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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2:20(7): 갈2:20, 엡1:1-6 예수님 때문에 나는 소중합니다 2010.10.10(일)

2:20(7): 2:20, 1:1-6 2010.10.10()

예수님 때문에 나는 소중합니다

여러분은 행복합니까? 오래전에 영국 런던 타임지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를 주제로 독자들에게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1위부터 4위까지 당선된 사람이 이러했습니다. 1, 모래성을 막 완성한 아이. 2, 아기의 목욕을 시키고 난 어머니. 3, 세밀한 공예품을 다 만들고 휘파람을 부는 목공. 4, 어려운 수술을 성공하고 막 한 생명을 구한 의사.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백만장자가 되거나 큰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일로 남에게 도움을 주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입니다. 행복을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얻고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모든 행복은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밖에서 오는 무엇이 아닙니다. 나와 함께 일어나고 내 속에서 생깁니다. 행복은 나와의 관계에서 옵니다. 평소에 우리는 우리가 대단한 존재라고 느끼지 못하고 삽니다. 가끔은 자신에 대해 원망하고 불평하며 삽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내가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바라보며 깨닫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깨닫습니다. 어느날 나는 누군가 나를 사랑한 것을 압니다. 그것이 부모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애인, 아내, 남편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이 나를 너무 사랑합니다. 그 사랑이 너무 커 내가 함부로 살면 안되겠다 느낍니다. 그때 느끼는 만족감이 있습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갈2:20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선물합니다. 이 말씀의 주제는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지금 내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살고 그는 우리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냅니다. 당연히 주제도 중심도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나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2:20 한 절에만 라는 단어가 6번 나옵니다. 내용상으로는 7번입니다. 이 짧은 한 마디에 7번이나 나온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단순히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와 함께 죽었고 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기는 죽었는 데 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은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단순히 예수님이 죽고 다시 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함께 죽고 내안에 살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사는 장소가 입니다. 내가 없으면 예수님도 살 곳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산다고 내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사는 것은 나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육체가운데 삽니다. 육체의 한계와 함께, 육체가 주는 기쁨과 슬픔과 함께 내가 삽니다.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나마 나는 다른 내가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막연히 세상을 사랑란 것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이 추상적으로 세상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 내가 없으면 예수님의 구원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누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습니까? 내가 믿습니다. 누가 그 믿음안에 삽니까? 내가 삽니다. 내가 믿음의 주제요 내가 삶의 주체입니다. 여전히 예수님이 말씀의 중심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소중한 분이듯 나도 예수님에게 소중합니다. 내가 예수님 떠나면 살 수 없듯이 예수님도 나를 떠나면 못삽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있듯 예수님도 내안에 있습니다. 이 아침에 우리가 정말로 깨닫기를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소중한 분이듯, 나도 예수님에게 소중한 존재다”. 여러분, 그렇게 믿고 그렇게 고백합니까? 오늘 말씀은 세 가지로 우리가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먼저 나는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가치란 본래 상업적 용어입니다. “에서 나왔습니다. 값이 많으면 가치가 많이 나가고 값이 적으면 가치가 적게 나갑니다. 가치는 물물교환의 원칙에서 나옵니다. 물건을 비싸게 주고 사면 가치가 크고 싸게 주고 사면 가치가 적습니다. 등가의 원리입니다. 5만원 짜리 물건은 5만원 주고 사고 1000만원 짜리 물건은 1000만원 주고 삽니다. 아무리 인심이 좋은 상인도 5만원 짜리 물건을 1000만원 짜리와 안 바꾸고 아무리 바보같은 사람도 1000만원 짜리를 5만원과 안 바꿉니다. 값이 같아야 바꿉니다. 등가의 원리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예수님과 맞바꾼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와 자신을 맞바꿨습니다. 그것이 갈2:20, 첫 부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다고만 하면 되지 굳이 나와 함께 못박혔다고 할까? 세상을 구하러 오신 분이 왜 나 한 사람을 위하여 죽었을까? 내가 아니면 세상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필 일까? 우리가 아니라 한 사람일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예수님은 나와 일대일로 맞바꾼 것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자신을 헐값에 내주고 내 입장에서는 값을 지나치게 비싸게 받은 것입니다.

