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2:20(4): 갈2:20, 골3:1-6 2010.9.19(일)
나는 매일 죽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최고의 신비한 진리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황당한 말도 없고 이처럼 좋은 말도 없습니다. 못 믿으면 황당한 말이 되고 믿으면 좋은 말이 됩니다. 정말 능력은 죽는 데서 옵니다. 왜 우리가 약해지는가 하면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소련 공산당 시절에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요직을 자기 혈족으로 채우고 백성을 권력으로 눌렀습니다. 이런 독재자도 1989년 민중혁명이 일어나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한 사람씩 정적을 붙잡아 처형하면서 소감을 묻습니다. 그랬더니 한 사람이 차우세스쿠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합니다. “당신의 최대 무기는 나를 죽이는 것이요. 그러나 나의 최대 무기는 죽는 것이요”.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은 이 말에 독재자도 움찔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최고로 무서운 사람은 죽음도 무서워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이미 죽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면 우리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면 내가 죽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막교부중에 성 마카리우스가 있습니다. 그에게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아바, 내가 죽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마카리우스가 말했습니다. “오늘 밤에 저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치라. ”이 나쁜 놈들아, 위선자들아, 부자 놈들아, 천하고 고약한 놈들아“. 제자는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마카리우스가 물었습니다. “어떠하더냐?”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무 반응이 없던데요” “그래? 그러면 내일 아침 또 다시 가서 소리쳐라. ”오, 훌륭하고 위대한 분들이여“ ”. 제자가 무덤에 가서 시키는 대로 외쳤습니다. “이번에는 어떠하더냐?” “역시 반응이 없습니다.” 마카리우스가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자기에게 욕을 해도 말이 없고 칭찬을 해도 말이 없습니다. 자기에게 험담을 해도 말이 없고 우상처럼 치켜 세워도 말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상처도 받지 않고 우쭐하지도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쁜 놈아” 할 때 기분이 나빳다가 “위대한 분이시여” 할 때 우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음안에서 죽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얼마전 신문에 난 작은 사건을 보고 사람이 죽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달았습니다. 한 사람이 수퍼마켓에서 4,500원 짜리 계란 한 판을 훔치다 붙잡혔습니다. 30대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람은 새벽 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그는 믿음도 좋고 가정도 부자라 교회에 1억을 헌금한 적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계란을 훔쳤습니까?“ 하고 경찰이 묻자 그가 새벽 기도후 배가 고파서 충동적으로 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람이 죽기가 그렇게 어려운가를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신앙생활할 때 죽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우리가 우리를 죽이고 산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때 우리는 반드시 두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 그래도 나는 죽었다는 것과 둘째. 그래서 나는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우리가 나눈 말씀을 기억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 말씀에 나타난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합니까? 하나는 법률적으로 죽고 또 하나는 육체적으로 죽고. 법률적인 죽음은 십자가 지자마자 일어납니다. 그것이 오늘 3절입니다. 골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안에 감취어졌슴이라”. 법률적인 죽음은 신분상의 죽음입니다. 호적에서 이름이 없어지는 죽음입니다. 구약에서 어린양이 죽었습니다. 어린양이 죽을 때 사람도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지실 때 그 대신 풀려난 바라바도 함께 죽었습니다. 프랑스 월드컵때 브라질이 프랑스에 3:0으로 졌습니다. 그때 모든 브라질 사람들이 프랑스에 졌습니다. 이것이 롬6:8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그러면 함께 죽었으면 어떻게 됩니까? 함께 삽니다. 롬6:4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리라”. 고구려때 을지문덕이 연개소문을 이겼습니다. 그때 모든 고구려인이 당나라를 이겼습니다. 이순신이 한산섬에서 일본을 무찔렀습니다. 그때 모든 조선 사람이 일본사람을 이겼습니다. 맥아더장군이 1950년 9월 16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했습니다. 그때 모든 한국국민이 인천에 상륙했습니다. 1945년 8.15 일본 천황이 항복했을 때 모든 일본사람이 항복하고 그 대신 모든 한국사람이 해방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죽고 사는 원리입니다.
