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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모스(박상훈)

[스크랩] 아모스서/제37강 이스라엘 상류층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 부요함(6:4-7)

제37강 이스라엘 상류층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 부요함(6:4-7)

 

6:4-7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저희가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의 상류층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인 부요함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그런 풍성한 가운데서도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결국 그 일 때문에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게 되고 말 것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물질적인 부가 결국은 6:1에 기록된 바대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안일한 마음을 갖게 하며 든든한 마음을 갖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문은 내용에 따라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4∼6절ab입니다.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층들의 사치와 방종에 대해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즐기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 6절c입니다. 여기에는 요셉의 환난, 즉 자기들이 앞으로 당할 환난에는 무관심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말씀해주고있습니다. 3) 7절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당하게 될 심판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시겠습니다.
(6:4)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4절에 보면 주된 동사가 세 개 등장합니다. "누우며," "기지개 켜며," "먹고"입니다. 이 세 개의 동사가 서로 어떤 관련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런 선입견이 없이 우리말 성경대로 해석하면 이런 뜻이 될 것입니다. 눕는 것은 언제 눕습니까?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 눕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 기지개를 켭니다. 그리고 난 뒤에 식사를 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이 뜻하는 바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누우며"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 취한 자세입니까? 음식을 먹기 위해서 취한 자세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잠을 자기 위해서 누운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워서 음식을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기대어 누움"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앉는다"는 말로 번역을 했습니다.
(마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마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26: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요6: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한 마디로 말해서 눕는다는 말은 유대인들이 음식을 먹을 때 가지는 자세를 말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두번째 나오는 동사 "기지개 켜며"라는 말도 잠에서 깨어나는 동작이 아니라, 음식을 먹기 위한 자세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처럼 기지개를 켠다는 말로 번역하지 말고 "큰 대자로 누워서," 또는 "거드름을 피우며 누워서"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뜻에 더 부합할 줄 압니다. 다시 말해서 첫번째 동사 "누우며"는 눕는 목적이 음식을 먹기 위해서임을 밝혀주고, 두번째 동사 "기지개 켜며"는 눕는 동작을 경멸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덧붙인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기대어 누워서 점잖게 음식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인가 부도덕하며 방종한 뉘앙스를 풍겨주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상류층이 지금 눕는 데 사용한 가구는 어떠한 것입니까? 상아 상과 침상입니다. 둘 다 화려하고 값비싼 가구를 의미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쿠션이 좋은 푹신한 가죽 소파에 푹 파묻혀서 부어라마셔라 하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도나 애굽에서 상아를 수입해서 가구에 무늬를 파고 그 속에 상아를 넣어서 장식했습니다. 그런 것을 상감이라고 합니다. 상아로 상감한 사치스러운 상에 누웠다는 말씀입니다. 고고학적으로 상아 제품들이 사마리아에서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값비싼 상아 상과 같은 제품은 당시 이스라엘 지도층들이 누리고 있는 생활이 어느 정도로 화려했던가를 단적으로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이런 생활을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빼앗아 온 물질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는 누구를 착취했었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해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사치품들은 저들로 하여금 현실에 만족을 누리게 하는 하나의 큰 요인이 되었습니다.
4절 하반부를 봅니다. 당시 이스라엘 지도층들이 즐기던 메뉴가 나와 있습니다.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첫째는 어린 양입니다. 둘째는 우리에서 취한 송아지입니다. 양떼 가운데서도 뼈가 억세지 않고 고기가 부드러운 어린 양을 골라서 먹었습니다. 또한 우리에서 취한 송아지를 먹었다고 했습니다. 소는 일을 시키게 되면 뼈도 억세지고 고기도 질겨집니다. 그래서 우리에 가두어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해놓고 일을 시키지 않고 잘 먹여서 식용으로만 키우는 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서 기르는 소입니다. 살은 더 부드럽고, 또 빨리 자랍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 보면 "외양간의 송아지"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합니다.
(렘46:21) 또 그 중의 고용군은 외양간의 송아지 같아서 돌이켜 함께 도망하고 서지 못하였나니 재난의 날이 이르렀고 벌받는 때가 왔음이라
(말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이스라엘 지도층이 보여준 이런 탐식과 식도락은 목자 출신인 아모스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한번 물어봅니다. 4절에는 고기가 등장했습니다. 5절에는 무엇이 등장합니까? 노랫가락이 등장합니다. 6절에는 무엇이 등장합니까? 포도주와 술이 등장합니다. 안주와 노래와 술이 등장합니다. 무엇을 하는 장면입니까? 잔치를 하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연회를 베풀고 흥겹게 놀고 있는 장면이 머리 속에 떠오르게 됩니다. 장차 머지않아 심판을 받아서 멸망하게 될 것인데 그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서 그저 부어라 마셔라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한심한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마지막에 나타날 징조를 말씀하신 가운데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마24:38∼39을 찾아봅니다.
