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2:20(5): 갈2:20, 빌1:20-21 2010.9.26(일)
예수님이 내 안에서 다스립니다
추석을 마치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추석때 가족과 함께 잘 지냈습니까? 멀리 3시간, 5시간, 힘든 교통체증속에도 우리가 고향에 가는 것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있기 위함입니다. 가족이 뭔지. 헤어지면 보고 싶고 만나면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만나기 전에는 할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만나면 할 말이 없습니다. 물론 말을 안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눈으로 말하는 것이 더 크고 느낌으로 말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다가 헤어질 때는 힘듭니다. 이번에도 고향에 다녀왔는 데 정말 헤어지기 쉽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주신 쌀과 과일을 차에 실었습니다. 사람들이 차에 탓습니다. 시동을 걸었습니다. 이제 떠나면 됩니다. 그리고 손을 흔들었는 데 어머니, 아버지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잘가. 천천히 가”. 그 말을 듣는 데 차마 부모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나이가 먹으면서 자식을 보내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을 조금씩 알 것 같습니다. 그런 가족이 이 땅에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입니다.
그런데 그 가족보다 더 가까이 계시는 분이 있습니다. 가족은 헤어졌다 만났다 하지만 그 분은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분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많이 알고 내가 내 옆에 있는 것보다 더 가깝게 계십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갈2:20의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 말씀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정체성과 변화된 존재를 보여 줍니다. 이 말씀은 나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영적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우연히 된 사람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죽었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을 때 나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면 지금의 나는 누구입니까? 그 다음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어떻게 됩니까? 끝납니까? 세상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죽으면 끝납니다. 죽음은 곧 사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죽었느냐가 문제입니다. 혼자 죽으면 끝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다시 삽니다. 성경 최고의 진리가 여기 있습니다. ”나 혼자 죽으면 죽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산다”. 제가 어느날 이 진리를 깨닫고 뛸 듯이 기뻣습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아, 육신의 죽음은 한번 죽으면 끝나지만 영적인 죽음은 죽으면 다시 산다”. 이것이 성경적 메시지입니다. 롬8:10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러분은 이 진리를 믿습니까? 이 진리는 성경적인 진리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서 얼마든지 경험되는 체험적인 진리임을 믿습니까?
지난 몇 년동안 제 마음속에 이해할 수 없는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엄청난 심적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는 역사적 사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경적인 정당성도 없는 일로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주변의 사람들이 문제라고 말했지만 저는 그가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구조상 목회자가 풀면 모든 문제는 풀리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문제를 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문제를 더 악화시켰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많이 따졌습니다. 인간적으로도 별 생각을 다 했습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새벽기도시간에 그의 얼굴이 갑자기 떠 올랐습니다. 잘난 척 하는 평소의 얼굴이 아니라 주름이 지고 흰머리가 난 늙은 얼굴로 나타났습니다. 처음엔 저도 피했습니다.
그런데 하도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제가 가까이 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언제부터 얼굴에 이렇게 주름이 많아요? 언제부터 흰머리가 났어요?”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를 안았습니다. 순간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를 가슴에 안았는 데 예수님의 사랑이 제 마음에 가득 차오름을 느꼈습니다. 그가 나에게 준 모든 상처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생겼습니다. 기도에서 깨어나 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몇 줄을 쓰자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편지를 다 쓰고 나니까 편지가 눈물로 얼룩져 도무지 편지를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한 장을 썻습니다. 그때 제가 불연 듯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 내 안에 주님이 계셨구나.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다 알고 계셨구나. 내 마음의 서러움도 알고 그가 불쌍한 존재라는 것도 알고, 다 알고 계셨구나. 아,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또한 감사한 일이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는 혼자라고 생각하고 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모르고 있거나 영적으로 둔감해서 그것을 잊고 사는 것뿐입니다. 또 내가 없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능력의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계신다“.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여러분은 이 진리를 믿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죽은 우리안에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 분이 내 안에 계셔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내가 나와 가까운 것보다 더 가깝게 계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미국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소개받았습니다. 여자가 마음에 들어 가까이 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때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I am you". 남자가 뿅 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좋은 데 내가 당신이라고 하니까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결혼했습니다. 알고보니 여자의 성이 유씨였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누구냐고 묻자 자기 성을 대며 내 이름은 유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그 말을 “나는 당신이요”란 말로 들은 것입니다. 우리안에 계신 주님이 여러분에게 “너는 누구냐?” 하고 물을 때 “I am you". "나는 당신입니다”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안에 계신 주님께 여러분이 “주님은 누구입니까?” 