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4, 시34:18 2011.1.23(일)
우는 마음, 위로의 축복
풍성한 생명으로 자라는 한 해, 올 해는 하나님의 은혜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할까요? 하나님의 축복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행복으로 임해야 합니다. 축복이 행복이 되는 통로는 예수님입니다. 축복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행복으로 다가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으면 행복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닮기를 원합니까? 제가 좋아하는 찬양이 있습니다. “사랑의 주님, 닮기 원하네. 그 아름다운 주 예수를. 이 세상에서 저 천국까지 닮기 원하네. 주 예수를”. 여러분은 올 한 해 예수님 닮는 그것에 신앙생활의 모든 목표를 두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읽은 것이 8복입니다. 마5장에 나타난 8복은 예수님 자신의 성품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의에 주린자, 긍휼이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예수님의 아름다운 성품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성품 두 번째가 나옵니다. 4절,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상식을 뛰어 넘습니다. 지난 주에도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 했습니다. 우리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 생각에는 가난하면 불행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하면 행복하다 말씀합니다. 오늘도 애통하는 자가 행복하다 말씀합니다. 애통이란 애절하게 우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는 자가 행복할 수 있습니까? “소문만복래, 웃으면 복이 와요” 하는 말은 있습니다. 그러나 “우는 자가 복이 있다”라는 말은 없습니다. 과연 우는 것이 복일까요?
놀랍게도 현대 과학의 발전으로 우는 것이 복이라는 증거가 속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몇 해 전 영국의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비운의 생을 마쳤습니다. 이때 그녀를 사랑했던 영국국민 전체가 슬픔에 빠졌습니다. 불행한 인생을 살고 간 왕세자비를 사람들은 애통하고 슬퍼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보며 눈물을 흘렸고 장례식이 거행되는 날 영국 전체가 흐느꼈습니다. 그 이후 변화된 일이 생겼습니다. 상담소에 상담받으러 온 사람이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영국 사회의 범죄가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의학자들은 다이애나의 죽음을 그 원인으로 지목했습니다. 다이애나 때문에 흘린 눈물이 국민들안에 있던 스트레스를 이기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이애나 이펙트(Diana Effect)”, “다이애나 효과”라고 불렀습니다. 다이애나로 인한 눈물이 국민들의 마음을 치료한 것입니다.
눈물은 국가나 개인이나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합니다. 눈물을 흘릴때 심장 박동이 증가하고 혈액순환이 빨라져 산소와 영양분의 순환에 속도가 붙습니다. 엔도르핀은 웃을 때 생기는 호르몬이지만, 글로불린같은 항체는 울 때 생기는 호르몬입니다. 우리가 울면 글로불린 항체가 2배 이상 생겨 암세포를 억제합니다. 무엇보다 눈물은 마음의 찌꺼기들을 배출합니다. 우리가 울면 우리 몸안에 있는 모든 나쁜 것이 눈물과 함께 밖으로 흘러 갑니다. 오늘 그 주님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요”. 그래서 눈물은 다만 슬픔의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우리의 몸을 살리기 위해서도 울어야 하고 따뜻한 인간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도 울어야 합니다. 병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도 울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울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그렇게 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잃고 울었습니다. 하갈이 광야에 쫓겨나 울었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잃고 울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형제들을 보고 울었습니다. 디윗이 죄짓고 울고 압살롬 때문에 울었습니다. 한나가 아들 못 낳아서 울었습니다. 에레미아가 멸망하는 조국 때문에 울고 느헤미아가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울었습니다. 베드로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울고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과 함께 울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눈물이 많았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웃었다는 기록은 없어도 울었다는 기록은 세 번 나옵니다. 예수님은 멸망하게 될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울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바라보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지기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울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할까? 크게 세 가지를 위해 울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울고 남을 위해 울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울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우리가 울어야 할 가장 첫 번째 대상은 우리 자신입니다.