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9:1-10 2010.12.12(일)
하나님께 쓰임받는 자의 행복
성탄을 앞둔 12월 둘째 주일입니다. 지난 한 주 미국집회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미국에서 집회하는 가운데 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생각하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집회중 저를 찾아온 사람들을 통해 깨달은 은혜였습니다. 한 사람은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전도사로 일한 교회에서 만난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학생이었습니다. 갑자기 어머니가 죽는 불행한 가정 환경속에서 고등부 회장으로 오직 믿음으로 살던 학생이 자라 40대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어느날 제가 부흥회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부부가 함께 저를 찾아왔습니다. 하도 오랜만에 만나 처음에는 얼굴을 몰라 보았습니다. 그날 밤 그의 간곡한 요청으로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잤는 데 워싱턴 D.C에서 사업에 크게 성공해 아주 큰 저택에 살고 있었습니다. 왕궁같은 그의 집에 자면서 불행한 환경속에서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는가를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제가 지방에서 목회할 때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젊은 부부였습니다. 이들 역시 대학때 오직 믿음으로 살던 젊은이들인데 제가 주례해서 결혼하고 곧 바로 워싱톤 죠지 타운대학에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유학을 떠난 뒤 저는 잊고 있었는 데 그들이 또 신문을 보고 저를 찾아온 것입니다. 5살된 딸과 함께 온 이 부부는 지난 10여년간 많은 노력을 한 결과 조지 타운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 미국 변호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직도 젊은 데 워싱턴 한인사회에서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두 부부를 보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 살아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 문제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는가이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잘된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은 세상을 이긴다. 믿음으로 살면 잘 되고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신다“. 이 두 부부의 공통된 특징은 젊은 시절 고난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부부는 고등학교때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새 장가를 들면서 새 어머니밑에서 마음 고생 많이 하고 자랐습니다. 유학간 부부는 너무 가난해 부모가 그들이 유학을 떠날 때 돈 한 푼도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교인들이 십시일반 모아서 비행기표를 마련해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것은 없었지만 오직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은 믿음있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요셉처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또한 교회에서도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큰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두 부부만의 이야기일까요?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형통케 하시고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은혜주셔서 형통케 하시고 사용하기를 원합니까? 오늘 말씀은 삭개오를 통하여 그것을 말씀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삭개오를 사용하시는 몇 가지 과정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쓰임받고 사용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삭개오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삭개오를 축복하고 사랑했다면 그 첫 번째는 삭개오의 마음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삭개오란 이름은 본래 이스라엘에서 귀한 이름입니다. 구약의 사가랴가 삭개오과 같은 이름이고 세례 요한의 아버지도 사가랴였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의로운 자, 깨끗한 자, 정결한 자”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삭개오는 그 이름하고 전혀 다르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름의 뜻은 의로운 자입니다. 그러나 의롭게 살지 않습니다. 의롭게 살기는 커녕 추하게 삽니다. 이름의 뜻은 깨끗한 자입니다. 그러나 깨끗하게 살지 않습니다. 장부를 부풀리고 세금고지서에 고쳐 남의 돈을 착복합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삭개오”, “의로운 자, 깨끗한 자, 정결한 자”였다면 그 아버지 또한 좋은 믿음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의 뜻을 버리고 세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부모에 대해서도 불효자입니다. 젊을 때는 돈버는 재미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살다 보니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는지 미워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밥이라도 먹게 되고 나이도 먹어 가면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 이름은 무엇인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나는 하나님앞과 부모앞에서 떳떳한가? 아니었습니다. 아, 자신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면 안되었습니다. 그러자 서서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생겨 났습니다. 거룩한 불만이 생겨났습니다.
사람을 각성시킨 것은 이 거룩한 불만입니다. “내가 지금 사는 것은 최선인가?” ”월간 직장인“을 보면 한국 근로자의 70퍼센트 이상이 매일 기대감없이 일터로 간답니다. 직장인 세 명중 한 명은 일하기가 죽기보다 싫답니다. 많은 자살사건이 주일 저녁에 일어나고 심장마비가 월요일 아침에 일어납니다. 직장인 중 43퍼센트는 고용주를 볼 때마다 분노한답니다. 이런 불만은 대개 파괴적인 불만일 때가 많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직장을 평생 일터로 생각한다면 이런 불만은 도움이 안되는 불만입니다. 그러나 삭개오의 불만은 먹고 사는 것에 대한 불만이 아니었습니다. 먹고 사는 것에는 별 불만이 없습니다. 안정된 직장에 월급도 꼬박 꼬박 나오고 뒤로 들어온 돈은 더 많았습니다. 직장으로 말하면 그렇게 좋은 직장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것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돈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없이 육적으로만 살아서도 안되고 하나님없이 지적으로만 살아서도 안됩니다. 우리안에 하나님을 찾는 본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입니다.
