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1-12 2011.1.9(일)
예수님의 행복
2011년이 시작되면서 우리가 기도하는 제목은 예수님안에서 풍성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늘의 DNA인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안에 있습니다. 생명은 자랍니다. 살아 있는 것은 자랍니다. 예수님이 생명이 우리안에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자랍니다. 자랄 때 가장 먼저 자라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이 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의 성품안에서 자라고 싶습니까? 세상에서 뜻을 이루어 성공하고, 지식이 자라고, 회사가 자라고, 교회가 자라기 보다 먼저 우리안에 있는 예수님의 인격과 믿음이 자라기를 원합니까?
이를 위해 주신 말씀이 8복입니다. 8복은 예수께서 마태복음 5-7장에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첫 번째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많은 말씀중에서 가장 먼저 8복을 말씀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구약은 대부분 율법으로, 저주로, 심판으로 끝나는 데 신약으로 오면 축복으로 시작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복이 있나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은 축복과 은혜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저주와 심판이 아닙니다.
우리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자라기 위해 우리가 가장 알아야 할 것이 “복”입니다. 아마도 한국 사람들처럼 복을 좋아하는 민족은 없을 것입니다. 어디 가도 “복”입니다. 대문에도, 그릇에도, 장롱에도, 이불에도, 심지어 베겟니에도 “복”이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소지황금출 개문만복래”(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복이 들어온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이렇게 복을 좋아하는 민족도 많지 않습니다.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굿”도 복을 받기 위함입니다. 굿은 한마디로 “제재초복”(除災招福)을 받기 위해 있습니다. 재앙을 피하고 복을 불러오기 위함입니다. 대표적인 “굿”이 “기복제”입니다. 현세에서 누리는 부귀와 명예와 장수가 주요 내용입니다. 이것이 교회로 들어오면서 교회안에 복을 사모하는 풍조가 생겼습니다. 그것을 “기복주의”라고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복을 받아야 하며 진정한 복은 무엇입니까? 복과 예수님 닮은 성품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최고의 복은 무엇입니까?
먼저 복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복을 말할 때 자주 빠지는 함정은 우리는 복을 좋아하지만 복을 주시는 분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입춘대길”, 봄이 오면 대로가 열린다. “소문만복래”, “웃으면 만복이 임한다”.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누가 복을 줍니까? 봄이 오면 자동적으로 복이 옵니까? 봄이 복을 줍니까? 그러면 여름은 복을 안 주고 가을, 겨울은 저주를 줍니까? 누가 봄을 만든 것입니까? ”웃으면 복이 옵니다“. 그러나 누가 복을 줍니까? 웃음 자체입니까? 웃기만 하면 복이 저절로 온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죄송한 말이지만 가장 복을 많이 받을 사람은 바보입니다. 바보는 늘 웃고 다닙니다. 웃기만 하면 복을 받는다면 바보가 가장 많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웃음 자체가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웃게 하시고 웃음으로 통해 복을 주시려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냐가 중요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5복이 있습니다. 수(壽), 오래 사는 것입니다. 부(富), 부자되는 것입니다. 강령(康寧),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입니다. 유호덕(攸好德), 덕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고종명(考終命), 제 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도 누가 복을 주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수, 오래만 살면 복을 받는 것입니까? 누가 오래 살게 합니까? 부, 부자만 되면 복을 받은 것입니까? 돈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고종명, 제 명대로 살다 죽으면 복받은 것입니까? 아무나 제 명대로 삽니까? 누가 제 명대로 살게 합니까? 복보다 중요한 것은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점에서 복에 대한 다른 관점을 보여 줍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8복은 우리가 받는 복이 무엇인가를 말할 뿐 아니라 누가 그 복을 주는가도 말합니다. 가령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은 것이요”했습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땅”과 “기업”입니다. 우리가 받을 복입니다. 그런데 그 복이 어떤 사람에게 오는지도 보아야 합니다.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의 관심은 “땅과 기업”이 아니라 온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땅과 기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온유한 자에게만 주십니다. 그러나 가장 안 보인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내가 무엇을 받느냐? 땅과 기업, 어떻게 될 때 받느냐? 온유한 자,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누가 복을 주느냐?” 하나님이 주십니다. 주고 안 주는 것을 하나님이 결정합니다. 복보다 복을 주시는 분이 더 중요합니다. 복을 주시는 분 없이 복만 바라는 것을 “기복주의”라 합니다. 그것도 복이라면 무당적 복입니다. 복에만 관심이 있고 복주시는 분과 관계가 없으면 복을 받아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래 못 갑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이 이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늘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이 “바룩 하쉠”입니다. “하쉠”은 “이름”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이름을 신성시하여 그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다른 상징적인 말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 중 하나가 “하쉠”입니다. 이는 ”그 이름“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름 중의 뛰어난 이름이기 때문에 ”그 이름“, 곧 ”하쉠“입니다. 