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울어야 할까요? 하나님앞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주 사람을 초청합니다. 식사를 하며 함께 대화하는 것이 유대인의 교제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막 바리새인의 집에 도착하여 식탁에 앉는 순간, 한 여인이 들어왔습니다. 여인은 조용히 예수님 뒤로 들어와 선 채로 울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초청받지 않은 사람이 집에 온 것도 놀라운 일이고 식탁에 마주앉는 즐거운 시간에 우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순간 생각했습니다. “아마, 저 여자가 예수님께 무슨 할 말이 있나 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울기만 했습니다. 조금 울다 말겠지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울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더니 또 웁니다. 위에서 떨어진 눈물이 예수님 발에 뚝뚝 떨어졌습니다. 여인은 자기의 긴 머리를 풀더니 그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입맞추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사람중에 누군가가 “죄인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왜 죄인이란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을까요? 예수님 시대의 “죄인”은 보통 남자는 세리, 여자는 창녀를 말합니다. 세리가 죄인인 것은 다 압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세금이상을 걷워 개인적으로 착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창녀가 죄인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가장 큰 죄로 여기는 두 죄가 있습니다. 우상숭배와 간음죄입니다. 이 두 죄를 지으면 무조건 돌로 쳐죽입니다. 후에 형벌이 더 강화되어 간음죄의 경우는 먼저 인분통에 집어 넣고 굴린 후에 돌로 칩니다. 그러니까 간음죄가 가장 나쁜 죄라는 것입니다. 여인이 바로 그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인이 예수님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여인이 어떻게 합니까? 눅7:38절입니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왜 이 여인은 예수님앞에서 하염없이 울었을까요? “한”이 많은 사람은 웁니다. 가슴속에 첩첩히 한이 쌓인 사람은 웁니다. 자기를 창녀로 내몬 인생 살이 서럽고 힘들고 외로워서 웁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은 웁니다. “상처”를 히브리어로 “쉐벨”이라고 부릅니다. “쉐벨”은 “깨지다, 망가지다”라는 뜻을 가진 “샤발”에서 나왔습니다. 우리 말 “사발”과 같습니다. 사발처럼 깨지고 부서진 것이 상처입니다. 부서지고 부서져 삶이 망가진 사람은 웁니다. 그 깨어진 그릇에서 나오는 물 때문에 웁니다. 죄가 많은 사람은 웁니다. 내가 죄은 죄 때문에 속생해서 웁니다. 그렇게 하면 안될 것을 알면서 나도 모르게 죄를 짓는 내가 미워 웁니다.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내가 원치 않은 악을 행하는 내가 싫어서 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탄식하며 웁니다.
사람은 평소에 자기가 죄인인 줄 모릅니다. 그래도 나는 괜찮다고 하고 삽니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자기 실체를 바라봅니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형편없는 존재인 것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고상하던 입에서 악담과 저주가 쏟아져 나옵니다. 경건하다 생각했던 내 몸에서 그렇게 난삽한 행동이 나올 수 없습니다. 뒷골목 진흙탕 세상은 모르고 백로같이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술 한 잔 먹었는 데 나도 모르게 죄의 진흙탕에 뒹글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아, 나는 백노가 아니라 까마귀였구나”. 그러다 어느날 하나님앞에 섭니다. 평소에 괜찮은 존재인 내가 하나님앞에 서보니 영락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밝은 빛앞에 숨을 데도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그렇게 더럽고 추하다는 사실이 놀랍고 슬픕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평소에 아브라함은 자기가 괜찮은 믿음의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하나님 앞에 서자 자기는 너무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외쳤습니다. 창18:27, “하나님, 나는 티끌과 재같은 존재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깨졌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온 베드로였습니다. 밤새 그물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던 날, 예수님이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 말씀했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붕어 새끼 하나 안 보이던 바다에 새까맣게 물고기들이 물려 옵니다. 깜짝 놀라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소리쳤습니다. 눅5:8,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사야가 그랬습니다. 궁중에서 왕을 모시고 음악을 연주하고 늘 믿음으로 살던 이사야였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노래하는 자기 입술만큼은 깨끗하다 생각했습니다. 어느날 성전에서 기도하는 데 하늘의 빛이 임하고 천사가 내려왔습니다. 그 빛앞에 노출되자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탄식했습니다. 사6:5,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아이신 왕을 뵈었슴이로다”. 누구나 하나님앞에 서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탄식합니다.