(마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홍수로 심판을 당했던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심판을 당하는 그날까지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고 쾌락과 향락에 젖어 있던 모습과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모습이 나무나도 비슷합니다. 결국 이스라엘 족속들도 심판의 경고를 무시하고 현실에 안주하여 육신의 일만 도모하다가 똑같이 심판을 받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이와 같지는 않습니까? 마지막 때에 육신의 쾌락이 극치를 이루게 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각 기업체에 일꾼들이 없다고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농촌에도 일꾼이 없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서비스 산업으로, 향락 산업으로 다 가버렸기 때문에 생산 및 제조 업체는 일할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입니다. 마지막이 점점 가까웠다는 징조 가운데 하나라고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 근신하여 기도하고, 항상 마지막을 준비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그날은 도적같이 예고 없이, 번개가 동에서 나서 순식간에 서쪽으로 번쩍이는 것같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언제 예수님이 다시 오실지라도 기쁨으로 기다리고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5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6:5)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여기에 보면 노랫가락이 등장합니다. 잔치에 노래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은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린다고 했습니다. 비파는 당시 노래를 반주하기 위해서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악기였습니다. 시33:2에 보면 비파가 열 줄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또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열두 줄로 된 비파도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그들은 비파에 맞추어 흥겹게 노래를 부른다고 했지만 선지자의 귀에는 무엇으로 들렸습니까?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아주 경멸적인 표현입니다. 물론 아모스가 비꼬는 투로 말하는 것도 있지만 사실 술에 취한 사람들은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말에 지절거린다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재잘재잘 댄다는 것보다 강한 말입니다. 뜻 없이 계속해서 지껄여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떠들어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의 귀는 생각하지 않고 술에 취해서 악을 쓰며 돼지 멱따는 소리로 꽥꽥댄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5절 하반부에 보니까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은 번역이 조금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다윗은 노래를 짓기도 하고 악기를 잘 다루었지만 직접 악기를 제조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5절에서도 이스라엘 상류층이 술에 취해 악기를 다루면서 노래를 보르고 있는 잔칫집을 묘사하고 있는 것인데 갑자기 악기 제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제조하며"라는 단어는 "생각한다"는 의미로 바로 번역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옳게 번역한다면 이렇게 됩니다. "악기에 관하여 자신들을 다윗처럼 생각하며."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다윗은 악기를 잘 다룬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무엇을 잘 탔습니까?
(삼상16:16) 원컨대 우리 주는 주의 앞에 모시는 신하에게 명하여 수금 잘 탈줄 아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삼상16:23)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수금을 잘 탔습니다. 그러니까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이 술에 잔뜩 취해서 악기를 손에 들고 온갖 폼을 다 잡습니다. 누구처럼 폼을 잡았다는 것입니까? 자기들이 무슨 다윗이나 된 양 폼을 잡고 띵땅띵땅 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경건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향락을 위해서, 자신들이 즐기기 위해서 음악을 사용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6절로 넘어갑니다.
(암6:6)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여기에 보니까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꼬집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라는 말씀 가운데 "대접"에 강조점이 있습니까? 아니면 "포도주를 마시며"라는 말에 악센트가 있습니까? 포도주를 마시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대접으로 마시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대접으로 마시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1) 우선 성경에서 대접이라는 것은 주로 무엇을 하기 위해서 어디에서 사용하는 그릇입니까?
(출24: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출38:3) 단의 모든 기구 곧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고
(왕상7:40) 히람이 또 물두멍과 부삽과 대접들을 만들었더라 이와 같이 히람이 솔로몬 왕을 위하여 여호와의 전의 모든 일을 마쳤으니
대접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짐승의 피를 담는 그릇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모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에서 사용되는 기명을 사용했다고 책망하는 것이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것보다는 다른 가능성이 더 바람직한 줄 압니다.