이 이름앞에 ”축복“이란 말을 넣어서 ”바룩 하쉠“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여, 당신의 이름은 복됩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기도할 때도 하고, 예배드릴 때도 하고 식사할 때도 하고 대화할 때도 합니다. “바룩 하쉠, 아도나이”. "하나님, 당신은 복되십니다“. 우리에게 무슨 복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복을 주든지 그 복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최고로 복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뱃세다 들녃에서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바룩 하셈 아도나이“. ”하나님, 하나님은 복되십니다”. 심지어 욥이 칡흙같은 고난속에서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욥1:21, “주신 이도 여호아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아시니 여호아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바룩 하쉠 아도나이”. “여호아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여러분도 복자체 보다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면 모든 복을 다 얻지만 복만 사랑하면 복도 못받고 하나님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님에게 어느날 할머니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자신을 집사라고 밝힌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장로님 뵙기를 30년이나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보기를 원했습니까?” 했더니 자기에게 외아들 하나가 있는데 간절히 기도해서 장로가 되었노라고 하면서 그 장로 아들에게 아들 일곱이 있는데 다 예수 잘 믿고 복을 받았는 데 다만 한 가지를 못받아서 찾아 왔노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아들이 장로인데 조금 가난해요. 다른 것은 다 받았는 데 물질 축복을 못 받았어요. 우리 아들과 손자들이 물질 축복을 받도록 기도해 주세요.” 그때 김용기 장로님이 말했다고 합니다. “집사님, 제가 전국을 다 다녀봐도 밥 굶은 장로는 없습디다. 이미 예수믿는 것이 복이고 장로된 것자체가 복인데 무슨 복을 더 바랍니까? 장로가 할 일은 하나님 잘 믿고 그를 잘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복은 모두 따라옵니다”. 그리고 돌려보냈답니다. 물질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복보다 복을 주신 분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말합니다. 시16: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주님 자신이 복입니다. 시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입니다. 복보다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 자신을 더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축복이 행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복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는 복은 두 가지입니다. “축복”과 “행복”입니다. 이 두 단어가 우리 말로는 비슷하여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축복받으세요” 하는 말과 “행복하세요”라는 말은 비슷하게 쓰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다릅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복”을 뜻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브라카”란 단어와 “아스레이”란 단어입니다. “브라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창1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 복을 받았습니다. 창12:2절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이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브라카”입니다. 이 복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복입니다. 문법적으로도 수동형입니다. 하나님은 주시고 아브라함은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의 근원의 복을 아브라함이 받았습니다. 이 복은 아브라함이 쟁취한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은혜로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복이 있습니다. “아스레이”라는 복입니다. 이 복은 우리가 누리는 복입니다. 이스라엘 12지파중 “아셀”지파가 있습니다. 이 “아셀”이 곧 “아스레이”란 단어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아셀지파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누렸습니다. 창49:20절입니다.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아셀지파는 지금의 갈멜산에서 레바논 해안평야를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지리적으로 이 지역을 아코평야라고 합니다. 이 지역은 아주 비옥하고 아름다운 지역입니다. 그래서 아셀 지파는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평안과 부, 안정과 평화를 누렸습니다. 이 누리는 복을 “아스레이”라고 합니다. “브라카”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면 “아스레이”는 우리가 누리는 복입니다. 우리 말 “축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 복을 우리가 누릴 때 그것을 “행복”이라 합니다. 축복은 행복의 시작입니다. 반드시 축복을 먼저 받아야 행복하게 됩니다. 축복은 하늘에서 내려오고 행복은 땅에서 누려집니다. 축복의 출발지가 하나님이라면 그것의 목적지는 인간의 행복입니다. 축복없이 행복없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으면 축복도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많은 축복을 주셨지만 문제는 인간의 행복입니다.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모두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불행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8복은 “축복”을 말한 것이 아니라 “행복”을 말한 것입니다. 5:3절부터 11절까지 “복이 있나니”라는 말이 9번 나옵니다. 이 말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마카리오리”입니다. 이 말을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아스레이”입니다. 이 말은 앞에서 말한 “행복”입니다. 예수님은 8복을 우리가 이 땅에 누리는 행복으로 주고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축복이지만 땅에서는 행복이 안되는 공허한 복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8복은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셨지만 반드시 이 땅에서 지켜지고 누려지는 복입니다.