 

저는 거제도에 있는 포로수용소를 몇 번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지난 봄에도 짬을 내어 부모님 모시고 다녀왔습니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6.25때 국군으로 참여했던 아버지가 인민군에 붙잡혔습니다. 생사가 오락 가락하던 어느날 인민군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위해 거기 간 것입니다. 그 포로수용소에서 남북의 포로가 교환되었습니다. 언제나 포로교환의 원칙은 일대일입니다. 한 사람 주면 한 사람 보내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부상자가 문제였습니다. 부상자의 숫자가 서로 맞지 않아서 숫자의 제한이 없이 서로 맞교환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1953년 유엔군 684, 중공군 포함 북한군 6670명이 서로 교환했습니다.

 

그러다가 부상자 아닌 포로들의 교환문제로 또 시끄러웠습니다. 제네바 협정에 따라 포로를 교환하는 데 유엔군측이 전달한 공산당 포로 수는 13만인데 공산당측이 전달한 유엔군 포로 수는 고작 만 천명이었습니다. 일대일이 아니라 13대 일이었습니다. 이 일로 밀고 당기다가 결국 교환했습니다. 숫자로 보면 유엔군측이 손해를 보았으나 살아난 유엔군 포로는 한 사람당 열 세명의 목숨과 바꾸고 살아났습니다. 국가적으로는 손해를 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귀한 목숨들과 맞바꾸고 살아났습니다. 지난 3월에는 이스라엘에서 이 포로교환문제가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병사 하나가 작전중 가자지구에서 잡혔습니다. “이 병사를 돌려주라”, “못 돌려주겠다옥신각신하다가 회담이 열렸습니다. 교환하기로 원칙을 정하고 이야기하다가 팔레스틴측이 팔레스틴 포로 1000명과 이스라엘 병사 한 사람을 교환하자는 안을 내놓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수용하면서 조건을 내 걸었습니다. “팔레스틴 포로중 중범죄자 수십명은 국외로 추방하겠다”. 결국 협상은 깨졌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너무 큰 숫자의 차이 때문에, 팔레스틴 입장에서는 촤고의 전사를 잃기 때문에 협상이 깨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우리와 예수님이 일대일로 맞교환된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은 나 한 사람때문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이 유월절날 강도 바라바와 맞바꾼 것도 일대일이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오른편 강도를 구원할 때도 일대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입장에서는 불공평한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아닙니까? 하나님이면 전 인류와 맞바꾸어도 손해 아닙니까? 한국민족 전체와 맞바꾼다고 해도 손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신 분이 우리 한 사람과 일대일로 맞교환하다니 명백한 불평등 교환 아닙니까? 죽어야 할 나는 예수님 때문에 살고 살아야 할 예수님은 나 때문에 죽었으니 예수님이 너무 손해 보신 것 아닙니까? 남북같으면 엉청나게 소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팔레스틴 같으면 협상을 깼을 것입니다. 일대일도 아니고 일대천도 아니고 일대 하나님과 맞교환했으니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 나는 틀렸어. 나는 벌레만도 못한 놈이야”. 굉장히 겸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묻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지나치게 비하하는 동안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내가 그렇게 무가치한 존재라면 너와 바꾼 나는 무엇이냐? 네가 그렇게 무가치하다면 나도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냐?” 우리가 가끔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살 때 주님은 자신의 값을 내린 우리 때문에 얼마나 속상해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너무 우리의 가치를 하향조정하고 삽니다. 어느 백화점에 두 남자가 밤에 들어가 백화점에 있는 모든 물건의 가격표를 바꿔 놓았습니다. 50만 원짜리 카메라는 만 원으로, 500만원 짜리 침대는 10만원으로, 몇 시간이 지나 큰 소동이 났습니다. 가격표가 말도 안되게 바꿔져 대혼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우리의 가치를 너무 낮게 바꿔 놓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안돼. 나는 못해. 나는 틀렸어. 나는 못났어. 나는 말도 못해. 나는 자신없어. 나는 끝났어. 어머니,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그래서 이런 우리를 보시고 주님이 오죽하면 참새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만 합니다. 10: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못났어도 참새보다 못하겠습니까? 하도 자기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참새 두 마리가 동전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고 묻지 않습니까? 누가복음은 조금 다르게 말씀합니다. 12:6, “참새 다섯 마리가 동전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두 마리에 한 닢이거나 다섯 마리에 두 닢이거나 주님이 말씀하려는 의도는 분명합니다. 참새도 가치가 있는 데 너희는 오죽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찮은 참새도 돈주고 사고 파는 데 너희는 얼마나 가치있는 존재냐 하는 것입니다.