거룩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은 것이 거룩이 아니라 죄짓고 회개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성자는 죄짓지 않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회개하는 죄인입니다. 어거스틴이 그랬습니다. <참회록>에 보면 어거스틴은 어느날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하염없이 통곡합니다. 젊은 시절, 얼마나 오랫동안 방황했습니까? 그 어머니 모니카가 얼마나 울며 기도했습니까? 그러나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자식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완악하던 어거스틴이 어느날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앉아 있는 데 자기 죄가 생각나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완악한 것도 인력으로 안되지만 죄를 슬퍼하는 것도 인력으로 막지 못합니다.
그가 쓴 <참회록>에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어느날 깊은 상념이 내 영혼의 밑바닥에서 나의 비참을 들추어 내었을 때 나의 눈에서는 한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혼자서 소리 내어 맘껏 울기 위해 내 친구 알피리우스 곁을 빠져나왔다. 그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방해가 될 것 같아 아주 멀리 떨어져 나왔다. ..... 그리고 무화과나무를 발견하고 그 밑에 털석 주저앉았다. 그때부터 내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 아,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쓰디쓴 회한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한 사람, 어거스틴의 애통의 눈물이 전 세계 기독교 역사를 바꿔 놓았습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애통하는 눈물, 그 눈물은 누가 주는 것입니까? 누가 우리안에서 흐르는 애통의 눈물을 막습니까? 그 눈물은 우리안에 있는 주님의 눈물입니다. 우리안에 있는 주님의 마음이 내 속에 눈물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야,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간구하는데 너는 여전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사랑하는 자야 내가 너를 위해 어떻게 하면 좋으랴. 내 몸을 찢어 십자가에 못박았건만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더 할꼬. 내 눈이 시냇처럼 눈물로 흐르는구나. 나는 네가 더 거룩해지고 나를 닮은 좋은 자녀이기를 바랐는 데 너는 점점 나를 더 떠나가고 있구나. 사랑하는 자야 내가 너를 위해 어떻게 할꼬? 사랑하는 자야. 내가 너를 위해 어떻게 할꼬?”. 우리안에 주님이 우리고 우리에게 그 눈물이 흐릅니다.
저는 오랫동안 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해 왔습니다. 아파트 없는 데서만 목회하다가 한신교회 와서 아파트에 둘려 쌓이는 것을 보고 제 마음은 불탔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내 꿈을 이루어주시나 보다“. 그러나 어느날 하나님이 내 뜻대로 교회 성장을 이루어주지 않자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하나님, 얼마동안 오랫동안 기다려온 교회 부흥입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더딥니까? 답답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나도 답답하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교회 부흥 때문에 답답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답답해하신 이유는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더 하나님을 닮지 않아 답답해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이목사야, 나도 답답하구나. 너는 교회 부흥이 더디다고 답답해 하지만 나는 네가 도무지 거룩해지지 않아서 답답하구나. 너는 언제나 나를 닮겠니? 너는 언제나 내 마음을 품겠니? 너는 언제나 네 죄를 버리고 완전히 내 앞에서 항복하겠니? 너는 언제까지 네 습관적인 죄를 버리지 못하고 그렇게 살겠니? 정말 답답하다. 마음이 아프다“. 하나님의 탄식을 알고 제가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잘 안돼서 답답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닮지 않아서 거룩하지 않아서 습관적인 죄를 버리지 못하여 여전히 죄의 속박속에 사는 것을 보고 답답해 하십니다. 울어야 합니다. 우리안에 계신 주님의 마음으로 울어야 합니다. 주님의 눈물이 우리를 통해 흘러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 눈물 흘리는 자는 위로를 받습니다.
