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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모스(박상훈)

[스크랩] 아모스서/제40강 아모스가 본 첫번째 묵시(7:1-3)

제40강 아모스가 본 첫번째 묵시(7:1-3)

 

7:1-3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왕이 풀을 벤 후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할 때에 주께서 황충을 지으시매 황충이 땅의 풀을 다 먹은지라 내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청컨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가라사대 이것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대하여 경고한 말씀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모스가 본 묵시에 대해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말씀으로 주신 심판의 경고를 이제는 묵시로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1:1을 한번 읽어봅니다.
(암1: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 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끝 부분에 보면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묵시는 원칙적으로 무엇인가 보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 데 비해서, 말씀은 듣는 데 주안점을 둡니다. 그러나 묵시라고 해서 꼭 시각적 요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첫번째 묵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아모스는 하나님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반대로 말씀이라고 해서 청각적인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말씀을 보고 읽는 것은 시각적인 요소에 해당됩니다.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해주신 바를 듣기도 하고 보기도 했던 것입니다.
7장에 세 개의 묵시가 등장합니다. 첫번째 묵시는 황충에 관한 것이고, 두번째 묵시는 불에 관한 것이고, 세번째 묵시는 다림줄에 관한 것입니다. 8장에는 하나의 묵시가 나옵니다. 순서적으로는 네번째 묵시로 여름 실과에 관한 것입니다. 9장에도 한 개의 묵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다섯번째의 묵시입니다. 지진에 의해서 성전이 파괴되는 내용입니다.
첫번째 묵시와 두번째 묵시는 서로 비슷합니다. 내용면에서도 그렇고, 기록 양식면에서도 그렇습니다. 네 가지 요소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 묵시의 기원
"주 여호와께서"라고 했습니다. 묵시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아울러 묵시 자체도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 묵시의 내용
첫번째 본 묵시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황충이 먹어치우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무엇입니까? 불이 먹어치우는 것입니다. 땅을 황폐케 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내용을 조금 다르게 다시 한번 강조해준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꿈을 꿀 때 같은 내용을 다르게 꾼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가 있습니까? 요셉이 꿈을 꾼 경우가 그렇고, 바로가 꿈을 꾼 것도 그렇습니다. 또 느부갓네살 임금도 비슷한 내용의 꿈을 두 번 꾸었습니다. 그만큼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3) 선지자의 간청
아모스가 묵시를 본 뒤에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한 내용이 나옵니다.
4) 여호와의 응답
아모스의 간청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또 말씀으로 그것을 확정하셨습니다.
한편 세번째 묵시와 네번째 묵시는 처음 두 묵시와 그 양상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 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1) 묵시의 출처, 2) 묵시의 내용, 3) 하나님의 질문, 4)선지자의 답변, 5) 묵시의 설명, 6) 심판의 결과, 7) 심판의 이유.
우선 이 정도로 윤곽을 잡고 오늘은 첫번째 묵시에 대해서 공부해보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아모스가 본 묵시의 출처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보이신 것을 지금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처럼 개꿈을 꾸고 나서 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보여주신 그것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모스가 본 묵시는 신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옛날 구약 시대 선지자들은 이상을 통해서, 또는 꿈을 통해서 묵시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아모스는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묵시를 받았겠습니까? 비몽사몽과 같은 이상 가운데서 묵시를 받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야곱과 같이 꿈 가운데서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모스는 보통 사람이 밤에 꾸는 꿈처럼 꾸고 나서 금방 잊어 버리는 것을 본 것이 아닙니다. 묵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자기가 본 것을 분명히 알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선지자로서 간청하는 중재자의 역할도 그 가운데서 충실히 감당했습니다.
묵시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왕이 풀을 벤 후." 이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구약 성경에는 명백하게 이런 관습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로마 시대에 수리아를 통치하는 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법령이 있었습니다. 3, 4월에는 땅에서 돋아난 풀이라 하더라도 아무나 자기 가축이 뜯어먹도록 놔둘 수없었습니다. 이 시기에 나는 풀은 군마를 위해서 전부 나라의 곳간에 들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터키와 같은 곳에서는 아직도 이런 관습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왕이 풀을 벤다"는 말은 왕실의 가축이나 군마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풀을 베어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평민들이 비로소 가축을 먹이고 사료의 비축을 위해서 풀을 벨 수 있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런 관습이 직접 언급된 것은 없지만 비슷한 흔적은 몇 군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삼상8:11∼17)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왕상4:26∼28) 솔로몬의 병거의 말의 외양간이 사만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이며 그 관장들은 각각 자기 달에 솔로몬 왕과 왕의 상에 참예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였으며 또 저희가 각기 직무를 따라 말과 준마에게 먹일 보리와 꼴을 그 말의 있는 곳으로 가져왔더라
(왕상18:5)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러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왕이 풀을 베고 나서 다시 움돋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풀은 누구 차례입니까? 평민들 차례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주께서 황충을 지으시매." 황충이란 메뚜기의 일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종종 징벌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애굽에 내린 열 재앙 가운데 여덟번째 재앙이 바로 이 메뚜기의 재앙이었습니다. 욜1:4∼7을 한번 찾아보십시다.
(욜1:4∼7)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무릇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한 이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무수하며 그 이는 사자의 이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같도다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사자의 이같고 암사자의 어금니같다고 했습니다. 채소나 곡식 뿐 아니라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조차 깡그리 다 해치는 아주 무서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에게 메뚜기 재앙이 내렸을 때 그들은 "우리가 망했다"고 탄식할 정도였습니다.