 

몇 년전 홍제동에서 6명의 소방관이 어린이 하나를 구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어린이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쩌다 재수없이 불속에 있다가 간신히 살았다해야 하겠습니까? 자기를 구하기 위해 여섯 명의 소방관 아저씨가 죽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아이도 자라면서 공부 때문에, 입시 때문에, 사는 것때문에 힘들 것입니다. 그때마다 이 아이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 나 때문에 6명의 아저씨가 희생되었다. 나는 적어도 6명을 대신하여 산다”.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영국 성공회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이 참 좋은 말을 했습니다. “내 가치는 하나님 앞에서의 가치다. 나는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돌아가실 만큼 엄청난 가치를 가진 존재다.” 아멘. 나는 예수님 짜리요 예수님 때문에 살고 예수님과 동등한 가치로 사는 자입니다.

 

다음 나는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나는 또한 가치있는 존재일 뿐 아니라 나는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희생입니다. 별 말을 다 해도 희생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를 대신해 죽었다면 그것처럼 큰 사랑은 없습니다. 거기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다 떨어지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합니다. 다시 갈2:20로 돌아가십시오. “내가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은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했습니까? 뒤에 나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자기를 버렸습니다. 사랑은 버리는 것입니다. 주는 것입니다. 사랑없이 줄 수 있으나 주지 않고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 뿐 아닙니다. 또 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 사랑의 완벽한 조건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지금도 우리안에 계십니다. 이것처럼 완벽한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저의 친척 중에는 몸이 매우 약한 아주머니가 한 분 계십니다. 몇 년 전부터 몸이 아파 자리에 눕는 횟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는 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아프다가도 큰 딸만 나타나면 멀쩡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분은 일찍 남편을 여의고 홀 몸으로 6남매를 키웠는 데 그 중에서 큰 딸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습니다.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딸을 키웠습니다. 그러다가 딸이 시집을 간 뒤부터 시름 시름 아프기 시작했는 데 몸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없습니다. 큰 딸만 오면 됩니다. 둘이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밤을 새워 도란 도란 이야기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이야기 하고 식사하면서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딸이 떠나면 , 또 전화로 이야기 하자그럽니다. 딸만 오면 건강이 회복되는 어머니, 왜 그럴까요? 사랑때문입니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떠나지 않습니다. 혹시 몸은 떠나 있어도 마음은 같이 있습니다. 죽어서라도 같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 결혼이 있습니다.

 

사랑은 아무리 멀어도 찾아 갑니다. 가끔 미국이나 유럽에 자녀가 나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봐주려고 가는 어머니들을 봅니다. 자기 몸도 편치 않으면서 아들, 딸을 위하여 먼 길을 떠납니다. 참 눈물겹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찾아 갑니다. 지구의 끝이라도 찾아갑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몇 년 전에 서울 방배동에서 한 아이가 길을 잃었습니다. 가족들이 백방으로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 하나가 아침에 물을 버리기 위해 하수구로 갔는 데 그 쪽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119를 불러 맨홀로 들어가 보니 어린아이 하나가 하수구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 잃어버린 그 아이였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다”. 하나님의 사랑은 찾아오는 사랑입니다. 하수구와 같은 세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온갖 쓰레기, 오물, 폐수, 악취로 가득한 세상에 오셨습니다. 거기서 우리를 수렁에서 건져내신 후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많이 나오는 단어가 함께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분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에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기록됩니다. 최후의 만찬자리에서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여섯 번이나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합니다. 13: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16:4,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그러다가 마지막에 또 말씀하셨습니다. 28:20,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여러분은 이 말씀을 믿습니까? 한번만 약속해도 분명한 데 여섯 번이나 약속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내일이면 십자가에 달리는 날, ”함께 있겠다고 강조합니까? 혹 예수님 안 보이면 없다고 말할까 봐. 세상 살이 힘든데 나 혼자 산다고 생각할까 봐. 정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와 함께 있고 앞으로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큰 사랑을 입은 것입니까? 장례식때마다 눈물로 이별하는 가족들을 봅니다. 잠시 세상에서 사랑하고 떠나줘도 눈물나게 고마운데 영원히 내 안에 계시고 안 떠나겠다면 그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여러분은 이미 그 사랑을 받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계속 받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소중한 존재입니다“(옆에 있는 분에게).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맞바꾼 가치있는 존재라면 우리안에 예수님이 영원히 떠나지 않은 사랑받는 존재라는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도 가능한 존재입니다. 2:20의 마지막 부분을 아십니까?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 예수님이 나를 위해 고귀한 목숨을 십자가에 버리셨다면 그리고 그 분이 지금도 내 안에 계시다면 우리는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도대체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산다면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엡1:4-5절에서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말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었다면 우리가 못할 일이 무엇입니까? 혹시 우리는 못해도 아버지가 할 수 있게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의 아들은 아버지의 성을 물려 받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재산도 물려 받고 아버지의 특권과 대리권도 물려 받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독일의 한 교회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잖아요? 독일의 한 교회 마당에 예수님 동상이 서 있었는 데 2차 대전이 되어 폭격을 맞아 여기 저기 부숴졌답니다. 집사님 한 분이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 동상을 철저할까요?”.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그냥 두세요”. 얼마후에 동상앞에는 이런 시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는 두 손이 없다. 너희가 내 손이다. 나는 발이 없다. 너희가 내 발이다. 나의 입은 더 이상 말을 못한다. 너희가 하는 말이 내 말이다. 나의 귀는 찢어져 더 이상 듣지 못한다. 너희가 내 대신 말을 들어라이렇게 새겨져 있었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대리자라면 하나님의 신적 유전인자가 우리안에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성경은 생명의 씨라고 말합니다. 씨속에 유전인자가 있습니다. 씨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씨가 있다면 언젠가 싹이 나지 않겠습니까? 씨가 있으면 언젠가 자라지 않겠습니까? 묻혀 있는 것과 심겨져 있는 것 다르지 않습니까? 씨는 묻혀 잇는 것이 아니라 심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맺습니다. 랍니다. 심겨져 있으면 반드시 씨를 닮습니다. 우리는 부서지는 흙덩이입니다. 이사야32:15절에 외우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은 숲이 되리라”. 우리안에 생명의 씨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있기만 하면 씨는 나무가 되고 나무는 숲이 될 것입니다.