물으면 “I am you"라고 대답하실까요? 그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렇다면 우리안에 계신 주님은 우리안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다스립니다. 통치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우리 영혼에는 주인이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 영혼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무신론자 윌리암 헨리가 말한 대로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며, 내 운명의 주인이다(l am the captain of my soul. l am the master of my fate)”. 맞습니까?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았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우리 운명의 주인으로, 우리가 우리를 영혼의 선장으로 알고 살다가 얼마나 많이 실패했습니까?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l am the captain of your soul. l am the master of your fate”. “내가 네 영혼의 선장이요, 네 운명의 주인이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며 우리를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언어, 우리의 감정, 우리의 행동을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보십시오. 우리의 생각은 어디서 나옵니까? 우리 자신에게서 나옵니다. 우리 자신의 생각은 대개 이런 것들입니다. 마15:19입니다.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우리가 주인으로 있는 한 우리 속에서는 이런 생각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안에서 우리 생각을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말을 다스립니다. 우리의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인으로 있는 우리 속에서 나오는 말은 이런 것입니다. 엡4:29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더러운 말입니다. 잠12:18절,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같으니라”. 칼로 찌르는 말입니다. 아무리 교양을 연마하고 공부해도 우리 속에서 나오는 이런 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스려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사랑으로 초청하는 말을 하게 해야 합니다. “네가 베드로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격려하는 말을 하게 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믿음의 말을 하게 합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구원으로 인도하는 말을 하게 합니다.
감정을 다스립니다. 감정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물이지만 죄 때문에 타락해 있습니다. 변질되고 상해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은 이런 것입니다. 엡4: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악독, 노함, 분냄, 떠드는 것, 훼방하는 것, 우리를 홀로 두면 우리는 반드시 이런 감정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감정을 다스립니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불쌍히 여기는 감정입니다. “예수께서 우시니라”. 눈물의 감정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기쁨의 감정입니다. 우리안에 예수님이 산다면 우리의 생각, 언어, 감정, 행동이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순종입니다. 우리안에서 예수님이 다스릴 때 우리가 할 일은 순종입니다. 제가 고2였을 때 교회에서 양로원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몸이 불편한 노인들을 휠체어에서 침대로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마침 한 할아버지를 옮기는 데 그는 거구였습니다. 제가 70킬로 미만이었는 데 그 할아버지는 90kg가 넘었습니다. 몇 번 무거운 환자를 들어봐서 요령을 조금 알고 있었던터라 먼저 휠체어 앞에 서서 양다리를 할아버지의 무릎에 대고 두 손으로 그의 겨드랑이를 잡고 들어올렸습니다. 그리고 침대를 향하여 획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할아버지를 들어 침대로 옮기는 데 제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가 저에게 몸을 맡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온몸을 나무처럼 뻣뻣하게 해서 제가 들었는 데 도무지 들리지 않으려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할아버지는 안간힘을 썻습니다. “할아버지, 힘 빼세요! 제가 옮겨드릴테니까, 가만히 좀 계세요”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할아버지가 저에게 몸을 맡기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몸도 아프고 나이도 많으니까 젊은 저에게 맡기면 될 일을 할아버지는 끝까지 자기 힘, 자기 방식, 자기 자존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안에 계신 예수님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말고 그 분에게 우리 몸을 완전히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지금의 우리 보다 훨씬 위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안에 예수님이 지시하신 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위대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안에 계신 예수님이 느끼게 하신대로 느끼면 우리는 위대한 긍휼, 위대한 시인, 깨끗하고 맑은 감정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감정 뿐이 아닙니다. 우리안에 예수님이 원하는 대로 사업하면 우리는 언제나 성공하는 사업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안에 예수님이 원하는 대로 자녀를 키우면 그 자녀는 위대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안에 계신 예수님이 주신 영감대로 설교하면 그 설굔즌 사람을 움직이는 설교가 될 수 잇습니다. 설교를 못하는 목회자와 혼자 사는 할머니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감은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기독교 잡지를 보다가 <한나의 믿음>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남다른 슬픔의 삶을 믿음으로 헤쳐나온 한 가난한 여자의 이야기였습니다. 한번은 그가 자신을 찾아온 손님에게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손님은 감동하여 말했습니다. “한나, 그 많은 슬픔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한나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감당한 게 아닙니다. 주님이 감당해주셨어요.” 손님이 말했습니다. “그거야 당연하죠. 우리는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가야 하지 않아요?” 그때 한나가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가지고 가면서 한 가지 우리가 할 일이 더 있습니다. 문제를 거기 두고 나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예수님께 가져갑니다. 그리고 다시 가져 옵니다. 그리고 전과 같이 근심하고 걱정합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저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갑니다. 그리고 놓고 옵니다. 가끔 근심이 되살아납니다. 그러면 다시 그분께 갑니다. 계속 그러다 보면 결국 나에게 근심거리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립니다. 그것이 능력의 비결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방법입니다. 문제가 가지고 가되 다시 가져오지는 말라. 맡겨라. 그리고 잊어라. 그것이 다스림 받는 방법입니다.