최근에 이어령교수가 시집 한 권을 냈습니다.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시집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어령교수는 한국의 지성을 대표한 사람입니다. 그의 박학다식은 그의 말과 글에 가득차 한국인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그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가 지성을 뒤로 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것은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영성입니다. 그는 지성에서 영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이 책에서 “탕자의 노래”라는 시를 썻습니다. “내가 지금 방황하고 있는 까닭은 사랑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헤매고 있는 까닭은 진실을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멀리 떠나고 있는 까닭은 아름다운 순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사랑을 알고 진실을 배우고 아름다움을 보았지만 나에게 믿음이 없는 까닭입니다. 나의 작은 집이 방황의 길 끝에 있습니다. 날 위해 노래를 불러줘요. 집으로 갈 수 있게 믿음의 빛을 주어요. 개미구멍만 한 내 집이 있기에 나는 지금 방황하고 있어요”.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평안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집은 하나님의 품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기전 우리의 방황은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품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사용하십니다. 겨울이 되면 철새들이 남쪽으로 내려 갑니다. 누가 부르지도 않았는 데 누가 인도하지도 않는 데 때지어 날아가는 새들을 보면 고개가 숙여 집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새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노아 방주에 나오는 까마귀, 비들기, 공중에 나는 참새, 철새, 제비, 두루미등입니다. 새는 날아갑니다. 그러나 아무 데나 날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향해 날아갑니다. 귀소본능이라고 합니다. 새들은 아무리 먼 곳에 갖다 놓아도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본성이 있습니다. 노아의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온 이야기가 그 예입니다.
2차 대전시 영국은 비들기의 이 귀소본능을 이용하여 “비둘기 우편 제도”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비둘기를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해 어느 목표지점에 메시지와 함께 보내는 제도입니다. 그중에서 “왕키”라는 비들기는 19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날아가 난파된 브리스톨 보포트 호의 승무원을 구조하는 데 도움을 주어 상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에레미아 8:6-7절은 그 말씀입니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 여기서 ”학“은 황새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예나 지금이나 철새들이 이동하는 통로입니다. 가을이 되면 많은 새가 터키와 유럽을 있는 보스 포루스 해협을 통과, 터키를 횡단하여 이스라엘과 나일 강변을 따라 남하하여 아프리카에서 따뜻한 겨울을 보냅니다. 그리고 봄이 오면 한 마리도 빠짐없이 자기 서식지로 돌아갑니다. 조류 학자들은 대략 50만 마리의 황새가 매년 봄, 가을에 이 길을 따라 가고 오가는 것으로 봅니다. 에레미아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철새도 갔던 길을 따라 다시 돌아오는 데, 한낱 미물인 새도 때가 되면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데 내 백성 이스라엘은 아직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구나. 새들도 돌아오는데“.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주야로 하나님께 돌아옵니까? 철새처럼 돌아옵니까? 하나님께 대한 타는 목마름이 있습니까? 누구나 하나님을 떠날 수 있으나 돌아오면 됩니다. 돌아오면 하나님이 복주시고 쓰십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삭개오를 쓰시는 두 번째 과정이 하나님의 부름입니다. 삭개오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의 마음으로 뽕나무위에 올라갔습니다. 물론 이 뽕나무는 우리 나라 뽕나무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돌무화과나무입니다. 여리고에 가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정자나무 크기로 대략 10-15미터 크기입니다. 잎은 마치 고무나무같고 칙칙합니다. 잎이 크기 때문에 속에서 보면 밖이 잘 보이지만 밖에서 보면 속이 안 보입니다. 여러분은 뽕나무속에 숨어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삭개오를 보십니까? 삭개오는 지금 자기가 거기 있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안 본다는 것이 때로 얼마나 편한 일입니까? 그래서 어떤 분이 성가대의 세 가지 좋은 점을 말했습니다. 첫째는 옷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가운만 입으면 됩니다. 둘째는 자리 걱장할 필요가 없다. 아무리 자리가 없어도 성가대석은 비어 있습니다. 셋째가 중요합니다. 설교 시간에 목사님의 시선을 피할 수 있다. 그래서 약간 졸아도 좋다. 그런데 아무도 자기가 거기 있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뽕나무를 바라보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눅19: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리라 하겠다”. 돌무화과나무 그 칙칙한 잎사귀속에 감추인 삭개오를 알아보신 예수님, 누가 삭개오가 거기 있다고 말했습니까? 삭개오입니까? 제자들입니까? 아무도 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삭개오를 알아 보셨습니다.