 

요즘 세계적으로 감동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호주 출신의 닉 부이치치(사진),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팔과 다리가 없이 태어났습니다. 태아날 때부터 기형으로 태어났으니 이 사람은 도무지 사람답게 살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8세 이후 세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다가 15세에 하나님을 만난 후 지금은 전 세계를 다니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람을 보면 세 번 놀란다고 합니다. 첫째 너무 너무 괴물과 같은 모습에 놀라고,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너무 행복하게 사는 모습에 놀라고, 셋째 거기에 비하여 건강한 나는 너무 너무 자신없는 태도로 사는 것에 놀란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묻는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행복하게 사세요?”. 그때마다 닉 부이치치가 한 말이 이것입니다. “나는 내 몸으로는 불완전하게 태어났지만 나는 내 인격체는 하나님안에서 완전하게 태어났다고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절대 어머니가 실수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그분의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나는 내 육체로는 한계가 많지만 내 삶에는 한계가 없다고 믿습니다. 나는 공식적으로는 장애인이지만 하나님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팔다리가 없습니다. 동시에 나는 절망도 없습니다. 언젠가 과학이 발달하여 부드럽게 움직이는 팔과 다리를 만들겠지만 나는 과학자들의 발명을 기다리며 오늘을 절망가운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한번은 3백여명이 넘는 십대 학생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데 한 여학생이 앞으로 걸어나와 한번 안아 봐도 되겠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래서 그러라고 했더니 그 여학생이 닉을 안으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래서 왜 우느냐고 했더니 지금까지 누구도 나에게 내 모습 그대로가 예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리고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사람도 없었고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닉이 팔 다리가 없는 자기 자신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리고 그 사랑이 하나님이 닉을 사랑한 그 사랑에서 나온 것을 보고 자기도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자기를 사랑하며 살기로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의 진짜 장애는 팔 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여 영혼의 장애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사랑으로 일어나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게 된 사람이 닉 한 사람 뿐이겠습니까? 성경을 믿으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2:20은 그 모든 성경을 요약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나는 예수님과 맞바꾼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내 안에 계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 분이 지금도 내 안에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사랑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그래서 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2:20(7): 2:20, 1:1-6 2010.10.10()

예수님 때문에 나는 소중합니다

 

나는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10: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12:6, “참새 다섯 마리가 동전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 “내 가치는 하나님 앞에서의 가치다. 나는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돌아가실 만큼 엄청난 가치를 가진 존재다.”

 

나는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13: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16:4,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그러다가 마지막에 또 말씀하셨습니다.

28:20,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우리는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32:15,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은 숲이 되리라”.

 

닉 부이치치(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