2)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양에 강조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잔에다 마시지 않고 큰 대접으로 퍼마신다는 점을 아모스가 부각시켜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물을 더럽혔다는 뜻이 아니라 대접과 같은 큰 그릇에 담아서 마음껏 퍼마시므로 방종함과 사치함을 부각시켜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6절의 가운데 부분을 봅니다.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여기서도 무엇이 문제일 것 같습니까? 기름을 몸에 바르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비누나 크림이나 향수 같은 것을 따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기름을 몸에 바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귀한" 기름을 몸에 발랐다는 것입니다. 값비싼 기름을 몸에 발랐다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 바르는 데는 가장 값비싼 기름조차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고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주로 두 가지 용도에서 기름을 몸에 발랐습니다. 하나는 목욕 후에 기름을 바릅니다. 아마도 오늘날의 비누나 크림의 역할을 했을 줄 압니다.
(룻3:3)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삼하12: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 지라
(아1:3)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미6:15) 네가 씨를 뿌리나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감람을 밟으나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으나 술을 마시지 못하리라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연회를 베풀어서 즐기는 자리에 나아갈 때 몸에 기름을 바름으로써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것은 당연한 에티켓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아모스가 비꼬고 있는 것은 귀한 기름, 값비싼 기름을 몸에 바를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치스러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모스는 이스라엘 상류층이 누리고 있는 여러 가지 물질적 부유함을 설명해주었습니다. 한번 복습해봅니다. 그들이 드러눕는 가구는 무엇이었습니까? "상아 상, 침상"이었습니다. 여기에 침상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만 사실은 소파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눕는 것은 잠자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고 마시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자세는 어떠했습니까? "누우며, 기지개 켜며." 푹 퍼져누워서, 큰 대자로 누운 자세를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를 경멸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안주 거리가 무엇이었습니까? "양떼에서 취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취한 송아지"였습니다. 군침 도세요?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이 노랫가락입니다. 그들이 사용한 악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비파였습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가수는? 다윗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술은 무엇을 마셨습니까? 포도주입니다. 술잔으로는 무엇을 사용했습니까? 대접을 사용했습니다. 몸에는 무엇을 발랐습니까? 기름으로 발랐습니다. 어떠한 기름이었습니까? 귀한 기름입니다. 즉 값비싼 기름을 발랐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부분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는 다음에 나오는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본시 환난을 당했을 때, 예컨대 초상집에 갈 때나 슬픔을 표할 때는 기름을 바르겠습니까? 바르지 않겠습니까? 바르지 않습니다.
(삼하14:2) 드고아에 보내어 거기서 슬기 있는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이르되 청컨대 너는 상주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같이 하고
사실 지금 이스라엘은 기름을 몸에 바르지 않고 이스라엘을 향한 애가를 들으면서 당연히 애도의 뜻을 표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입니다.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전혀 근심치 않고 오히려 귀한 기름을 몸에 발랐다고 했습니다. 잘못되어도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층들이 사치와 향락을 즐기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않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7절에 나오는 심판입니다. 6절 마지막 부분은 7절을 4∼5절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요셉의 환난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우선 여기서 말하는 요셉은 무엇을 뜻합니까? 북방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암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암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왜 북방 이스라엘을 가리켜 요셉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까? 북방 이스라엘 가운데 제일 강력한 두 지파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입니다. 이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요셉의 아들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때로는 요셉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삼하19:20)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는 고로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옵1:18)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며 에서 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의 위에 붙어서 그를 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슥10:6)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내게 내어 버리움이 없었음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
그 다음에, 요셉의 환난은 과거적 개념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현재적인 개념이겠습니까? 미래적인 개념이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이미 이스라엘이 당한 과거의 환난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현재 이스라엘의 가난한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환난과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요셉의 환난은 미래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문맥에 잘 부합됩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앞으로 당할 환난, 곧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서는 전혀 근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지금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미래에 대해서 근심 걱정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현실적인 만족에도 불구하고 요셉 족속의 실상은 그와 정반대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저들은 병들었고 상처가 곪아가고 있습니다. 곧 멸망을 받아야 하는 임박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지도층이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강력하거나 난공불락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셉의 환난이란 이스라엘에 임박한 멸망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래적인 개념으로 보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마지막 7절로 넘어갑니다.
(6:7) 그러므로 저희가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여기에는 요셉의 환난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인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날은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여 사로잡혀가는 날이요, 그동안 즐기던 모든 흥겨운 잔치가 다 끝나는 날입니다.
우선 "그러므로"라는 말은 결과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족속이 현실에만 만족하여 사치와 향락을 일삼으며 앞으로 곧 임박할 심판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있기 때문에 저희가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는 것입니다.
7절의 말씀은 짧으면서도 1∼6절에 대한 끝맺음을 기가 막히게 해주고 있습니다. 6:1∼3에는 이스라엘의 군사적 안전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6:4∼6에는 이스라엘의 사치와 향락 등 물질적 부유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7절 상반절은 6:1∼3을 결론지어 주고, 7절 하반절은 6:4∼6을 결론짓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면 6:1을 보십시다.