신뢰가 필요합니다
순종뿐 아니라 신뢰도 필요합니다. 오래전 한 교인의 어린 아들이 난로 뚜껑에 넘어져 눈이 찢어졌습니다. 병원에 입원했다고 해서 급히 갔습니다. 간호사들이 아들을 이동용 침대에 눕히더니 양손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아이의 눈을 꿰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너무 아파서 소리쳤습니다. “아빠, 아빠, 아파, 저 아저씨가 날 아프게 해. 못하게 해 줘. 못하게 해 줘” 가슴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아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안절 부절 의사 한 번 보고 아들 한 번 보고. 그 현장에서 아빠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이를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 의사의 수술을 못하게 할 수도 없고 아픈 아이보고 무조건 참으라고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어린 아들 입장에서 “지금 아빠가 나를 힘들게 하는 저 의사를 제지하지 않으니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해도 아빠 입장에서는 별 수가 없겠구나. 그리고 또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고난받을 때 우리도 그럴까? “하나님, 왜 나를 돕지 않으세요? 나가 지금 죽을 지경인데 왜 보고만 계세요?” 이렇게 원망해도 하나님도 별 수가 없겠구나. 그때 하나님은 어떻게 할까?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결국은 유익을 주는 고난을 중단시킬까? 아니면 우리보고 그저 참으라고만 하실까? 그때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딱 하나 있습니다. “지금은 아프지만 아빠가 말리지 않는 것을 보니 나에게 무슨 좋은 뜻이 있나 보다. 아프지만 아빠를 믿고 참자”.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고난보다 중요한 것이 신뢰입니다. 내가 당하는 아픈 현실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계획하신 일에 대한 신뢰가 더 중요합니다. 고난보다 신뢰가 크면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겸손도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못났다고 말하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일하도록 나를 비워주는 것이 겸손입니다. 앤드류 머레이의 표현에 의하면 겸손은 “내가 비켜나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왕좌에 모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망아(忘我), 곧 자기를 망각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내안에 계신 주님이 나를 통하여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내가 즐거운 통로가 되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몇 주전에 중국에 다녀왔습니다. 중국에 있는 가정교회를 보려고 갔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중국 교회 부흥의 비결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영적 민감성과 음성에 대한 철저한 순종입니다. 얼마나 이것이 분명한지 중국교회는 이것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향한 음성이다” 하면 아무 것도 보지 않습니다. 그저 순종합니다. 여기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핍박의 시대의 중국 성도들의 삶을 쓴 “백투 예루살렘”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국 허난성의 가정교회 지도자중에 챵 자매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느날 그에게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경찰서 앞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전도를 금한 중국에서 이런 행동을 하면 즉각 체포되고 처벌된다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 챵 자매가 기도하면 할수록,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음성은 분명했습니다. “경찰서앞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결국 그는 하니님의 음성에 순종하기로 경찰서로 갔습니다. 그리고 계단 위에 서서 청중에게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몇 분 되지 않아 곧 경찰이 나타났고 그는 끌려 갔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하나님의 크신 계획에 의한 일이었습니다. 챵 자매는 구속되어 갇힌 교도소는 수천 명의 여성들을 수감한 여성 교도소였습니다. 그런데 이 교도소는 말썽이 많은 교도소였습니다. 허구헌 날 싸움에 고성에 욕설에 교도소장도 포기한 교도소였습니다. 그런데 창자매가 거기 들어가면서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불길이 급속도로 번지자 3개월만에 약 800명의 여성 죄수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감옥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싸우고 괴성을 지르는 교도소에서 찬양하는 소리, 예배하는 소리가 가득한 교도소가 되었습니다.