자, 보십시오.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천국은 하늘 저 넘어 있는 상상의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누릴 행복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심령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은 가능하고 그렇게만 살면 반드시 천국은 이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4절, ”애통하는 자는 위로 받습니다“. 위로는 죽은 다음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받습니다. 우리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십니다. 5절,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한국교회는 이 기업을 하늘에서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기업은 죽은 다음에 받는 천국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죽은 다음에 받는 기업이 지금 땅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절실하게 바라는 사람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지금 먹을 것이 없는 데 ”천국에 가면 산해진미, 먹을 것이 많이 있다“는 말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앞으로 올지 말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가 땅에 사는 우리에게 행복이 되겠습니까? 기업은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온유하게만 살면 반드시 땅에서 누리는 행복의 조건입니다. 6절, 의에 주리면 배부르고, 7절, 긍휼히 여기면 긍휼히 여김받고 마음이 청결하면 하나님 보고, 화평케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고, 이 모든 것은 이 땅에서 우리 행복을 위해 누리는 축복의 메뉴들입니다. 하늘은 축복으로 받았지만 하늘을 누리는 것은 행복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는 것은 은혜로 주어졌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누리는 것은 우리 행복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성도의 권세입니다.
천국은 분명히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졌지만 그 천국을 땅에서 누리며 사는 것은 우리 행복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또 하나의 복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축복을 받고 행복을 누립니까? 축복은 은혜로 받고 행복은 권리로 누립니까?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받았는 데도 행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질축복은 받았는 데도 가난하게 살고, 건강축복은 받았는데도 마음은 건강하지 못하게 살고, 많은 지식의 축복은 받았는 데도 무식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행복으로 누리십시오. 받은 축복이 없을까봐 염려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염려하십시오. 축복을 행복으로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성품으로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문제는 그 행복을 어떻게 얻느냐가 문제입니다. 누구에게 그 행복이 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행복을 누리게 되는 조건을 찾아 보았습니다. 8가지가 있습니다. 자, 보시죠. 3절,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4절, 애통해야 합니다. 5절, 온유해야 합니다. 6절,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합니다. 7절,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8절,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9절, 화평케 해야 합니다. 10절, 의를 위해 핍박받아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할만 합니까? 행복은 누리고 싶은 데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자세히 보니 내가 가진 속성이 하나도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누가 본래부터 심령이 가난합니까? 여기서 가난이란 자기의 신분을 알리는 것조차 부끄러워 하는 상거지를 말합니다. 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정도로 입에 풀칠할 것조차 없는 것을 말합니다. 소유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욕심도 많고 야심도 많습니다. 마음이 비어 있지 않습니다.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은 슬퍼하는 것입니다. 다만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을 나타날 때 이 단어를 씁니다.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며 슬퍼할 때 이 말을 썻습니다. 그러니까 극도로 슬퍼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남이 잘못될 때 슬퍼합니까? 부모나 자식이 죽으면 누구나 슬퍼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본래 남의 불행을 보고 우는 존재가 아닙니다. 남이 불행이 내 행복이고 남의 행복이 내 불행인 때가 많습니다. 5절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는 움직이는 말을 채찍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남을 위해 자기를 포기합니까? 누가 이유없이 손해볼 때 기꺼이 손해당하고, 누가 모함을 당할 때 억울하다 말하지 않고 견딥니까? 누가 까닭없이 무시당할 때 분노하지 않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못합니다.
6절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의는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나님이 옳다고 말하시는 삶을 위해 목숨거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다 자기 유익을 따라 사는 존재입니다. 자기 감정, 자기 소유, 자기 기분 하나 상하게 하면 온통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손해보면서도 의를 위해 살려고 합니까? 한 두 번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은 못합니다. 7절, “긍휼히 여기라”, 누가 변치 않고 남을 긍휼히 여기겠습니까?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누가 하나님앞에 완전히 깨끗합니까? 9절, “화평케 하는 자는”. 누가 자기 의를 버리고 평화를 좇겠습니까? 10절, 누가 자기 생명을 위협하는 핍박을 기쁘게 받겠습니까? 어렵습니다. 우리의 타고난 천성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기 나오는 행복의 조건들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말합니다. 우리 자신의 성품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의 성품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하지 못하고 온유하지 못하고 남들을 위해 애통해 하지 못하고 의에 목마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못하고 마음이 청결하지도 못하고 본성적으로 화평을 이루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성품이며 예수님안에 거하는 신의 성품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자생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흘러 우리에게 부어지고 적셔지고 채워지고 흘러가는 하늘의 성품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평생에 걸쳐 받는 은혜의 성품입니다.
