여"란 말은 여러 나라 가운데 일등 국가로서, 또는 최고의 나라로서라는 말입니다. 제일 앞서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6:7 말씀을 잠시 보시기 바랍니다.
(암6:7) 그러므로 저희가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여기에 우승이라는 말이 다른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앞서"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다른 나라보다 앞선다고 너희가 교만했으므로 포로로 끌려갈 때도 너희가 제일 앞서서 끌려가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유명하므로"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자는 곧 뛰어난 자,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족속들이 따르는 정치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미3:1의 말로 표현한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미3:1)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 들으라 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
치리자, 또는 두령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저들의 교만함은 이스라엘 족속이 저들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쭐대기만 할 뿐 저들을 향해서 계속해서 한 발자국씩 다가오고 있는 여호와의 날에 있을 심판과 멸망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모스가 보기에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기 바로 직전에 돼지가 마음껏 먹고서 꿀꿀거리며 만족해하는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족속이 저들을 따르는지, 무엇을 하려고 저들을 따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본문이 밝혀주고 있지 않습니다. 전쟁에서 계속 우승하여 자발적으로 따르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먹고살기 위해서 도움을 청하려고 어쩔 수 없이 저들에게 나아가는 것인지 본문은 그 질문에 대해서 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정치적 지도자들을 따름으로 인해서 저들의 마음속에는 더욱 안일함과 든든한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2절로 넘어갑니다.
(6:2) 너희는 갈레에 건너가고 거기서 대 하맛으로 가고 또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 보라 그곳들이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그 토지가 너희 토지보다 넓으냐
2절의 해석은 다소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선 2절의 말씀은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씀인지를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갈레에 건너가고 거기서 대 하맛으로 가고 또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 보라 그곳들이." 그곳들이라는 말은 괄호를 치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이 말이 원어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이 원문의 뜻을 나름대로 이해를 해서 "그곳들이"라는 말을 넣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 해석대로 한다면 그곳들이란 어디겠습니까? 갈레, 대 하맛, 블레셋 사람의 가드 등을 뜻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고 할 때 이 나라들은 어디겠습니까? 1절에 나오는 시온과 사마리아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그곳들"이란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그곳들이라는 말 대신에 "너희가"라는 말을 넣어서 보면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너희가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이럴 경우에 이 나라들은 어디겠습니까? 갈레, 대 하맛, 가드이겠지요? 그렇게 본다면 이 질문이 의도하고 있는 대답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니오!"일 것입니다. 너희가 이방 나라들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모스가 하는 말은 이런 뜻이 될 것입니다. "너희보다 더 나은 나라들도 멸망하는데 이스라엘 족속들아, 너희인들 멸망하지 않겠느냐?" 이런 말씀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해석 방법은 지금까지는 괜찮지만 그 다음 구절에서 벽에 부딪히고 맙니다. "그 토지가 너희 토지보다 넓으냐." 뜻이 앞에 있는 구절과 잘 통하지 않습니다. 앞과 서로 부합하기 위해서 어떻게 바뀌어야 하겠습니까? "너희 토지가 그들의 토지보다 넓으냐." 이렇게 해야 대답이 아니오가 되어서 "더 넓은 토지를 가지고 있는 강대국들도 망하는데 너희인들 망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되어서 서로 문맥이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성경 본문을 조금 수정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말씀을 아모스가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해석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모스가 하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한 말을 아모스가 인용해서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이해하기 좋습니다. 다시 말해서 1절에 나오는 유명한 자들, 곧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자기들을 따르는 자들에게 교만하게 뽐내면서 하는 말을 아모스가 그대로 인용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본문의 뜻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너희는 갈레에 건너가고 거기서 대 하맛으로 가고 또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 보라 그곳들이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대답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니오!" 낫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더 낫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더 낫다고 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더 낫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국력이 더 강하냐, 못하냐는 뜻이겠습니다. 어디가 더 강한 나라냐는 뜻입니다.
또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그 토지가 너희 토지보다 넓으냐?" 물론 그 대답도 역시 "아니오!"일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토지가 더 넓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질문은 국력에 관한 질적인 질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질문은 나라의 크기에 관한 양적인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이렇게 뽐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디를 가보아라. 우리 나라만큼 양적으로, 질적으로 강한 나라가 어디 있느냐."
아무튼 우리가 이 구절을 쉽게 이해하려면 1절과 2절 사이에 이런 말을 하나 집어넣으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구나." 그리고 나서 2절을 읽으면 연결이 잘 될 것입니다.
갈레는 창10:10에도 나오는데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창10:10)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시날 땅은 메소포타미아를 의미합니다. 대 하맛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맛은 이스라엘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습니다. 지금의 레바논 북쪽지역입니다. 그리고 블레셋의 가드는 이스라엘의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리적으로 본다면 맨 꼭대기 갈레에서, 그 다음에 대 하맛으로, 그리고 나서 제일 밑에 있는 가드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대 하맛이란 하맛이라는 지명에 대(大)자를 붙인 것입니다. 2절에서 나타내는 바는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우리보다 나은 나라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뽐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1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시온에서 안일하고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3절을 읽어봅니다.
(6:3)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강포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여기서는 다시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향해서 책망하는 말이 나옵니다.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여기에 나오는 흉한 날이란 재앙의 날이란 뜻입니다. 아모스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여호와의 날"이란 뜻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현실에 안주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비슷한 표현이 9:10에도 나옵니다.
(암9:10)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포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강포한 자리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 합1:9에 근거해서 강포한 적군으로 심판을 받게 하는 일을 스스로 재촉케 한다는 뜻으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합1:9)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같이 많이 할 것이요
2) 강포한 자리를 강포함으로 다스리는 치리자의 자리로 보는 견해입니다. 사실 치리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공법과 정의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강포를 공의의 반대 개념으로 이해를 한 것입니다. 백성들을 공의롭게 다스려야 할 텐데 오히려 강포함으로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리를 보좌, 곧 다스리는 자리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치리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먼 듯이 생각하면서 전혀 개의치 않고 강포 행위를 자유롭게 행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첫번째 견해보다는 두번째 견해에 가깝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또 그 해석이 문맥에 잘 맞는 해석인 줄 압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운 줄 모르고 계속해서 강포를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여기까지 하고 두 가지 정도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은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자기들의 군사적이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힘을 의지하고 만족을 했습니다. 이것은 불신앙적인 태도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러한 잘못된 태도에 대해서 거듭거듭 경고해주었습니다.
(신28:52) 그들이 전국에서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네가 의뢰하는 바 높고 견고한 성벽을 다 헐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의 모든 성읍에서 너를 에워싸리니
(삿7:22)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시20:7)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33:16∼17)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시44:6)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시52:7)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승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언제나 심판의 날이 가까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히9:27의 말씀을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삼판이 있으리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심판을 멀리 미뤄놓고 생각하기 때문에 포악한 짓을 자의로 행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이 모든 것을 이 다음에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아야 하는 날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항상 떨리는 마음으로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도록 애쓰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이후에는 최후의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늘 준비된 삶이 되도록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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