교도소장은 교도소가 변하자 엄청난 감동을 받았고, 그 원인이 바로 챵 자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챵 자매를 집무실로 불러 칭찬했습니다. “당신 덕분에 우리가 할 일이 무척 수월해졌소. 이제는 죄수들이 싸우지 않고 하나같이 온순하게 말을 잘 듣고 있으니 놀랍소. 이곳은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하오. 오늘 석방시켜 줄 테니 이 교도소에 취직해 주시오. 월급은 한 달에 3천 원 주겠소”. 3천 원은 60만원 정도 돈으로서 중국 농촌 지역에서는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또 당신에게 운전 기사 딸린 차도 주고 편안한 집도 마련해 주겠소”.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일개 범법자에게 교도소 직원이 되어 달라고 교도소장이 머리 숙이니 그런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면 이렇게 됩니다. 순종할 때는 힘들지만 순종하면 하나님이 높여주고 하나님이 기적을 베풉니다.
이 말을 듣고 챵자매는 잠시 고민했습니다. 순간 가난한 가족들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계신 주님이 감동했습니다. “너는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라. 내가 이를 위해 너를 불렀다”. 창자매는 자기안에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순종하기로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20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분은 저에게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소장님이 주시겠다는 차나 운전사나 집은 예수님이 제 인생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비전과 아무 상관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주님의 것이기에 앞으로도 복음만을 전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순종하면 역사가 나타납니다. 모든 믿음의 능력은 여기서 나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음성에 민감할 것과 그음성에 즉각 순종할 것, 여기에서 믿음의 능력이 나옵니다. 모든 부흥, 모든 기적, 모든 승리, 모든 역사가 여기서 나옵니다.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는 교회 자리 채우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요 총동원 주일을 위해 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서 계속 지시합니다. “너는 전도해라”. “주님, 제가 전도할 줄 모르니 어떻게 전도합니까?” 주님 말씀합니다. “내가 안하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 순종이다. 네가 할 일은 순종하는 것이요 내가 할 일은 전도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전도에 불타 한 작은 어촌마을로 부임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늘 “전도하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부산의 끝자락, 작은 어촌, 동네에서 3킬로 이내에 사는 어린아이까지 포함하여 모두 300명도 되지 않은 시골에 그가 전도하기 시작하여 5년만에 만명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그 교회 권사님이 한 분 계시는 데 열심히 없어 나오다 안 나오다 한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목사님이 찾아가 “권사님, 권사님이란 직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주신 직분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위해서, 이 목사를 위해서,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 아닙니까?” 했더니 “목사님 바빠서요”합니다. 그래서 “뭐가 그렇게 바쁘십니까?”했더니 고추농사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허구 헌 날 고추 농사에에만 매달립니다. 목사님이 한번은 기도하다가 이런 감동을 받았습니다. “네가 진짜 하나님의 종이라면 그 권사를 그대로 두면 안 된다. 고추밭을 다 뽑아 버려라”. 그래서 감동대로 고추밭에 가서 고추를 다 뽑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가서 말했습니다. “권사님, 사실은 제가 오늘 오후에 권사님 밭에 가서 고추를 뽑았습니다.”. “목사님,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목사님이 왜 우리 고추밭에 손을 댑니까?” 그때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권사님은 지금까지 수십 년 예수님을 믿고 권사님까지 되셨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감격한 적이 있습니까? 주님은 마지막까지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생각하고 지킨 적이 있습니까? 권사님은 지금 고추밭 때문에 심장이 떨리고 치가 떨려서 말을 못한다고 하시는데, 예수 믿고 너무나도 좋아서 오늘처럼 심장이 떨린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복음을 전하다 죽을 영혼이 복음을 받아들여서 너무나도 좋아서 심장이 떨린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 그때 권사님이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더니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너무 잘못했습니다. 이 고추가 뭐라고.여기에 정성을 쏟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전도하기 시직했는 데 그 해 12월,전도해서 11명을 세례 받게 했다는 것입니다.
전도도 순종이요 기도도 순종이요, 구제도, 선교도, 착한 행실도, 가정도, 사업도, 목회도, 설교도, 그 무엇도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면 우리안에 계신 주님이 일하십니다.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 안에 내 대신 그리스도가 사는 축복, 행복, 기적, 그 능력으로 평생 승리하기 바랍니다.
갈2:20(5): 갈2:20, 빌1:20-21 2010.9.26(일)
예수님이 내 안에서 다스립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갈2:20,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롬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리라“.
마15:19,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엡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잠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같으니라”.
엡4: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순종이 필요합니다
신뢰가 필요합니다
겸손도 필요합니다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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