마치 김춘수 시인이 쓴 “꽃”과 같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렇습니다. 삭개오의 이름을 예수님이 불러주실 때 삭개오는 꽃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리 이름 불러주실 때 우리도 꽃이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을 알았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먼저 알았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먼저 아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시139편 1-3절, “여호아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아시오니 여호아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이다”.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십니다. 나에게 다하여 하나도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왜 외로운지 아십니까? 다쳐서 외롭고 힘들어서 외롭고 무슨 일이 안돼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내가 혼자라 외로운 것입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 것입니다. 베데스타 연못가에서 38년된 병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태도를 아십니까? 요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께서 38면된 병자를 보시고 아셨습니다. 요일3:20,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 하나 하나를 부르시고 알아주십니다.
그때 제가 배운 노래가 “내 이름 아시죠”입니다. 여러분도 아십니까? 가사를 보세요.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찬양).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용을 받는 것은 그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고 가까이 할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고 사용받는 것도 부름받은 뒤입니다. 우리는 부름받았기 때문에 사용받는 것입니다. 일찍 부름받을수록 많이 사용받습니다. 아이작 와츠는 아홉 살에, 빌리 그레이엄은 세 살에 부름 받았습니다. 전도자 무디는 초등학교때, 스펄전 목사님은 열두 살 때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일찍 부름 받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늦게 부름 받았어도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면 그때가 가장 빠른 것입니다. 모세는 80세에 부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 받았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나이 많아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켈란젤로라는 사람은 천장화를 90세에 그렸습니다. 에디슨은 85세에 등사기를 발명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88세까지 말 타고 다니며 전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렀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쓰임을 받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과 교제했습니다
삭개오가 하나님을 쓰임받은 세 번째 원인은 예수님과 교제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5절을 보세요. 눅19: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리라 하겠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부를 뿐 아니라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 나무에서 내려온 삭개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습니다. 삭개오에게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예수님을 집에 모시고 예수님과 교제가 시작된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와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그의 집에 방문한 것도 아닙니다. 그 날 밤 그 집에서 주무시면서 그와 대화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삭개오와 길게 교제하신 이유를 압니까?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서 우리는 치유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앞에 선 삭개오의 마음에 있던 가장 중요한 마것은 무엇입니까? 죄책감입니다. 수치감입니다. “아, 나는 이름은 거룩한 자인데 거룩하게 살지 못했구나”. 그래서 “틀렸다. 인생을 그만 두자” 하면 잘못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야해” 이 마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입니다. 죄책감은 우리가 하나님앞에 설 때 자연스럽게 느끼는 피조물의 감정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피조물은 피조물입니다. 아무리 잘 살아도 우리는 죄인이며 연약한 인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앞에 설 때 죄의식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죄책감은 우리를 하나님앞에서 피멸시키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앞에서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감정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나올 때 죄인이라는 고백과 함께 나옵니까?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영혼의 통증을 자주 느끼는 사람입니다. 베네딕트 그뢰쉘이란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인은 우리보다 더욱 자주 회개하는 죄인이다.” 성인이라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성인이나 범인이나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범인은 자기 죄를 덜 느끼는 죄인이고 성인은 자기 죄를 더 자주 느끼는 죄인입니다. 죄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사마리아 여인처럼 영혼의 통증을 갖고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교제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교제하면 우리의 죄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우리의 약함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필립 얀시가 말한대로 우리의 상처는 하나님의 은혜가 스며드는 틈새입니다. 우리는 가능하면 약한 모습 안보이려고 노력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우리가 실수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완전함이 임합니다. 이것을 예수님과 교제하면서 깨닫습니다.