이웃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우리가 울어야 할 두 번째 대상은 이웃입니다. 함께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예수님만큼 이웃을 위해 우신 분은 없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평소에 사랑하여 자주 찾고 기도해주신 나사로였습니다. 서둘러 나사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사로는 동굴에 뉘여지고 사람들은 애곡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도 안됐지만 나사로를 위해 슬피 우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요11:33입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여기에 “비통히 여기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옛날 성경에는 “통분이 여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엠브리마스타이”인데 말이 콧김을 내뿜을 때는 온 몸을 크게 움직이며 나는 소리를 말합니다. 말은 울 때는 온 몸을 쥐어짜 탄식하는 소리로 웁니다. 오한들린 사람처럼 온 몸을 벌벌 떨면서 웁니다. 이 말이 예수님이 비통해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가 지은 피조물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말이 떨면서 우는 것처럼 울 필요가 있나요? 나사로 하나 죽었다고 세상이 달라집니까? 정말 우리가 사모할 것이 예수님의 이 눈물입니다. 요11:35에도 나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그냥 눈물을 흘리신 것이 아니라 소리내서 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피조물 하나의 죽음을 가슴을 쥐어짜매 우셨던 눈물, 그 사랑의 마음을 우리가 품어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이 눈물이 있습니까? 이 땅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눈물이 있습니까? 두어 주 전에는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재개발로 인해 쫓겨난 교회와 성도들이 모여 정부와 교회를 향하여 살려 달라고 절규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지금 전국에는 재개발지역에 속해 있는 1만3000여 교회중 1만 2500여개가 쫓겨나고 있습니다. 아주 소수의 교회만 재개발지역에 종교부지를 받고 나머지 대부분은 대책없이 쫓겨나고 있습니다. 처음 그런 모임이 있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또 모임을 마치고 시위할 계획도 있다고 해서 가면 안될 모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기도하는 데 재개발 때문에 쫓겨난 교회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대부분 그런 교회는 20명, 30명, 미자립 교회고 그나마 그 수가 12,500개나 됩니다. 한국 교회를 6만으로 잡는다 해도 무려 1/4입니다. 작은 수가 아닙니다. 저희 교회도 아파트 진다고 나가라고 한 적이 있고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쫓겨날 뻔 했습니다. 그런데 힘없이 약한 교회가 땅 살 능력이 없으면 쫓겨나야 합니다. 기도하다가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참 울었습니다. 우리 교회와 똑같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역자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아픈 사연을 들었습니다. 하나같이 가슴아픈 내용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떠 올랐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하루 아침에 교회를 잃고 쫓겨난 목회자와 교회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눈물이 있습니까?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에 대해 안타까운 눈물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때는 교인들이 더 냉정합니다. 평소에 잘 지내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관계가 멀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어떤 교인 하나가 교회를 못 나왔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가정적으로도 어려웠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분이 끝까지 그를 찾아가서 결국 회복했습니다. 물어보니까 한 20번은 간 것 같다고 합니다. 20번을 가서 눈물로 기도했다면 이 세상에 누구도 회복됩니다. 사랑하는 목자 여러분, 그런 심정으로 목장 식구를 사랑하시나요? 목원이 아프면 내가 아픈 것과 같은가요?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교회에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목숨걸고 전도했는 데 안 나와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차마 포기할 수 없이 기도하다가 결심했습니다. “그 사람이 회복될 때까지 내가 그 집앞에 기도하리라“. 그 추운 겨울날 일주일을 그 집앞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어느날 그 사람이 집에 들어가려다 보니까 전도자가 집앞에 서 있습니다. 그가 그를 보자 너무 반가와 ”왕“하고 울었습니다. 그때 이 사람이 회복되었습니다. 눈물이 그를 살린 것입니다.