(암6:1)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열국 중 우승하여 유명하므로 이스라엘 족속이 따르는 자들이여
여기에 "우승하여"라는 말은 남보다 앞선다는 말입니다. 군사적으로 남보다 앞서 마음이 든든한 이들이 7절에 가서는 어떻게 되겠다는 것입니까? "저희가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사로잡히는 일에도 우승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6:4을 봅니다.
(암6:4)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기지캐 켜며"라고 했습니다. 침상에서 큰 대자로 뻗어서 마음껏 부어라마셔라 노래를 부르며 떠들던 자들이 7절에 어떻게 되겠다고 했습니까?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떠들던 소리가 쑥 들어가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흥겹게 떠들고 놀던 잔칫집이 초상집같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포로가 되어 끌려가면서 무슨 소리를 내겠습니까? 쥐 죽은 듯이 조용히 하고 끌려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 사로잡혀 끌려가는 장소가 어디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5:7에 보니까 "다메섹 밖으로"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나중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하여 다 그곳에 끌려가고 아주 보잘것없는 사람 일부만 이스라엘땅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먼저 끌려가게 될까요? 평민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지체 높은 사람들이겠습니까? 지도층에 있는 사람일수록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라고 했습니다. 먼저 잡혀간다는 것입니다.
(왕하24:14∼16) 저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방백과 모든 용사 합 일만명과 모든 공장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저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또 용사 칠천과 공장과 대장장이 일천 곧 다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옛날에는 이처럼 관리들이나 기능인들을 먼저 포로로 끌고 간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요셉의 환난이 닥치는 그날 이스라엘은 포로로 끌려갈 것이며, 떠들며 흥겹게 놀던 그 모든 일이 그치게 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여기까지 공부하고 몇 가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스라엘 족속의 모습 속에서 그들이 보여준 몇 가지 잘못된 태도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저들은 쾌락주의자였습니다. 영적인 것은 생각지 않고 있었습니다. 영혼이 잘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육신이 즐거운 것만 생각했습니다. 둘째, 현실주의자였습니다. 심판과 내세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현재 잘먹고 잘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셋째, 이기주이자였습니다. 가난하고 고난 당하는 사람에게 무관심했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착취해서 자기들의 배를 불리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번 우리도 우리 자신과 우리 주의를 냉정하게 돌아보십시다. 한때 우리 나라 신문에 이런 기사가 많이 났던 것을 여러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제가 제목만 인용해봅니다. "호화 사우나 한 해에 칠천 곳 늘어." "재벌이 수입 앞장." 바나나는 너무 수입해 들여와서 썩혀 내버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발상들입니다. "마시고 즐기는 데 연 4조원." 현실주의입니다.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유흥업소 서울만 11만 곳." 놀랠 노자입니다. "반지 2천만 원대, 시계 천만 원대." "돈으로 자기 과시 부동산 졸부들 많아." 아예 이런 비판적인 제목을 노골적으로 붙인 것도 있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놀자판인가?"
한 마디로 우리 시대는 황금 우상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세계 어느 곳을 돌아다녀 보아도 우리처럼 향락에 들떠 있는 나라가 없을 정도입니다. 국회의원 입후보자 사이에는 심심지 않게 이런 말이 나돌고 있습니다. "30이면 낙이요, 50이면 당이라." 무슨 소리입니까? 30억을 쓰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50억을 써야 당선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당선되고 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본전을 찾기 위해서 어떤 짓이든 저지르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한심한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돈 가지고 내 멋대로 쓰는데 무슨 시비냐고 따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썩은 가치관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외국 잡지가 우리 한국을 가리켜서 너무 빨리 샴페인을 터트렸다고 비꼬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각해야 합니다. 정말 이럴 때가 아니라 허리띠를 졸라매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삶의 윤리는 단독적인 삶이 아닙니다.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이며,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삶이며, 기쁨도 함께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우리는 속물이라고 지탄받는 부류의 사람을 따라가거나 부러워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나라를 망치고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케 하는 일에 동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근검 절약해서 우리 후손에게 영광된 조국을 물려줄 수 있도록, 또한 우리 모두가 함께 잘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치 지도자들을 뽑을 때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시라면 이때 누구를 뽑으실까?"를 생각하면서 투표해야 하겠습니다. 이 땅에 공의를 실현할 수 있는 인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수 있는 인물들이 당선될 수 있도록 우리가 기도하고, 또 그런 인물에 투표를 해야겠습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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