주님과 교제할수록 약한 나를 더 받아들이게 되고 용납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용납한 나를 더 용납하게 됩니다. 이번에 미국에서 뉴욕을 지나오면서 맨하탄을 지났습니다. 세계의 경재와 부의 중심 멘하탄, 우리 나라 여의도의 10배인 맨하탄이 세계 경제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며 놀랐습니다. 처음에 맨하탄은 인디언의 소유였습니다. 인디언 추장이 맨하턴이 섬이고 쓸모없는 땅으로 여겨 당시 네델란드 사람에게 25불에 팔았답니다. 25불이면 3만원도 안됩니다. 예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쓰임받는 두 가지를 준비시킵니다. 하나는 자신의 죄와 실수를 받아들이게 하고 다음 하나님안에서 나의 가치를 깨닫게 합니다. 분명 삭개오도 그날 밤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실수를 덮어주시며 삭개오의 죄와 실수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의 통로임을 깨닫게 하시고 부족한 삭개오도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닫아 자신의 가치를 알게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삭개오처럼 죄와 허물과 상처를 가진 존재임을 믿습니까? 그 죄와 허물은 나쁜 것이지만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 나갈 수 있음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앞에 가치있는 존재임을 믿습니까?
삭개오가 하나님의 사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받은 마지막 은혜가 하나님께 사용받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발견하는 중요한 초점 한 가지는 이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세리를 그만 두었다는 증거가 없다”. 성경 어디를 봐도 없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 만나고 직장을 그만 두고 신학교 간 것이 아니라 직장안에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직장을 바꾸는 것보다 근본적인 것은 자기를 바꾸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믿고 변화된 후에 신학교갑니다. 그러면 누가 공무원하고 누가 회사가고 누가 집사하겠습니까? 직업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라 내 삶을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 만난 후에 다시 세무서로 갔습니다. 그때부터 그 세무서가 하나님께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100년 전에 서울 중화동 제일교회에 엄영수가 살았습니다. 그는 왕손의 마부로 일 일했는 데 한번은 그가 모시고 있는 왕손에게 전도했습니다. “나으리, 예수 믿으시죠?” 왕손이 대답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너 같은 상놈이 양반이라도 된다는 것이냐?” 듣기에 따라서 상처가 될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엄영수는 내색도 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으리, 예수 믿는 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믿으면 상놈이 양반되는 것이 아니라 상놈이 좋은 상놈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믿으면 신분상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 만난 후에 다시 세무서로 돌아 갔다는 것과 함께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8절입니다.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예수님 만난 후에도 삭개오는 돈을 벌지 않고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돈에 대한 태도를 바꿨습니다. 돈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자기 돈을 남에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만난 후에 삭개오는 섬기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는 마차가 다녔습니다. 그 마차는 작지만 세 종류의 좌석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일 앞 자리가 1등석, 가운데가 2등석, 그리고 맨 마지막이 3등석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이 1, 2, 3등석이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사고가 나면 차이가 생깁니다. 차가 사고가 나서 그 자리에서 멈추면 1 등에 탄 사람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2등석은 내려서 고치는 것을 구경합니다. 3등석에 탄 사람은 내려서 마부와 함께 그 차를 함께 고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다릅니다. 1등 신자는 팔을 걷어 붙이고 일하는 신자입니다. 2등신자는 일어나기는 했는 데 관망만 하는 신자입니다. 3등신자는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 신자입니다. 저는 우리 교인 모두 1등 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장 큰 소원은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자되기 원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어도 하나님께 쓰임받지 않으면 그 부가 아무 쓸모 없습니다. 이삭처럼 아리마대 요셉처럼 그 부가 쓰임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공부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부 많이 했다고 하나님의 쓰임받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했으면 그 공부가 하나님께 쓰임받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습니다. 직분을 위해 직분받는 것은 명예직입니다. 한 해를 마치면서 한 해동안 주님을 위해 수고하고 애쓴 성도들을 격려하고 노고를 치하합니다. 이제 새 해를 맞으면서 어떻게 살기를 원합니까? 봉사해야 합니다.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갈망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우리안에 계신 주님으로 인해 우리가 자신감과 가치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용을 받는 것입니다.
눅19:1-10 2010.12.12(일)
하나님께 쓰임받는 자의 행복
삭개오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가졌습니다
렘8:6-7,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
예수님이 삭개오를 불렀습니다.
눅19: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리라 하겠다”.
시139:1-3, “여호아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아시오니 여호아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이다”.
요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일3:20,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내 이름 아시죠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찬양).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용을 받는 것은 그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고 가까이 할 때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과 교제했습니다
눅19: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리라 하겠다”.
삭개오가 하나님의 사용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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