여러분, 행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최근에 나온 한 사전에 보면 “행복은 기분 좋은 만족감“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행복을 감정, 특히 쾌락에 매우 가까운 감정과 동일시한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행복의 파탄이 여기서 나옵니다. 행복을 기분좋은 만족에서 찾기 위해 온갖 감정적 삶을 추구하다 보면 행복이 아니라 불행만 맛봅니다. ”만족감“은 행복을 좇는 과정에서 얻는 부산물일 뿐입니다. 행복은 또한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소유는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만 평안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도 행복하게 살았던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돈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지만 잠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책은 살 수 있지만 지혜는 살 수 없다. 돈으로 음식은 살 수 있지만 입맛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약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다. 돈으로 비싼 옷을 살 수 있지만 교양은 살 수 없다“. 돈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돈이 행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간의 좋은 관계가 행복의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가족은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가장 좋은 축복의 관문입니다. 가족을 진실로 사랑하고 정기적으로 대화하기만 해도 많은 문제를 막을 수 있습니다. 미국사람은 매주 여섯 시간이상을 쇼핑하면서도 자녀와 대화하는 데는 정작 40분밖에 되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 사회가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족이라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간의 폭력, 갈등, 다툼으로 끔찍한 살인사건이 늘어만 갑니다. 왜 그런가 하고 보면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갖는 인격과 성품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7년 4월에 일어난 미국 버지니아공대 조승희 군의 사건이 그것을 말합니다. 미국에 이민와 먹고 사느라 바쁜 부모가 아들을 자상하게 챙기기 못했습니다. 머리가 좋아 버지니아공대에 들어갔지만 조승희는 항상 외로웠습니다. 그러다가 사고를 내 33명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무고한 생명을 뺏은 후에도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정신이상자거나 아니면 자폐아가 아닌가 의심했지만 그는 정신이상자도 아니고 자폐아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인격과 성품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정말 우리 자녀들이 공부만 잘 하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의 문제는 공부의 문제가 아닙니다. 공부는 잘해 유학, 좋은 대학에 갈 수는 있지만 잘못된 가치관, 비트러진 성품은 고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답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예수님이 가진 신적 품성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인류 최고의 혁명은 마음의 혁명입니다. 마음이 안 바뀌고는 별 일을 다 해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마음의 변화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으로의 변화는 두 가지로 우리에게 옵니다. 하나는 은혜로 옵니다. 은혜는 우리안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계속 그 생명을 흘러보내 옵니다. 생수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계속 생명을 공급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성품으로 변화됩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 복잡한 우리가 가난하게 됩니다. 강팍한 우리가 촉촉한 눈물로 적시는 부드러운 사람이 됩니다. 완악한 우리가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사랑이 없던 우리가 긍휼의 사람이 됩니다. 마음이 더러운 우리가 청결한 사람 됩니다. 갈등과 다툼속에 사는 우리가 평화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은혜로 된다고 우리의 노력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공짜지만 성장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영적 성숙이 사다리를 오르는 것과 같다면 누구도 단번에 사다리를 오를 수 없습니다. 중세의 요한 크리마쿠스가 말한대로 “세상 사람이 쾌락으로 빚어지듯이 그리스도인은 영성으로 빚어집니다”. 영적성장의 원리는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예수님 닮는 노력입니다. 은혜와 훈련이 같이 가야 합니다. “은혜는 훈련으로 가고 훈련은 은혜로 갑니다”. 은혜없이는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지 않고 훈련없이는 그 생명이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은 앞에서 은혜의 주인이 끌고 뒤에서 훈련의 하인이 미는 수레를 타고 언덕을 오릅니다. 영적 성장은 가능하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평생 소원은 예수님의 아름다운 인격과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5:1-12 2011.1.9(일)
예수님의 행복
복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욥1:21, “주신 이도 여호아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아시니 여호아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시16: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시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축복이 행복이 되어야 합니다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49:20,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복=축복(브라카)
행복(아스레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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