그러면 죽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이 5절의 “그러므로”입니다.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골3장에는 두 가지 죽음이 나옵니다. 3절, ”너희는 죽었고“, 이미 십자가에서 과거에 죽은 죽음입니다. 5절, ”그러므로 죽으라“.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죽이는 죽음입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법적인 죽음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죽을 것이 남아 있습니다. 육신적인 죽음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 은혜로 하나님께 나옵니다. 그러나 매일 새벽기도하고 많은 헌금을 하나님께 바쳤어도 여전히 수퍼마켓에서 계란을 훔치려는 내 속에 있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법적으로 죽는 것은 순간적으로 죽습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죽는 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기를 죽이라
성경은 “자기를 죽이라”는 말을 “자기 십자가를 지라”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막8:3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로마 시대에는 어디 에서나 십자가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까지 가야 했습니다. 누가 대신 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직접 자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요19:17,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과연 “자기 십자가를 지라”. “자기를 죽이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죽이라”라는 말은 먼저 자기를 학대하란 말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이 “자기를 죽이라”는 말을 “자기를 무시하고 학대하라”는 말로 오해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중에 가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를 죽이라” 하면 “아하, 나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뜻이구나. 그래. 나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려야지” 합니다. 그러나 “자학”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부정이 아닙니다. “자학”의 극단은 “자살”인데 자살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자살은 반대는 살자입니다.
그래서 이태리에서 어떤 사람이 그랬다고 합니다. 살면서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아 죽으려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 산은 죽으려는 사람이 많아 시청에서 아예 이런 팻말을 써붙였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날 죽으려는 사람이 올라오면서 마음을 바꿨습니다. 죽고 싶지만 자식들이 불쌍해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래, 살아야지. 내려가자” 하고 내려가려는 데 팻말에 이렇게 씌여져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요“. 그래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까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에라, 죽자“하고 바다로 떨어졌는 데 아직까지 부활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기를 죽이라는 말은 자학도 아니고 자살도 아니고 자포자기도 아닙니다.
또한 자기를 죽이라는 말은 스스로 자신을 고난속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웬지 하나님께 미안해서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부자유와 고난속에 몰아 넣습니다. 그러면서 “나도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오해입니다. 사서 고생하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잘 감당하는 것과 스스로 고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은 다릅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불행한 운명속으로 빠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기가 죽일 때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를 죽이지만 나를 죽였다고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죽이며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로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위해 자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된 삶을 위해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무거운 십자가를 져도 그것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지 않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로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선포했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을 헬라어로 보면 “텔레스타이”입니다. 이 말은 “끝내다, 완성하다, 완수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일의 대가를 이미 계산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완불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가게에서 상품을 사고 팔면 장부에 “텔레스타이”, “완불”이라고 썻습니다. 돈 다 갚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말한 것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우리를 죽인다 해도 그것 때문에 갚아야 할 빚을 더 갚고 우리가 받아야 할 구원을 더 받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가 우리를 죽이는 것과 상관없습니다.
성령안에서 매일 죽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를 죽이며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닮습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가 있습니다. 죄의 본성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우리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죄의 패잔병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으로 중앙청에 있던 일장기가 내려지고 태극기가 올라갔습니다. 일본은 망하고 한국은 해방을 맞이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여기저기에서는 아직도 돌아가지 않은 일본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망한 줄도 모르고 살고 있었고 어떤 일본 사람은 이왕 망했으니 이판사판이다 하면서 더 나쁜 짓을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믿으면서 자기를 죽여야 할 이유는 우리 속에 아직도 죄의 패잔병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죄의 패잔병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드러나지 않은 채 우리 속에 꽁꽁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5절 보실까요?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죽이는 데 다른 것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지체를 죽입니다. “지체”란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지체는 보이지 않은 몸입니다. 우리 몸에는 두 가지 몸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몸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몸이 있습니다. 보이는 몸을 영어로 body, 보이지 않는 몸을 flesh라고 합니다. 헬라어로도 다릅니다. 보이는 몸은 “바사르”라 합니다. 롬12:1이 대표적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하나님은 우리 몸을 선하게 지으셨습니다. 우리의 사지백체, 오장육부는 하나님이 선하게 지으셨습니다. 우리의 몸 하나 하나가 신묘막측합니다. 몸은 성령을 모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몸은 영혼을 담은 거룩한 집입니다. 몸 자체가 죄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금욕주의의 문제는 죄가 몸에서 나온 줄 알고 몸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 금식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몸을 밧줄로 묶고 채찍으로 때리기도 합니다. 좋은 뜻으로 그렇게 하지만 생각이 잘못되었습니다. 우리의 몸에 문제가 있어서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안에 있는 지체가 문제입니다. 우리 몸안에 있는 또 하나의 몸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육신, 육체, 지체, 육체의 소욕”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롬7장에서 말한 육신이 그것입니다. 롬7:24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바울이 말한 이 “사망의 몸”이 곧 “육신, 육체, 지체”입니다. 헬라어로는 “싸르크”라고 부릅니다. “싸르크”는 우리 안에 있는 보이지 않은 죄의 성향, 곧 죄의 뿌리를 말합니다. 신학자 죤 스토트가 말했습니다.