저는 요즘 눈물이 많아졌습니다. 특히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 데 동네북처럼 이리 맞고 저리 맞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파 차마 볼 수 없습니다. 두 주 전 월요일에 한국교회 나쁜 일이 생겼을 때는 아예 기도원에 가서 아무도 안 만났습니다. 한국교회 성도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혹시 목회자가 잘못했거든 용서해 주세요. 목회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합니다. 그러나 잘 하려고 하다가 한 두 가지 실수했다면 교인들이 용서하셔야 합니다. 교회문제는 오직 교회에서만 해결합시다. 목회자가 아주 큰 실수를 하지 않은 한 판단은 하나님께 맡깁시다. 서로에 대한 긍휼을 회복합시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날카로운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서로를 덮는 예수님의 눈물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눈물이 메말라 간다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판단할 수 있습니까? 목회자는 당연히 실수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실수했을 때 교인이 덮는다면 그는 목회자보다 큰 자입니다. 주여, 한국교회에 긍휼의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은혜의 강물이 흐르게 하옵소서. 서로에 대한 날카로운 판단보다 긍휼의 마음, 애통하는 마음, 눈물의 마음을 주옵소서. 그 눈물이 우리에게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우리가 울어야 할 마지막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부터 600년 전에 영국에 줄리안이라는 성녀가 살았습니다. 그는 평생 세 가지 상처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첫째, “주여, 나에게 회개의 상처를 주옵소서”. 자기 죄에 대한 간절한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둘째 “주여, 나에게 긍휼의 상처를 주옵소서”. 이웃에 대한 긍휼의 눈물이었습니다.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주여, 나에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처를 주옵소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쥴리안은 이것은 불치의 향수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영혼의 고향인 하늘 나라를 위한 그 일에 간절한 열망을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사사랑하는 열망이 눈물이 되어야 합니다. 에레미아가 그랬습니다. 그는 저기 조국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애2:18절입니다.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찌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찌어다.”(애3:48-49절입니다.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의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러분도 이 조국이 평화로운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강같이 눈물흘려 기도합니까?
바울이 그랬습니다. 바울은 그가 세우고 섬겼던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기 위해 밤낮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고후2: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행20:31절,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에배소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빌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빌립보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최고의 눈물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눈물입니다. 옛날 사막교부중에 팜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한번은 사막에서 알렉산드리아로 나갔는 데 거리에서 어떤 여자가 남자들앞에서 춤을 춥니다. 팜보가 그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왜 우느냐고 묻자 팜보가 말합니다. “두 가지 때문에 웁니다. 하나는 그녀가 하나님을 믿지 않아 슬퍼서 울고 또 하나는 그가 악한 인간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도 저렇게 힘쓰는 데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애쓰고 있지 못하다는 것 때문에 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애통하면 하나님으로 인해 위로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애통하여 그 일로 일해 격려받고 위로를 받습니다.
울어야 합니다. 우는 것이 복이요 울면 행복합니다. 내 죄를 위해 울면 용서받아 위로 받고 남을 위해 울면 사랑 때문에 위로받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울면 하늘의 위로로 위로받습니다. 우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우리 평생 기도는 주여, 우리에게 세상을 위해서는 적게 울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많이 울게 하옵소서. 미국 시카고에 “커늘 클라크”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불량배들을 회개시킨 목사님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울보 목사였습니다. 설교 중에 울고 길을 덛다가 울고 사람 보면 울고, 그래서 어느 때 기도했답니다. “사람들 창피하니 다시는 울지 않게 하옵소서”. 그때부터 눈물이 그쳤는 데 동시에 설교를 듣고 회개하는 사람도 사라지고 교회 부흥도 중단되었답니다. 그가 다시 울보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다시 눈물이 돌아와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주여, 나에게 눈물을 주옵주옵소서. 울보 목사, 울보 장로, 울보 성가대, 울보 전도자되게 하옵소서.
여러분, 교회는 문입니다. 크게 두 가지 의미의 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린 문이요, 동시에 세상을 향해 열린 문입니다. 그나마도 열려 있는 문입니다. 누구나 언제라도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환영받는 문입니다. 누구나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먼저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문으로 들어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교회에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대화의 문을 엽니까? 인생이 답답하고 괴로울 때 하나님과 대화의 문만 열면 살 길이 생긴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삽니까? 여러분은 교회에서 예배하고 찬송할 때 하늘의 문이 열려 신령한 천국을 체험하게 되는 것을 아십니까? 예배는 열린 천국문임을 아십니까? 교회에서 예배할 때 천국 문 열리고 교회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한 마음 문 열리고 교회에서 말씀들을 때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의 임재의 문이 열린다는 것을 아십니까? 교회 올 때마다 마음 문 열고, 기도 문 열고, 예배의 문을 열어 신령한 하늘의 문이 평생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문이 교회에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열린 문입니다. 그 문 중에서 가장 큰 문이 선교의 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교회를 제쳐놓고 세상을 선교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상을 구원할 선교의 문으로 쓰고 계십니다. 행13장에서 하나님은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제1차 유럽 선교여행을 다녀오게 했습니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떠나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등을 돌아 다시 안디옥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행14:27-28절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두 사도가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긴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여기에 “믿음의 문을 열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방사회에 복음의 문을 열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함으로 믿음의 문을 여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믿음의 문으로 사용하신 것은 오직 교회뿐입니다. 만일 교회가 이 문을 닫고 있으면 세상은 구원받을 수 없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6:8-9에도 바울은 “믿음의 문”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내가 오순절까지 에배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바울은 에배소에서 믿음의 문을 열기 위해 일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열린 신령한 믿음의 문입니다.