2절을 봅니다. "황충이 땅의 풀을 다 먹은지라." 여기에 풀이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본시 이 말은 식물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초목, 즉 풀과 나무를 다 일컫는 말입니다. 황충이 풀과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등 모든 식물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치웁니다. 그러니까 작은 사건이 아니지요.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무서운 사건을 묵시로 보았을 때 선지자 아모스가 어떻게 했습니까? "내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청컨대 사하소서." "내가 가로되"라고 나서면서 중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지자의 사명이 바로 중재하는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창20: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출32:11)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주 여호와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황충을 지으신 분이 누구십니까? 또 황충을 보내어 식물을 먹게 해서 땅을 황폐케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주 여호와이십니다. 따라서 주 여호와 바로 그분께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주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는 길밖에 없습니다.
아모스가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청컨대 사하소서." 청컨대라는 말은 영어의 please라는 말입니다.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의 회개를 기대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회개할 여러 번의 기회를 주셨지만 다 놓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이스라엘에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의지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속성상 어떠한 분이십니까?
(출34:6∼7)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민14:18)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시145:8)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욘4: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음이니이다
구약 성경에 보면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특히 시편 기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울부짖음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시13:1∼2)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시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79:5)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첫째는, "왜," "어찌하여"이고 두번째는, "언제까지"라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여기서 "왜,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라는 울부짖음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저 한 가지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될 수밖에 없는 줄 압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모스는 계속해서 자기가 그렇게 간청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나님은 약한 자의 편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을 받았습니다.
(출22: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신10: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신24:17∼22)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말며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 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 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
(신26:12) 제 삼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시146:9)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사1: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렘7: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슥7:10)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야곱은 이스라엘 나라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당시 여로보암이 통치하던 이스라엘은 결코 미약하지 않았습니다. 6:1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안일하고 마음이 든든하고 자신 있어했습니다. 열국 중 우승, 즉 싸움에 나가면 승리할 정도로 강한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야곱이란 이스라엘 중에서 평민들, 즉 억압받고 학대받는 피지배 계급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왕이 풀을 벤 후 이제는 일반 평민이 풀을 차지할 차례인데 무서운 황충 떼가 나타나서 다 먹어 버리면 참으로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누가 그들을 도와주겠습니까? 강한 자들이 도와주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멸망당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도저히 그럴 가능성이 없는 족속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주지 아니하시면 절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3절은 아모스의 간청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변덕스럽다든지, 이랬다저랬다하는 우유부단한 하나님이시하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뜻하는 바는 첫째로,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냉혈적인 존재로 움직일 줄 모르는 융통성 없는 기계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말입니다. 둘째로, 선지자의 중재 역할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의 손을 높이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말입니다.
성경 기자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인간의 언어로 기록했습니다.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거룩하신 하나님, 인간과는 구분되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든지, 하나님이 화를 내신다든지 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신인동성동형론(神人同性同形論)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의 간청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리고 "가라사대 이것이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확인해주셨습니다. 참으로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묵시라고 해서 꼭 시각적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라는 시각적인 요소를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라사대 이것이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청각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약한 자를 잊지 않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가 더욱더 힘 있게 의지하면서 오늘도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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