“바울의 “육신”(싸르크)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 혹은 구속되지 못한 인간성,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 이전에, 우리가 출생과 유전 그리고 성장 과정에서 갖게 된 모든 나쁜 것을 말한다. 우리의 “육신”은 아담 안에서의 우리의 ‘자아’이므로 그것의 본질은 자기 중심성이다“(존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문제는 우리속에 보이지 않은 이 죄의 뿌리를 어떻게 이길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방법이 우리 속에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롬8:11절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여기서 “죽을 몸”은 “지체, 육신, 육체, 싸르크”입니다. 죄의 패잔병, 죄의 뿌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안에 있는 육신을 우리가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너희 안에 성령이 거하시면”, “그 영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성령님이 우리안에 거하십니다. 거하신다는 말은 잠간 방문하고 떠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 한 번 들렀다 간 것이 아닙니다. 아예 집짓고 사는 것입니다. 지속적이고 영구적으로 거주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안에 영구적으로 계시면서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우리 죄를 이기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안에 있는 육신, 육체, 지체를 싸워 어거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롬8:13절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여기 “죽인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영으로써 죽입니다. 다른 것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몸의 행실”입니다. 여기서 몸은 육신, 지체, 싸르크입니다. 이것을 내가 죽일 수는 없습니다. 전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패잔병입니다. 패잔병은 막다른 골목에 있기 때문에 죽으면 죽으리라 덤빕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입니다.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의 패잔병은 우리가 이길 수 없습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롬8:1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을 인도합니다.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순서가 있습니다. 롬8:13, 영으로 죽어야, 14절 하나님의 아들로 인도합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오늘까지 오랫동안 예수믿고도 달라지지 않은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30년, 40년을 믿어도 성품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많이 고민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드디어 발견했습니다. 오래 믿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죄와 지속적으로 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일날 성경끼고 교회간다고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두 번 소리내서 기도한다고 우리안에 있는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안에서 직분이 없거나 열심히 봉사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죄를 이기는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제어장치를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언젠가 세차하려고 세차장에 갔습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터널을 통과하여 건너편으로 나왔을 때 차가 아주 깨끗해졌습니다. 그때 차안을 보았는 데 아주 깜짝 놀랐습니다. 차안은 더러운 채 그대로 있었습니다. 먹다 만 커피 캔 그대로 있고 널부러진 휴지 조각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많은 밖의 물이 차안에 있는 지저분한 것들을 없애주지 못했습니다. 신앙인이 영적인 능력을 잃어버리고 종교적으로 살면 어떤 결과를 가져어는지 보여주는 그림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더러운 병균을 보자기에 싼다고 병균이 없어집니까? 그 보자기를 냉장고에 넣는다고 병균이 얼어 죽습니까? 끓이기 전에는 죽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를 끓이는 강력하고도 뜨거운 영적인 무기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독버섯처럼 닥지 닥지 붙어 있는 죄의 뿌리, 육신의 소욕, 싸르크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밖에다 소나기같은 물을 퍼 부어도 우리의 내부를 달라지지 않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 분이 능력입니다. 그 분이 역사해야 합니다. 다시 보십시오. 롬8:13,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영으로 죽여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안에서 우리 죄를 미워합니다. 싫어합니다. 청교도 신학자 죤 오웬(John Owen)이 쓴 “신자들 속에 있는 죄 죽이기”(The Mortification lf Sin in Believers, 1656)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합니다. “죄를 미워하는 것이 모든 진정한 영적 죽이기의 기초다”. 영적 승리를 위해 우리가 인정할 것은 우리안에 죄의 패잔병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그 죄를 정당화하거나 타협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쉬지 말고 그것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성령의 도움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죤 오웬이 말했습니다. “성령님의 도움없이 죄를 죽이는 것은 눈 없이 보는 것이나 혀 없이 말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우리안에 있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죄를 미워할 뿐 아니라 죄를 회개하게 합니다. 죄는 미워할 뿐 아니라 회개해야 합니다. 진실한 성도는 언제나 자기 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합니다. 중세 시대 한 도시에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음란죄를 범한 한 주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힘들어 하다가 어느날 결단했습니다. 어느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사람들앞에 나가 고백했습니다.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는 음란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죄를 짓고는 주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 주교직을 사임합니다“.