이 문은 한번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 그나마 그 문은 때가 있습니다. 언제나 열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열려 있지만 영원토록 열려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지금 열려 있을 때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선교는 하나님이 문을 열 때 그 문으로 들어가면 선교가 되고 들어가지 않으면 선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중국이 선교를 막지 않고 있지만 오랫동안 선교가 막힌 나라였습니다. 그 중국에 최초로 선교의 문이 1269년에 열릴 뻔 했습니다. 1269년, 스페인 출신의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왔는 데 그 때는 징기스칸이 중국을 다스릴 때입니다. 이름을 원나라라 불렀습니다. 마침 중국을 여행하던 마르코 폴로가 징기스칸을 직접 만나 그와 사귀고 서양의 존재와 그 발달한 문화와 종교를 소개했습니다. 그 말에 감동을 받은 징기스칸가 편지를 써줘서 그것을 가지고 유럽에 갔습니다. 그 편지는 “이 나라에 서양의 과학과 종교가 필요하니 서양의 과학과 종교를 가르칠 선생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징기스칸은 깨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서양 문물이 필요함을 일찍이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받은 유럽이 즉시 행동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꾸물대다가 프란치스칸 소속 선교사 한 사람을 보냈는 데 이미 25년이 지난 뒤였고 무엇보다 징기스칸이 죽은 뒤였습니다. 선교사가 중국에 갔으나 선교사는 환영받지 않았습니다. 선교의 문이 닫히고 만 것입니다. 만일 그때 중국에 선교사가 들어가 서양 문문을 가르치고 기독교가 전파되었다면 지금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국은 그 반대였습니다. 믿음의 문이 열려 있었으나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접촉된 것은 신라시대 당나라를 통해서 였습니다. 당나라에 “경교”란 이름으로 소개된 기독교를 여러 벙법으로 신라에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 온통 마음을 빼았기고 있던 신라는 불교이외의 종교를 금했습니다. 문은 열렸으나 복음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때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공식적으로는 1884년,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이전에 복음의 문이 열릴 뻔 했습니다. 1832년, 화란 선교가 구쯜라프를 통해서 였습니다. 그가 동인도 회사 선박을 타고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고 쇄국정책으로 인해 배마저도 항구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얼마동안 머물다가 그냥 돌아간 적이 있었는 데 그것은 언더우드가 이 땅에 발을 딛기 62년 전이었습니다. 그때 만일 열린 복음의 문으로 이 백성이 들어갔다면 이 민족은 지금보다 훨씬 강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지나간 과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열어 주신 선교의 문을 잘 이용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린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이 그렇고 조선족이 그렇고 북한이 그렇습니다.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고 또 열리고 있습니다.
마5:4, 시34:18 2011.1.23(일)
우는 마음, 위로의 축복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눅7: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눅5:8,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사6:5,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아이신 왕을 뵈었슴이로다”.
이웃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요11: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요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하나님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애2:18,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찌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찌어다.”
애3:48-49,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의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고후2: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행20:31,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빌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추천 설교 > 이윤재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11:11-12 천국문은 열려있다 2011.2.13(일) (0) | 2016.05.03 |
---|---|
영적 성장(4)마5:5 2011.1.30(일) 온유한 마음, 하나님의 마음 (0) | 2016.05.03 |
영적 성장(2) 마5:3, 습3:12 빈 마음 가득한 행복 2011.1.16(일) (0) | 2016.05.03 |
마5:1-12 예수님의 행복 2011.1.9(일) (0) | 2016.05.03 |
눅19:1-10 하나님께 쓰임받는 자의 행복 2010.12.12(일) (0) | 2016.05.03 |