그래도 평소에 훌륭한 주교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간청했습니다. “주교님의 실수는 우리 모두의 실수입니다. 그 죄를 우리에게 돌려주시고 계속 우리의 주교가 되어 주십시오.” 그랬더니 그 주교가 갑자기 교회 문턱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만일 제가 여러분의 주교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면 죄인인 저를 밟고 지나가십시오”. 교인들은 한 사람씩 주교를 밟기 시작했고 마지막 한 사람이 밟고 지나가자 하늘에서 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 겸손함 때문에 내가 네 죄를 사하노라”. 하나님이 그의 죄를 사한 것입니다. 자기를 죽인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자기속에 있는 자기를 짓밟아야 합니다. 자기속에 있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앞에 감추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앞에 자기 죄를 드러내는 용기와 함께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이 죄인임을 감추지 않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과감하게 사람들이 자신을 밟고 갈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안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아무도 몰래 하나님앞에서 우리 죄를 인정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앞에서는 잘 안됩니다. 사람들을 하나님보다 더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자존심 때문입니다. 타락한 자아 때문입니다. 영적 생활을 위해 우리에게 가장 나쁜 것은 우리안에 있는 죄있다는 것보다 그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안에서 끊임없이 죄와 싸우게 하고 끊임없이 사람들앞에서 자기를 짓밟히게 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영적 생활은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는 것이다.
그러면 영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죽이는 생활을 매일 습관처럼 하는 것입니다. 성령안에서 자신을 매일 들여다 보고 죄를 미워하고 그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전15:31에서 말한 말이 그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영적인 삶은 성령으로 늘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읽는 “탈무드”에 사람을 평가하는 세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는 돈주머니(키이소오)입니다. 돈에 대한 탐욕, 물욕이 사람을 타락시킵니다. 성령안에서 이 욕심과 싸워야 합니다. 둘째는 술잔(코오소오)입니다. 술은 모든 죄의 관문입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어떤 죄와 만납니다. 셋째는 분노(카아소오)입니다. 분노는 우리의 성질을 완악하게 하고 우리 얼굴을 굳게 만듭니다. 그래서 쇠소리를 내게 합니다. 성령안에서 분노심과 싸워야 합니다. 오늘 골3:8절에 우리가 매일 싸울 영적인 전투의 목록들이 나옵니다.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이것들이 우리안에 있습니다. 매일 이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이것들과 성령안에서 싸우는 일이 생활화, 습관화되어야 합니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교회에서 자기를 복종시키고 항복시키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기를 죽이며 살면 그때 자연적으로 가능한 것이 순교입니다. 순교는 어느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자기를 죽여야 결정적인 때 순교할 수 있습니다. 순교는 순교적 삶의 연장입니다. 평소에 죽지 않는 자가 죽는 것은 순교가 아니라 타살입니다. 초대교회에 믿음 좋은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 밑에 종이 있었는 데 그가 밀고해서 주인이 잡혀가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종을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와 함께 살아줘서 고맙고 나를 순교에 이르게 해서 고맙네”. 그리고 자기가 끼고 있던 금반지를 빼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평소에 성령안에서 자기를 죽이며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합니다.
독일의 본회퍼 목사님이 히틀러에게 붙잡혀 1945년 순교했습니다. 그가 교수대앞에서 간수에게 말했습니다. “저로 마지막에 잠시 기도하게 해줄 수 있겠습니까?” 허락을 받은 그가 무릎꿇고 한참을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미소를 띄고 간수에게 말했습니다. “오늘이 세상에서 내 마지막 날이지만 하늘에서는 생명의 첫날입니다”. 성령안에서 날마다 죽는 사람은 이렇게 삽니다. 날마다 죽고 사는 일이 반복되기 때문에 죽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순교도 삶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면 어떻겠습니까?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우리, 내가 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법적인 죽음을 죽었다면 이제 성령안에서 내 속에 있는 죄와 싸우고 죄없으신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매일 성령안에서 죽는 것이 행복하지 않습니까? 죽으면 다시 살줄로 우리는 믿지 않습니까? 매일 성령안에서 죽고 사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2:20(4): 갈2:20, 골3:1-6 2010.9.19(일)
나는 매일 죽습니다
골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안에 감취어졌슴이라”.
롬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6:4, “그런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리라”.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자기를 죽이라
막8:3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요19:17,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과연 “자기 십자가를 지라”.
자기를 죽이라는 말은?
자기를 학대하란 말이 아니다
자신을 고난속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다
성령안에서 매일 죽이라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롬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육신, 육체, 지체=싸르크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8:13,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영적 생활은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는 것이다.
고전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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